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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조선 인재들의 얼이 깃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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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여주, 조선 인재들의 얼이 깃들다

1월 고을학교

새해 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5강으로, 많은 조선 인재들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경기도 여주(驪州)고을을 찾아갑니다.

여주(驪州)고을은 남한강변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양평, 남쪽으로 장호원, 동쪽으로 원주, 서쪽으로 이천과 맞닿아 있으며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의 쌀농사가 시작된 곳으로, 성군 세종(世宗)과 북벌의 웅지를 품었던 효종(孝宗), 고려의 충신 목은(牧隱) 이색(李穡), 고려의 문장가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조선시대 노론(老論)의 영수(領首),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얼이 깃들어 있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의 국모 여덟 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영원루에서 바라본 남한강ⓒ고을학교

고을학교 제15강은 1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7:00)→여주IC→명성황후 생가→영월루/창리, 하리 3층석탑→신륵사(다층석탑/조사당/보제존자 석종부도와 석종비/석등/다층전탑/강월헌)→영녕릉→점심식사 겸 뒤풀이(13:00-14:30)→고달사지→파사성→서울(17:30-19:00 예정) 순입니다.

▲여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5강 답사지인 여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총 길이 375㎞의 남한강
여주고을의 중심부를 흐르는 남한강은 한강의 본류로서 강원도 삼척의 대덕산(大德山)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정선에서 동강, 영월에서 평창강, 신림에서 주천강을 합쳐 제천의 충주호에 물을 채우고 충주에서 달천을 합쳐 경기도로 들어갑니다. 도계에서 섬강, 청미천을, 여주를 통과하면서 양화천, 복하천을, 양평에서 흑천을 합쳐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만나 서울을 거쳐 강화도 부근에서 임진강과 합류한 뒤 서해로 들어가는, 총 길이 375㎞의 강으로 남한강의 여주 지역을 특히 여강(驪江)이라고도 부릅니다.

▲바위 위에 세워진 강월헌과 3층석탑ⓒ고을학교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남한강은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 하며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월루 아래에 있는 마암은 남한강변에 있는 큰 바위로 표면에 ‘마암(馬岩)’이란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으며 이 바위에서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되는 황마(黃馬. 누른 말)와 여마(驪馬. 검은 말)가 솟아났다 하여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의 지명도 황려(黃驪)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 큰 굴이 있어 여흥(驪興) 민씨(閔氏)의 시조(始祖)가 그곳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한 이규보, 이색, 서거정, 최숙정, 김상헌, 정약용, 김창협 등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이곳에서 시와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습니다.

마암에는 이색의 의문사(疑問死)에 대한 일화도 전해 오는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고려의 충신들을 회유하여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이색은 태조가 내린 벼슬을 거절한 채 초야에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색을 회유하려는 이성계가 한번 만나기를 여러 번 청하자 마지못해 한양에 간 이색이 태조를 보고서 “앉을 자리가 없다” 하고는 한양을 벗어나 배를 타고 고향 가정리로 돌아오는 길에 신륵사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경기감사가 태조가 내린 어주(御酒)를 보내와서 이 술을 태연히 받은 이색은 조릿대 잎으로 막은 술병 마개를 빼 강물에 던지면서 “내가 평생을 사욕이나 권력으로 살았다면 이 댓잎이 그대로 강물에 떠내려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멀지 않은 곳에 가서 뿌리를 박고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하고는 그 술을 마시고 곧바로 죽었다고 하는데, 그 댓잎이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지금의 여주읍 하리 양섬[洋島]에 있는 삿갓바위 근처에 뿌리를 박고 무성하게 번졌다고 하여 지금도 그 대를 ‘삿갓바위 대’라고 부릅니다.

이색의 제자들은 이색의 의문사는 고려의 신하였으면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죽음은 규명이 되지 않은 채 세월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남한강은 그냥 유유히 흐르고만 있습니다.

영월루(迎月樓)는 마암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원래 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의 2층 누각으로 정면 길이에 비하여 측면 길이가 짧은 긴장방형으로 익공의 형태나 가구의 수법으로 미루어 18세기 말에 지은 건물로 추정됩니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위쪽에는 두 기의 3층석탑이 있는데 창리 3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의 짜임새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리 과수원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11월 한강변에 위치한 영월루 아래로 이건하였는데 초층 탑신 윗면에는 얕은 사리공(舍利孔)이 있으나 사리장치는 완전히 없어졌고 하대석 밑에서 동제여래좌상(銅製如來坐像)이 이건 당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하리 3층석탑은 하리 지역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3층석탑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며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은 형태로,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의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 전기보다는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파사산(婆娑山)은 ‘남한강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천서리(川西里)에 해발 230m로 우뚝 솟은 산입니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파사국(婆裟國)이 이곳에 있어서 그리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신라의 5대왕인 파사왕(재위 80〜111) 때 성을 쌓아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창리와 하리 3층석탑ⓒ고을학교

파사성에서 남한강을 한눈에 보다
파사성(婆娑城)은 파사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산성으로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둘레는 약 943m, 높이는 대체로 4〜5m로서 조선 초에 이미 고산성(古山城)으로 불리며 여주의 북방 53리(里)에 있는 포곡식석축산성(包谷式石築山城)으로 기록에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제기되어 대규모로 개축된 것으로 고산성의 실제 모습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595년(선조 28) 3월에 유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승(僧) 의엄(義嚴)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고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무너진 성벽을 수축(修築)하게 하여 1597년에 공사를 마쳤는데 성 안에 집을 짓고, 성 밖의 구릉과 평지에는 둔전(屯田)을 마련하여 군사들의 양식을 직접 농사를 지어 마련하였습니다.

당시의 전략적 개념으로는 이곳이 남한강 상류의 요충지로 한양을 지키는 관문으로 인식되었으나, 상류에 있는 조령(鳥嶺)을 보다 유용한 전략적 요충지로 삼으려는 계획과 함께 한양 가까이에 있는 남한산성의 효용이 강조되면서 그 중간에 위치한 파사성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수(修), 개축(改築) 없이 다시 퇴락하였습니다.
파사산 아래에는 여주와 이천을 이어주는 이포대교가 놓여 있는데 이곳은 한때는 남한강변의 중요한 나루였던 이포나루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나 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배가 중요한 운반, 교통수단이었던 조선시대까지는 한양과 강원도를 잇는 번화한 나루였습니다.

이포나루는 많은 애환을 품고 있는 곳으로 세조 2년(1456)에 폐위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길에 오를 때 한양의 광진나루에서 뱃길을 따라 이곳 이포나루에 잠시 내려 눈물을 흘렸는데 그때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수정(御水井)이 가까운 대신면에 남아 있습니다. 정선과 영월에서 목재를 운반하던 뗏목꾼들이 마지막으로 쉬어가던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여주와 양평의 풍부한 곡물을 이곳 이포나루를 통해 인천항으로 약탈해 갔습니다.

여주는 마한, 백제시대에는 고구려, 동예 등과 요충지였으며 고구려의 남진 이후 475년(장수왕 63) 여주 지역에 골내근현, 이포 지역에 술천군이 설치되었고 삼국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각각 황효현, 기천군으로 개명하였습니다.

고려 940년(태조 23) 황려현으로, 1305(충렬왕31) 여흥으로 고치고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를 두었으며 1388년(우왕14)에는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부라 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1)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조선 1401년(태종1)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태종13)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황려부는 여흥도호부로, 천녕군은 천녕현으로 정비되었다가 1469년(예종 1) 세종의 능이 북성산 기슭으로 옮겨짐에 따라 여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천녕현을 폐지하여 여주목에 병합시켰습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의 시행에 따라 목에서 군으로 개편되어 충주부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이때 원주군 강천면이 새로이 편입되었고 1896년 13도제의 시행으로 다시 경기도로 환원되어 3등군이 되었다가 1914년 읍, 면 통폐합 조치에 따라 여주면이 되었다가 1941년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되었고 2013년 여주시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향교(鄕校)는 서당에서 공부한 15세 이상의 양반 자제를 교육하던 곳인데 여주향교는 원래 상리의 마암(馬巖) 근처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숙종 11년(1685) 홍문리의 잣나무 고개 부근에 재건되었다가 마을 주민이 희생되고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현 위치로 다시 이건되었습니다. 대지의 아래쪽 터에는 명륜당과 교직사가 있고 위쪽 터에는 대성전과 동, 서무가 위치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강한사(江漢祠)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정조 9년(1785) 왕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왔다가 김양행(金亮行) 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大老祠)라 사액하였으나 고종 10년(1873) 10월 강한사라 개칭하였습니다. 사당의 방향은 그가 스승이었던 효종(孝宗)의 능인 영능(寧陵)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천서원(沂川書院)은 조선 중종부터 효종까지의 유명한 현인들인 모재 김안국, 회재 이언적, 지재 홍인우, 오리 이원익, 수몽 정엽, 택당 이식, 나재 홍명구, 기천 홍명하 등 여덟 분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선조 13년(1580)에 처음 지었으며 인조 3년(1625)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는데 1937년 모현사가 다시 지어지고 1978년에 사당을 복원하였으며 최근에는 부속 건물들도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매산서원(梅山書院)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조 때 경남 거창과 산청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건립되었는데 그 후 목은 이색을 추가 배향하고 매산(梅山)이라는 이름으로 사액 받았습니다. 병자호란 때 후손인 문겸(文謙)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춘추로 제향해 왔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삼우당의 후손으로 여주경찰서장에 취임한 문광규(文光圭)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봉미산(鳳尾山) 기슭에 자리잡은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양주 회암사에서 설법하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병이 깊었는데도 왕명을 받고 밀양의 형원사로 내려가던 중 이곳에서 입적하면서 유명해졌는데 이러한 연유로 나옹화상의 부도는 평상시 주석(住錫)하였던 회암사와 신륵사 두 곳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색(李穡)이 지은 부도비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날 진시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씻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 보 안에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 155과를 얻었다. 신령스러운 광채가 여드레 동안이나 나더니 없어졌다.”

나옹선사가 입적하고 3개월이 지난 뒤 절의 북쪽 언덕에 진골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고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을 모신 영릉(英陵)이 인근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로 이전해오면서 세종의 깊은 불심을 헤아린 왕실에서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고 절 이름도 잠시 보은사(報恩寺)로 고쳐 불렀습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소되어 당시 건축물로는 드물게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祖師堂)만 남았다가 현종 12년에 중건하면서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은 석탑 밑에 있던 6각 모양의 누각으로 1977년에 큰 홍수로 떠내려가 새로 지은 것입니다.

▲신륵사 다층전탑ⓒ고을학교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세워진 신륵사 다층전탑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다층전탑이 세워져 있는데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며 벽돌로 쌓았기 때문에 유지관리가 어려워 대부분 훼손되었고 팔공산 송림사 전탑, 안동 신세동 전탑 그리고 신륵사 다층전탑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탑의 북쪽에는 탑을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비문에 적혀 있는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조선 영조 2년(1726)이므로 이때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세워진 사찰로서 주변에 있는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 신륵사 등과 함께 한강의 수로교통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불교 신앙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원(院)으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을 일컫는 삼원(三院)의 하나였음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로 성장하였는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로 창건 당시 사찰의 규모는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寺域)이었으며 절 부근에 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달사 터에는 많은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만 전념하였으며 절을 다 짓고 나서는 스스로 스님이 되어 훗날 도를 크게 이루자 그 이름을 따서 고달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달사지 부도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빼어난 작품입니다. 기단이 8각을 이루고 있으며 상륜부가 약간 훼손되었을 뿐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사리를 모셔둔 탑신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고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조각한 느낌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시대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탑신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원종대사혜진탑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으며 비신(碑身)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는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하였습니다.

석조대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거의 완벽한 형태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받침돌은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고 아래 받침돌과 윗 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는데,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이러한 배열 때문이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식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으로 보입니다.

▲고달사지 탑비의 귀부와 이수ⓒ고을학교

여주에는 세종과 효종의 영녕릉(英寧陵)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왕릉은 도성에서 100리에 해당하는 교(郊)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으로 여주는 100리 밖이라 왕릉지로서 해당사항이 없으나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이곳으로 옮겨져 왔습니다.

영릉(英陵)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의 합장릉(合葬陵)으로 대모산(大母山) 아래 헌릉(獻陵) 서쪽 산줄기에 있었던 것을 풍수적으로 불길하다 하여 예종(睿宗) 즉위년(1468년) 12월 여주 북성산(北城山)의 이계순(李季旬)의 묘소지(墓所地)로 천릉(遷陵)키로 정하고 그 이듬해 3월 6일에 천릉하였습니다. 봉분은 같이 하고 석실은 달리하여 동쪽은 왕후, 서쪽은 임금을 안치한 조선 왕릉 최초의 합장릉입니다.

영릉(寧陵)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조선왕릉 중에 경종(景宗)의 의릉(懿陵)과 함께 둘뿐인 형식입니다. 본래 효종의 능은 양주 검암산(儉嚴山) 건원릉(健元陵) 서쪽 산줄기에 예장(禮葬)하였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능침의 누수(漏水)가 우려되어 현종(顯宗) 14년(1673년) 10월 여주 영릉(英陵) 동쪽 언덕으로 천릉하였습니다.

특히 영릉(寧陵) 재실(齋室)은 현존하는 조선 왕릉 재실 중에서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와 같은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는데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는데 광무 1년(1897)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할 때 명성황후로 추봉되었습니다.

네 차례나 명성황후를 알현한 비숍 여사는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날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칠흑 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주색 가루를 뿌린 듯하였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나는 왕비의 우아하고도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이 전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 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하였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두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는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으로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었으며 건립 당시에 있었던 행랑채는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안채는 1975년과 1976년에 중수한 것으로 1996년에 안채를 수리할 때 행랑채,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는데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고을학교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5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사전예약 관계상 1월 19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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