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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양키 입닥쳐" 구호 나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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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양키 입닥쳐" 구호 나온 까닭은?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II.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2. 논설과 산문 속의 미국

앞에서 얘기한대로 1960년 4월 혁명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는데, 이는 미국의 한국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더 중요하게는 민족통일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는 당시 진보적 월간지였던 <사상계>, <세대>, <새벽> 등에 실린 수많은 논평이나 산문에 반영되었다.

유홍렬은 1850년대부터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1910년까지 조선과 미국과의 관계를 검토하면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조순승은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단에 더 큰 책임은 소련에 있다고 했다. 엄민영은 주한미군이 한국인들에 저지르는 일련의 범죄를 열거하며 한미행정협정(SOFA)을 시급히 체결하라고 촉구했다. 조동필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경제 원조를 받는 일부 동남아 국가들이 1950년대에 왜 반미주의를 표출했는지 설명하며,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가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을 심화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경제원조 정책을 비판했다.
김삼규는 1960년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주창했다. 북한은 반미주의를 선언해온 반면 남한은 반공주의를 선언해왔기 때문에, 양쪽이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중립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의 글은 다른 평론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중립통일은 1961년 5월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남한 정치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1960년 가을, 진보정당, 종교단체, 학생조직 등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라는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한반도가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중립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때부터 많은 다른 단체들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통일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은 남한을 "실질적인 정치 경제적 식민지"로 간주했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는 통일운동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군사정권은 반공을 선언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새로운 경제협정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체포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거나 북한과의 협상을 주장했던 사람들 역시 '용공이적' 행위로 체포했다.

5.16쿠데타 이후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동안 표출되지 않았지만, 1962년 1월 파주에서 나무꾼 2명이 미군들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남한 지식인들은 다시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1962년 3월 <사상계> 권두언은 미군 부대 주변의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반복적인 범죄에 대해 깊은 분노를 드러냈다. 그 칼럼은 미군들에 의한 한국인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미국정부가 왜 그렇게 무관심한지 물으며 행정협정을 즉각 체결하라고 촉구했다. 이와 아울러 박관석 역시 1965년 미군들이 한국인들에게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미군 부대 한국인 종업원들의 인권이 부당하게 짓밟힐 때마다, 그리고 미군들의 잉여물자가 한국시장을 교란할 때마다, 행정협정이 필요했다며 즉각 체결을 주장했다.

실제로 1962년 전반기엔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다양한 범죄가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인권 단체들은 결의안을 채택하고 미국 대통령과 주한미국대사 그리고 주한미군사령관 등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은 행정협정 체결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휴전협정이 조인된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1966년 7월에야 마지못해 응했다. 그러나 박관석은 이마저도 매우 불평등하다고 비판했다. 김정기는 3년 뒤인 1969년 한국 사법당국이 미군 범죄자들에게 재판권을 행사하는 게 단 1%도 되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제2의 한미행정협정’을 협상할 때라고 주장했다. 행정협정은 1967년 2월 마침내 발효되었다.

1964년 3월 한국과 일본 정부가 양국 간 외교 정상화를 논의하기 시작하자 김경래는 두 나라가 미국의 압력에 따라 협상을 서두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1951년 10월 한일 외교 정상화를 위한 첫 회담 때부터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외교 정상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대 및 한국이 일본에 예속될 것에 대한 경계가 헛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64년 6월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차기벽은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을 때 미국이 길을 터준 점을 상기하며,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무대 뒤에서 밀어붙인 점을 한탄했다.

사실 1964년 3월부터 1965년 8월까지 한국에서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대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 항의 데모가 처음엔 깊고 넓은 반일감정을 바탕으로 일어났지만, 미국의 강요에 따라 한일협상이 굴욕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미감정도 표출되었다. 미국은 1950년대 초부터 "미국에 대한 한국의 의존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일협정에 관심을 가진 데 반해, 이승만은 오랫동안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싸운 사람으로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붕괴 직후부터 미국은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도록 축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5.16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이 국회와 언론의 견제를 받지 않고 한일협정을 신속하고 단호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한국을 압박했던 것이다. 1962년부터는 한일협정을 "미국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존슨 대통령이 두 나라 대사들을 부르기도 하고, 딘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 장관이 일본 총리와 한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하면서 다그친 것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재정 부담을 일본과 나누기 위해서였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지속되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주한미군사령부는 데모 진압을 위한 병력 차출을 승인했다. 결국 6월 22일 계엄령 하에서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1965년 2월부터는 비준 반대투쟁이 전개되어 1965년 8월 서울에 위수령이 내려질 때까지 항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 시위 과정에서 나온 구호 가운데 하나가 "양키 입 닥쳐!"였다. 한일협정에 대한 미국의 압력에 항의하는 것이었는데, 미국은 한일수교를 처음부터 제안하고 주선하며 될수록 빨리 타결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6월까지 체결할 수 있다고 미국에 맹세하다시피 하고서야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박정희는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더 중요했기에 1964년 11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했는데, 미국은 그의 방미 시기를 한일협상의 진전 과정과 연계시키겠다며 압박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의 압력에 따라 한일협정이 졸속적이고 굴욕적으로 맺어짐에 따라 독도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없었다. 독도 문제가 한일협상의 걸림돌이 되자, 5.16 쿠데타 이후 '제2인자'로 행세하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1962년 10월 일본에 건너가 오히라 외상에게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해 러스크 국무부 장관에게 한일협정을 위해 독도를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몇 해 전 이명박이 대통령을 할 때 "나도 데모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했는데, 그가 참여했다는 데모가 바로 1964~65년 한일협정 반대 데모다. 이재오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함께 고려대 학생으로 항의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 1964년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될 정도로 시위를 벌인 탓에 이들은 흔히 '6.3 세대'라고 불린다.

1960년대 중반 민족주의의 발흥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정책에 대한 비판도 불러일으켰다. 김정태는 1963년 미국의 원조가 소비재에 집중되어 있어서 가격 안정이나 한국 부흥을 위한 투자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분개했다. 그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수입이 가격을 하락시켜 한국의 농업 및 시장의 생존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김영록은 1964년 미국의 원조정책을 다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째, 미국의 대외 원조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무기이기 때문에, 원조는 남한을 위한 게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것이다. 둘째, 원조를 받는 국가는 미국의 '현대판 식민지'나 다름없기 때문에 대외 원조는 '새로운 식민주의'를 위한 수단이다. 셋째, 18년간 막대한 양의 미국 원조를 받은 한국에서는 소비성향만 오른 반면 경제 자주성은 떨어졌다. 이갑섭 역시 1965년 미국의 원조는 소비재에 집중됨으로써 한국의 자력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문화 침투를 거부하는 산문도 몇 편 발표되었다. 민병산은 1963년 미군들의 문화를 가리키는 이른바 'GI 문화'나 'PX 문화'가 한국에 유행하는 것에 분개했다. 홍이섭은 1964년 '양키 문화'가 민족 문화에 도전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내면서, 한국인들이 '식민적 미국주의'에 맞서 전통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영복은 1964년 미국주의에 대한 가장 강한 비판을 쏟아내며 미국주의는 다음과 같다고 했다: 배금주의와 물질주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폭력과 잔인성 그리고 약탈과 학살 등을 동반한 확장주의, 쾌락주의, 인종차별주의와 자기민족중심주의. 따라서 그는 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뜻의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는 다른 민족을 멸시하는 미국의 자기민족중심주의의 한 본보기이고, '개척 정신' (Frontier Spirit)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역사에서 찾을 수 있으며, 미국의 산업자본주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화하여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민족주의나 반외세주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미관계 전반에 대한 검토로 이어졌다. 1965년 10월 <사상계> 권두언은 미국의 한국정책의 진수가 무엇인지 물으면서, 한국은 개발도상국들 가운데 가장 친미적 국가로 남아 있지만, 미국은 오랫동안 한민족에게 해를 가해왔다고 상기시켰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05년 태프트-카쓰라 비밀협약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도록 도왔고, 1945년 38선을 제안해 한반도 분단을 초래했으며, 1950년 1월 한반도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방어선 밖에 있다는 애치슨 국무부 장관의 발언은 한국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한국이 '매국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루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도록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국 군대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지휘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미군사령관의 개입 없이는 대중 시위에 대한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유홍렬은 미국이 조선과 외교 관계를 공식적으로 수립한 1882년부터 펼쳐온 한국에 대한 대외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1905년의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떠올리면서 한일협정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비판하기도 했다. 동천은 일본이 1910년 조선을 합병해 35년 동안 식민통치한 데도 미국이 책임 있다고 주장했다. 김용달은 해방 이후 미군의 점령이 한국 사회 무질서의 씨앗을 뿌려놓았다고 비판했다.

황용주는 1964년 11월 <세대>에 기고한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한반도 분단이 두 초강대국에 의해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고, 그 무력에 의해 통일이 방해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집트의 낫세르와 인도의 네루가 주도하는 비동맹을 선호하면서, 한국은 모든 강대국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나아가 통일된 한반도의 '민족적 민주주의' 또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서구 민주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첫째, 남북한 사이의 적대감이 제거되어야 한다. 둘째, 정전협정은 불가침협정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대결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비무장이 필요하다. 셋째, 남북한의 동시 유엔 가입과 제3국을 통한 남북한 대화가 바람직하다.

황용주의 글이 국회에서 논의된 후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른바 '<세대> 필화사건'이다. 그는 반미사상을 부추기고, 북한의 의견에 동조했으며, 미국과 남한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박정희의 가까운 동지로서 그 글에서도 '군사 혁명'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친미반공의 틀을 비켜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검찰총장은 남한의 국법이 승공통일의 조건 안에서만 한반도 통일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민족적 민주주의'의 개념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군사정권이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미국을 비판하는 체하면서 민족적 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가짜 반미주의가 오히려 국민감정에 거스른다는 점을 깨닫고,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자신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밝혔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5.16 군사쿠데타의 2인자인 김종필은 민족주의가 반미주의가 아니라 '양키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 '방식'을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다. 아무튼 황용주는 박정희가 정치적 이유로 내세웠던 민족주의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희생되었던 셈이다.

이렇듯 1960년대 한국의 최우선 국가정책은 '반공'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중립화나 비무장 또는 북한과의 대화 등을 제안하는 것은 '용공이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미국 정부 역시 남한에서 일고 있는 중립주의를 저지하는 한편 남한 정부가 반공 목표를 강화하기 위해 벌이는 북한에서의 비밀 활동을 장려하며 지지했다. 게다가 미국은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미국의 안보이익과 일치하는 조건의" 한반도 통일만을 선호했다. 1960년대 제기되었던 한반도 중립화통일은 분명히 반미주의의 한 형태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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