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세상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국내외 언론들의 보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3년이 지난 2015년, 한국군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당시 '한국전쟁과 여성 : 군위안부와 군위안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린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는 12년 후인 2014년 가을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조명했다. 그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논문을 쓴 이유는 일본 우익들이 그의 논문을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들을 살펴보면 제 이름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논문의 전반적인 것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창설된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밝힌 부분만 인용한 것"이라며 "일본 우익들은 '한국군에도 위안부가 있었는데 태평양 전쟁 당시의 위안부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며, 위안부를 만들었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밝히겠다는 것이 문제의식이었는데 이것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논증하겠다는 생각으로 논문을 새로 발표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문제를 푸는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피해자의 증언은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온 것이 1991년 김학순 씨의 증언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볼 때 피해자의 증언은 문제 공론화와 해결로 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의 성폭력이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는 특수성이 있는데, 이 때문에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상당수가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김 교수는 "성폭력을 당했다는 자신의 아픈 과거에 더해 이념적인 문제까지 결합되면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인 자신의 피해사실을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싸우는데,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와 싸워야 한다"면서 "이러한 측면도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해본다면 국가가 한 번은 과거의 잘못을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라며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군 위안부는 일제의 식민주의 또는 군국주의를 내재화한 만주국군이나 일본군 출신의 한국군 간부들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일본 우익 세력들이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인정하면 이는 일본군 위안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월 30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한성대학교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교수님께서는 2002년 '한국전쟁과 여성 : 군위안부와 군위안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셨다. 당시 논문에서 육군본부가 1956년에 발간한 <후방전사(인사편)>에 기록된 '군 위안대' 기록을 토대로 실제 피해 여성의 증언도 들었는데 논문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
김귀옥 : 당시 논문에서는 <후방전사>를 비롯, 한국 전쟁 당시 국군, 미군, 북파공작원, 민간인, 피해여성, 예비역 장성의 회고록과 증언 등을 토대로 한국군 위안부 존재를 입증하고 그에 따른 쟁점, 과제를 제시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논문에 기술한 대로 한국군 위안부를 기획했던 사람들이 일본군, 관동군 출신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1948년 대한민국 창군 인맥의 주류는 일본군, 관동군 출신자들이었고 일본군에서의 경험을 그대로 한국에 가져왔다.
실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는 국가 및 군부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에서 14대 노재현까지, 육군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부터 21대 이세호에 이르기까지 일제 군 경력자들이 군부의 중심을 형성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문제다. 한국군이 위안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제도로서 일본군 위안부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즉 일제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식민주의의 유산이 제도뿐만 아니라 개인의 세계관, 인식, 인간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이것이 한국군 위안부 탄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주축을 이루던 사람들에 의해 한국군 위안부라는 형태로 되살아났다.
프레시안 : 해방 이후 한국군의 주축이 광복군이 아닌 만주군이나 관동군으로 구성된 이유는 무엇인가?
김귀옥 : 당시 정황에 따른 미국의 선택이 주요했다고 본다. 미국이 보기에 당시 광복군은 숫자도 적었고 제대로 훈련이 돼 있지도 않았다. 군사적으로 허술한 부분들이 있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또 광복군을 주도했던 임시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십 년 고생했고 민족자존에 대한 강력한 인식이 있는 집단이었다. 이런 조직이 또 다른 '외세'인 미국의 말을 호락호락하게 들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광복군 대신 일본군, 만주국군 또는 관동군 출신들을 이용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적구성에 더해, 한국 전쟁의 상황도 한국군 위안부를 만들게 한 요인이 됐다.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의 장군이나 대장, 사령관들은 대체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많았다. 충분한 지휘력을 갖추지 못한 채로 전장의 책임자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1951년을 전후로 전쟁상황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이전에는 전선이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1951년 7월경 정전협정을 위한 회담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38선 중심으로 전개됐고 소강 국면을 맞았다. 물론 하루의 주된 일과는 여전히 전투였지만 이전에 비해 치열한 전투는 아니었다.
이러다 보니 장군들의 통솔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선이 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 옮겨지는 전투 속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우던 병사들이 소강상태가 되니까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는 장군이나 영관급, 위관급 장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들 지휘부는 북에서 데려온 여성들을 포함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부하들 입장에서 이들의 행태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지휘부는 "바로 이럴 때 위안부를 집어넣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병사들을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과거 일본군에서 근무해본 사람들은 위안부를 통해 대체로 이런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위안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첫 논문이 발표되고 12년 지난 지금, 다시 이 주제로 논문을 쓰셨다. 이전과 다르게 이번 논문에서는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보도를 추가적인 자료로 제시했다. 특히 <경향신문>의 1953년 11월 16일 자 '장병들 위안소 증설'기사를 통해 한국군 위안부가 확충됐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김귀옥 : 한국군 위안부 기록이 남아있는 후방전사를 보면 당시에는 위안소와 위락 또는 위문시설을 구분하고 있었다. 기사에서는 위안소에 대해 한국군 위안부 소속 여성들이 한국군 남성에서 성을 대주는 위안소라고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있으나, 용어로 보면 위안소는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당시 위안소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주로 하는 군예대와는 달리 성을 대주는 위안소가 실체적으로도, 용어로도 따로 존재했었다.
한편으로 1953년은 정전이 됐을 때다. 그런데 정전이 됐다고 해서 갑자기 군대를 줄일 수는 없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최전방에는 군인들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위안소를 짓게 됐고, 당시 최전방 군인들이 휴가를 나가면 서울에 들렀기 때문에 위안소가 더 필요했던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뤄볼 때 기사에서 언급한 위안소는 한국군 위안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즉 군인에게 성을 접대하는 위안부가 머무는 곳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당화시키는 빌미를 마련해준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일본 우익 중에서는 "한국에도 위안부가 있었는데 일본군 위안부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 사람도 있다.
김귀옥 :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들을 살펴보면 제 이름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상당수는 일본 우익들이 인용한 것이었다. 제 논문의 전반적인 것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창설된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밝힌 부분만 인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우익들은 "한국군에도 위안부가 있었는데 태평양 전쟁 당시의 위안부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며, 위안부를 만들었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짚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밝히겠다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이었는데 이것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논증하겠다는 생각으로 논문을 새로 발표하게 됐다.
그런데 일본 우익들이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사실로 인정하는 한 스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군 위안부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일본군 위안부의 경험이 없었다면 생겨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군 위안부는 일제의 식민주의 또는 군국주의를 내재화한 만주국군이나 일본군 출신의 한국군 간부들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 우익 세력들이 한국군 위안부를 인정한다면 일본군 위안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또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군 역사에 있어서 수치이지만, 지금 입장에서는 우리의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스스로 바로잡음으로써 오히려 일본에 부끄러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일본에 "너희가 만들어 놓은 씨앗 때문에 잘못 키워진 꽃인 군 위안부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한다"라면서.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규명하라고 당당하게 촉구할 수 있다.
관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닫겠다는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
프레시안 : 2002년 교수님의 논문으로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는데도, 현재까지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다. 한국 사회 내에서 친일 세력이 그만큼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인가?
김귀옥 : 정부차원에서의 제지가 있었던 것 같다. 2002년 처음 일본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을 때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문>이 이를 보도했다. 이후 KBS <9시 뉴스>, 주요 일간지 등 국내에서도 많은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기사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 작성된 기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은 <오마이뉴스>한 곳뿐이다. 이렇게 일제히 기사가 모두 내려간 것은 정부가 개입했던 것 외에 다른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지 않나?
또 당시 경남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었는데 국방부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다. 한국군 위안부 관련한 연구 활동을 자제시키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군 위안부 존재를 입증할 결정적인 기록물인 <후방전사>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봤을 때 당시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대단히 불편해했고 이를 직접적으로 제지하려 했던 것 같다. 국가 차원에서 죽은 목소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오마이뉴스>에 기사가 남아있다 보니 한국전쟁 시즌만 되면 방송국에서 계속 연락이 왔다. 방송에서 요구하는 것은 한국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이었다. 그런데 저는 <후방전사>라는 문서가 있기 때문에 이걸 방송에서 먼저 공론화시키면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고 이것이 당시 정부가 잘못했던 행위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려는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연구자의 목소리로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1991년 김학순 씨의 증언 이후 사회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국군 위안부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공개적인 증언이 필요할 것 같은데, 피해자들이 증언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귀옥 : 원인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누구를 한국군 위안부로 끌고 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은 군인들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었다. 여기에는 남북이 따로 없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났었다.
전시에 일어나는 성폭력은 우발적인 것과 성격이 다르다.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것이 전시 성폭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상대방을 제압하고 공포화시키는 것, 굴복시키겠다는 것이 포함된 성폭력이다. 성적 욕망 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부류는 사상적인 차원의 문제가 결합된 유형이다.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다던 한 피해자는 북쪽에서 여맹(북조선민주여성동맹)에 소속돼있던 사람이었다. 인민군에 부역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것은 곧 잠재적인 적이거나 적이 될 가능성이 있거나 또는 적의 가족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안소로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위안부가 될 뻔했던 여성의 증언에서도 이런 측면이 드러난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이 여성은 피난을 가지 못했고, 이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종군하게 됐다. 남한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빨갱이'이지만, 이 여성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후퇴한 이후 들어온 한국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갈 운명에 처했다. 이 여성은 결국 위안부가 되지는 않았지만 전장에 끌려가 보니 여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수 십 명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성폭력을 당했다는 자신의 아픈 과거에 더해 이념적인 문제까지 결합되면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 자신의 모든 인생이 망가지는 상황인데, 국가가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 한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지 않겠나.
한편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싸우는데,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와 싸워야 한다는 점도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국가와 싸우다가 본인이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한국군 위안부의 탄생 배경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프레시안 : 말씀하신대로 일본군 위안부와 한국군 위안부는 성격이 다소 다른 것 같다.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공분하는 이유가 여성의 인권보다는 일본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반감에 기대고 있다고 본다면, 한국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기는 더욱 어려운 것 아닌가?
김귀옥 :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야 한다. 이미 몇 년 동안 준비를 거쳐서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송에 들어가지 않았나? 미군 위안부는 직접적으로는 미군이 만들었다고 말하진 않지만, 미군과 한국군과 업주가 삼박자로 같이 만들어갔던 것이다. 미군 위안부까지 생겨난 것은 결국 한국군 위안부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이것은 일제 식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까지 연결된다. 한국군 위안부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간 국장급 협의를 열고 있다.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해결을 보려면 한일 간 과거사를 청산하고 비가역적인 평화의 방식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사실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해결되면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식민 지배 속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한 사건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태들을 해결해서 미래에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요체라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군 위안부 문제 역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한국군 위안부는 돌아보지 않으면서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인민군에 가담했거나 당시 북한과 관련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는 식의 이념적 잣대를 들이댈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소위 '빨갱이'이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성폭행을 당해도 되는 것인가? 이는 이념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게다가 증언을 했던 분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국가의 역할인가? 국가는 이들이 '빨갱이'가 될 때까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지 않은 채 낙인찍기로만 몰아간다면 국민은 국가에 대해 충성하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국가가 여성 인권을 유린했고 이후에도 피해자들을 숨 막히는 사회에 살게 했다면 대체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관에 들어갈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해본다면 국가가 한 번은 과거의 잘못을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 다시는 전쟁이 없는, 그리고 전쟁 때문에 피해를 보는 국민이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이라면 더욱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일본군 위안부, 사과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프레시안 :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국장급 협의가 여러 차례 열렸다. 올해도 양국 간 협의는 예정돼있지만,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위안부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가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나?
한편으로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했던 사과는 우리도 사과로 인정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사과를 했는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뒤집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河野)담화나 1995년의 무라야마(村山)담화는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적시해 놓고 있다. 또 2010년 간 나오토(管直人) 총리는 '한일병합 100년에 즈음한 총리 담화'를 발표했다. 미진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 역시 과거사 전반에 대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일본 후대 정권들에게 이러한 담화 내용을 계속 지켜나가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본의 침략을 입증할 역사적인 문서와 자료들을 내놓으라고 촉구해야 한다.
일본과 싸움을 다각적, 전략적으로 풀어낼 필요가 있다. 일본의 고노 담화 등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뒤 이를 증거자료를 통해 확실하게 증명해내라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계속 사과만 하라고 하면 일본은 "사과했는데 뭘 또 하라는 거냐"고 말하고, 이것이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일본이 말로만 했던 사과에 대해 확실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지혜와 전략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국가 차원의 배상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귀옥 : 그렇지 않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하면 국가적 배상은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일본은 당시 강제노역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강제징용을 통해 불법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또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징용 당한 사람들이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해방 이후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했던 사람도 많았고, 설사 귀환했다고 하더라도 빈털터리로 돌아온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진상이 규명되면 당연히 일본이라는 국가로부터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것도 나오게 된다.
결국 국가 배상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강제징용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면 자연히 따라 나오는 문제들이다. 연구자나 특정 정치 집단이 해석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참고로 독일은 전후 배상을 치렀고, 빌리 브란트 총리가 사과하자 강제징용을 감행했던 기업들이 그 비용을 다 갚기도 했다. 결코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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