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을 봤다. 일요일 오후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평균 연령은 내 나이보다 훨씬 위로 보였다. 20~30대로 보이는 분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를 보러 온 듯했다. 나는 새해를 맞아 50살이 되지만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남으로 내려온 부모님을 둔 사람도 아니고, 파독 광부나 간호사, 월남전에 다녀온 삼촌이나 형님, 누님을 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긴 돌아가신 내 아버지께서도 '6·25 사변' 전쟁 통에 서울을 떠나는 피난 열차 지붕에 올라타신 기억을 간직하신 분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의 원인이 내 아버지가 나에게 남기신 그런 '고생스런 기억'에 대한 공감만은 아닌 것 같다.
개봉 18일 만에 관객 700만 명을 넘겼다는 이 영화를 두고 요즘 말이 많다. 허지웅(그는 30대다)의 '토가 나온다'라는 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짐으로써 격발된 난데없는 '좌우 논쟁'이나 여야 정치인들의 감상평에 이르기까지. 이런 논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상이나 평은 모두 '개인적'인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욕'을 하든 '찬사'를 보내든, 평점 10점을 주든 0점을 주든 무슨 상관인가.(☞관련기사 : "영화 <국제시장> 대체 왜 논란일까?")
사실 루이스 자네티가 <영화의 이해>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모든 영화는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순수한 형식' 이외에는 다른 어떤 주제도 없는 아방가르드 영화를 제외하고 나면, 영화란 결국 "특정한 인물, 제도, 행위, 모티프 등에 대해서는 매력적인 것으로서 특권을 부여하고, 이와 반대되는 것들은 불쾌한 것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란 또한 영화가 가지는 바로 이러한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문제는 영화가 갖는 이런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자네티가 지적하는 것처럼 "영화 주인공과 영화감독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개인적 신념을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화가 지닌 양식상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영화든 '실패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토가 나온다'거나 '싸구려 신파'라는 식의 이 영화에 대한 발언들은 모두 '개인적' 감상평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발언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나 집착 또한 무의미하다.
아울러 이 영화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 또한 영화를 보지 않아서 발생한 착각이거나, 그도 아니면 대통령 '개인'의 신념이 과도하게 개입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더라. 그렇게 우리가 해야 이 나라라는 소중한 우리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구성원인 우리 국민들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를 사랑할 때 나라가 발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영화 속 덕수 부부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대목은 관객 대부분이 '웃는' 장면이다. 독일에 광부로 다녀온 것도 부족해서 월남까지 가야 하느냐며 남편에게 따지던 영자가 국기 하강식 때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마지못해 일어나 가슴을 치듯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내 나이 또래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리를 가다가도 멈추어 서서 국기에 대한 경계를 하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뿐인가. 영화 한 편을 보려면 예외 없이 일어서서 애국가를 들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이런 경험을 가진 관객들에게 '국기배례' 장면은 블랙코미디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웃는 거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 또한 '웃어보라'는 것이다. 나는 박 대통령도 아마 우스갯소리 정도로 한 말이라 생각한다. '핵심 국정과제 점검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딱딱한 분위기를 유연하게 하기 위한 조크 한마디. 만약 그게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공무원들에게 진지하게 한 말이라면, 그건 그야말로 영화 장면에 대한 '창조적' 해석이요, 또 한 편의 왕 웃긴 '대박' 코미디인 셈이다.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현대사 70년을 다루고 있다. 영화 속 덕수의 삶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를 본 내 '개인적' 감상을 말해 본다면, '덕수'는 지난 역사를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 모두가 조금씩 지니고 있을 법한 삶의 대표적 체험들을 한 인물에 집중시킨 '원형(Archetype)'에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싶다. 덕수의 삶 자체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삶을 사신 분은 많지 않겠지만, '아 그래 저건 나도 그랬었지', '우리 아버지도 그랬었지'라는 느낌들이 덕수와 관객 사이의 공감을 불러오는 모티브가 아닌가 한다.
눈물은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이란 말 그대로 타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자신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의 대부분은 덕수가 피난길에 잃어버린 동생 막순이를 만나는 장면에서였다. 1983년 당시 이산가족 만남 생방송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영화 속 장면은 내가 비록 이산가족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공감의 계기를 제공한다. '재현'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 영화의 압권은 단연 이 장면이다. 허나 누군가 이 장면에서 '반공'이나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동원하려 한다면 그건 정말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최근 어느 지방 교육청에서 관내 중학생 전체에게 국제시장 무료 관람을 지원하고 우수 감상문을 받는다고 한다. 높은 분들께 부탁하건대 제발 이딴 거 하지 마시라. 의도야 어떠하든 단체 관람이나 감상문 제출 방식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공감하는데 방해를 줄 뿐이다.
사실 내가 영화 속 덕수 할아버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장면은 따로 있다. 손녀의 손을 잡고 친구인 달구와 함께 국제시장 입구에 앉아있던 덕수가 이주노동자에게 막말을 하는 학생들을 혼내는 장면이다. 독일로 돈 벌러 갔던 광산 노동자 덕수가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고통에 공감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덕수 할아버지는 그만하면 인생을 '참 잘 사신 것'이다.
어느 기자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국제시장> 이 영화를 두고 누구 편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눈물 흘린 사람, 아니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고 공감의 눈물을 흘린 이십대의 젊은 관객들 모두에게 나는 <국제시장>, 이 영화를 권한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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