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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눈꽃에 새해 소망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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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태백산 눈꽃에 새해 소망 올리다

1월 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 전문가)의 2015년 1월 제49강은 1월 24일(토) <백두대간 태백산 구간>입니다. 이번 산행 주제는 <태백산 주목에 핀 눈꽃에 새해 소망 올리다>입니다. 겨울 태백산의 백미인 일출과 눈꽃과 주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산행 코스를 정하였습니다. 누구나 부담 없이 겨울 태백의 감동을 담을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전한 산행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하늘과 통하는 문, 태백산 천제단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학교의 2015년 1월 첫 산행은 순백의 겨울 태백산입니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태백산은 시원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아름다운 눈꽃은 겨울산이 주는 또 다른 선물입니다. 1월 백두대간학교 산행은 겨울 태백산의 백미인 일출과 눈꽃, 주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산행 코스를 정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겨울산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계절의 산행보다 장비나 체력 소모가 많습니다. 눈길을 걷는 겨울 산행은 평소보다 체력이 1.5배 이상 소모됩니다. 또한 적절한 장비도 갖추어야 겨울산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를 지내는 산은 '밝은 산(白山)'이라 했습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太白山)인 것입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민족의 영산 태백산에서 백두대간학교 2015년 첫 산행을 내디딥니다.

산행은 태백산을 가장 단시간에 오를 수 있는 유일사매표소에서 시작합니다. 겨울 산행을 고려하여 가장 짧은 구간을 정하였습니다. 유일사매표소를 지나 산길로 접어듭니다.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발길을 오른쪽을 향합니다. 급경사 오르막이 유일사갈림길까지 이어집니다. 여기부터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걷습니다.

태백산으로 이어진 마루금을 따라 왼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낙동강으로 흐르고, 오른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영월을 지나 남한강을 거쳐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수해 서해로 흘러갑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물길을 나누는 길입니다.

마루금을 따라 걷다가 돌계단을 지납니다. 주목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붉은 주목에 하얀 눈꽃이 피었습니다. 여명 아래 흰머리의 주목은 상서로운 신령처럼 서있습니다. 주목 위로 붉은 기운들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더욱 짙게 붉은 기운들이 퍼져갑니다. 붉은 기운 한가운데 불덩어리가 떠오릅니다. 수줍게 머리 내밀더니 어느새 찬연한 붉은 해가 되었습니다. 장엄하게 떠오릅니다.

잠시 눈감고 소망을 기원합니다. 각자의 소망을 떠오르는 붉은 해에 띄워 소망합니다. 백두대간학교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주목군락지를 뒤로 하고 능선을 올라서면 곧바로 장군봉입니다. 태백산의 최고봉이자 장군에게 제사지내던 장군단이 있는 장군봉입니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릅니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0.8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옵니다. 이곳에서 부소봉쪽으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습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태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장군단과 천왕단에서 마음속으로 기원을 하고 하단으로 내려섭니다. 하단에서 백두대간학교의 안전산행을 기원합니다. 바람이 없는 하단에서 함께한 도반들과 아침식사를 나눕니다. 서로 준비해온 음식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태백산의 산신은 단종으로 전해져옵니다. 지금도 많은 무속인들이 태백산의 신령 단종에게 제를 올립니다. 천왕단에서 만경사로 향하는 길목에 단종비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운의 왕인 단종의 비각을 지나 망경사로 내려섭니다. 경내에 솟아나는 용정(龍井)을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모금 목을 축이고 반재를 향해 내려갑니다. 심한 내리막에 주의하며 발길을 옮깁니다. 백단사매표소에서 산행을 마칩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로 향합니다. 하루 5,000톤의 물이 솟아나는, 남한에서 가장 긴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를 둘러보고 1월 백두대간학교의 산행을 마칩니다.

2015년 새해 첫 산행 함께 하셔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기운과 민족의 영산 태백산의 정기를 마음껏 받아 소원하는 모든 일들 다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천제단 가는 길 ⓒ백두대간학교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5년 01월 24일(토)
-산행출발 : 2014년 01월 23일(금) 24시(자정)
-산행코스 : 유일사매표소-유일사-장군봉-천제단-하단-만경사-반재-백단사매표소
-산행거리 : 약 8.9km
-소요시간 : 약 6시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난 이 도 : 중하(★★)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에서 함께 하며 편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1월 23일(금)
24:00(자정)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1월 24일(토)
00: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0: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0: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 승차장

<산행일정>
1월 24일(토)
05:00 유일사매표소 도착 - 산행준비/스트레칭
05:20 유일사매표소 출발
06;20 유일사갈림길
07:20 주목군락지 - 일출
07:40 천제단
08:00 하단 - 소망기원제 및 아침식사(개인도시락을 준비하세요)
09:30 망경사
10:20 반재
11:00 백단사매표소 - 산행마감/스트레칭
버스 이동
11:30 황지 - 낙동강 발원 연못
12:10 점심식사 겸 뒤풀이 - 막걸리를 곁들인 막국수, 수육, 감자전
14:00 태백 출발
17: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현지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태백산 구간> 산행도 Ⓒ백두대간학교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스패츠, 아이젠, 얼굴가리개(버프), 그리고 반드시 아침도시락 준비하세요.

<백두대간걸작선> 제49강 <태백산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회 식사 겸 뒤풀이, 가이드비, 입장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교장선생님에게 해주세요(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에도 꼭 놀러오세요.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백두대간학교


[2015년 2월 산행 안내]
-산행일 : 2015년 2월 28일(토)
-산행지 : 백두대간 지리산 만복대 구간
-산행코스 : 성삼재-고리봉-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고기리
-출발시각 : 27일(금) 24시(자정) 덕수궁 앞 출발
-참가비 : 10만원
-거리 : 약 11.1km
-예상시간 : 약 7시간
-난이도 : 중중(★★)

[학습자료]
[태백산] 1,566.7m(장군봉).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산이다.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의 중심인 태백산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청옥-두타산을 거쳐 흘러온 맥이 한번 웅장하게 용트림한 산이다. 금강, 설악, 오대, 두타산이 대부분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깊은 협곡을 거느려 명산에 걸맞는 경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태백산은 주능선 일대에 국한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연상시키듯 크고 거대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육산일 뿐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산이다. 함백산이나 정암사로 빠지는 고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활등 모양으로 휘어든 평탄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둔중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상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덩어리로 다가온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 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 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 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禊祓)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이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 일출 여명 ⓒ백두대간학교

[단군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 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은 고대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 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태백산 이외에 고대 시절에 ‘太白山’으로 불리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과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과 큰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운위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 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과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위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祠堂)이 지금도 있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삼위·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 잡은 자산(子山)·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국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 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 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 차서 산을 가린 것을 볼 때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 남쪽 백령면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사의 태백산도 곧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대동지지> 문화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 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 산기슭 옛 성당리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환웅·환검(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단종과 단종비각] 조선의 제6대 임금.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하여 무속에서 섬기는 신(神)이기도 하다. 8세에 왕세손으로 봉해져서, 문종이 훙(薨)한 뒤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창덕궁에 거처한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군(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유배 중에 또 다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 당한다.
정변(政變)에 희생된 비운의 왕이라는 평가만이 남아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졌으나 단종(1441~1457)은 역사의 이면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아 숨 쉬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이자 또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영월 일대의 지역민들은 그를 마을신이나 무신(巫神)으로 모시고 있다.
단종이 신령으로 좌정하게 된 것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토대한다. 그는 왕의 신분으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파했던 당대의 사람들이나 후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억울하고 외로운 영혼은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활하였다. 생물학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다.
단종의 비극적인 삶은 양위(讓位)로부터 비롯되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아파하는 계기는 그의 유배생활에서 비롯되었다. 단종이 신격화되는 것은 그의 유배 길과 유배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유배 자체가 신격화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영월에서의 유배생활은 단종과 지역민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기능하였고, 다른 지역보다 단종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영월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단종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될 수 있었다.
한양으로부터 영월에 이르는 유배 길에는 도처에 단종과 관련한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비록 기록되지는 않은 역사이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출발지인 서울의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는 그가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이 깃든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필두로 영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한 전설과 지명이 전한다.
영월에서의 유배생활 역시 백성들의 관심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첫 유배지인 청령포(淸泠浦)는 토사가 퇴적되어 생긴 섬으로, 배를 이용해서만 왕래할 수 있는 매우 험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단종은 구들장도 없는 마루를 설치하고 그 위에 돗자리만 깐 투막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홍수로 피해를 보고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갔다. 이 홍수에 대해서는 단순한 집중 호우가 아니라 어떤 신의(神意)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단종이 유배되자 그의 외조모인 화산(花山)부인 최씨가 무당 용안 등을 거느리고 영월에 내려와 단종을 위한 굿을 하였는데 굿이 끝나는 날 큰 비가 와서 청령포가 침수되었으며, 그 결과 단종은 영월부중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관풍헌에서는 비교적 편안하고 개방된 생활을 하였다.
단종에게 과실을 바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실제로 추익한(秋益漢. 1383~1457)이 머루를 진상했다. 지역민들은 이미 폐위되었으나 군왕이었던 단종을 지척에서 배알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동정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본격적인 신격화 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 그를 신격화하는 신앙적 토대로 기능했다.
단종이 신령으로 승화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단종 숙부인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조정에서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3개월 후인 10월 24일(1457)에 단종의 부음(訃音)이 전해진다.
단종이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사사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단종에게 사사를 내리는 과정에서 사신은 왕명 집행을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왕명 집행은 천리(天理)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곧 왕명과 천명 사이에서 사신들은 갈등하였지만 이러한 사신들의 희생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 위해 단종은 순순히 죽음을 택했다.
여기서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聖君) 단종의 모습과 폭군 세조가 대비되면서 그의 죽음은 한층 지역민들에게 아픔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강요된 죽음인 사사와 함께 그의 시신이 유기(遺棄)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차원에서 충격적이다. “숲속에 버려진 후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사람이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거나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 같은 가는 열손가락이 수면에 떠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종의 비참한 삶과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단종이 완전히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신령으로 승화되어 단종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처럼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를 신격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양위, 유배, 강요된 죽음, 시신의 방치 등은 단종이 죽었으되 온전히 죽지 못하는 요인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종의 영혼이 원혼(冤魂)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단종은 신격화를 통하여 이승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섬김으로써 그로부터 가호를 빌 수 있었다. 단종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태백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죽었던 단종이 죽음을 극복하고서 백마를 타고 태백산신이 되기 위하여 태백산으로 갔다는 전설 등이다.
단종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제사를 받을 수 없었다. 가혹한 핍박 속에서도 단종은 비밀리에 서서히 제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성종 3년(1472)에 죽은 단종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단종을 부처와 동일시하여 그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신비가 강조됨으로써 신격화하는 무리가 생긴 것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출생 자체가 단종을 비상한 인물 또는 부처와 견줄 만한 신적 존재로 믿게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백성의 집단적 표상 및 패배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여 자신들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또한 단종은 구체적이 직능을 지닌 신령으로 인식되었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양 밝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손수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어 향을 피워 빌면 비가 쏟아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종이 기우(祈雨)에 효험을 나타내는 신령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본국가인 조선에서 단종이 비를 내리는 신령으로 인지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매우 비중 있는 신격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들어와 재이(災異)를 소멸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국가 차원에서 단종을 제사 지냈고, 민간에서도 단종을 본격적으로 신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단종에 대한 신앙은 단종에 대한 공식적인 사묘 건립과 무관하지 않다. 중종 11년(1516)에 공식적인 제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월에는 상식을 벗어난 흉사(凶事)가 일어났다. 중종 36년(1541)에 영월에 부임한 군수가 7개월간 3명이나 사망하고, 전염병이 유난히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이러한 흉사의 원인이 모두 단종의 원혼이 빌미가 되었다고 믿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치제에 만족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과 종교적으로 맺어지고 싶은 단종의 바람이 그러한 흉사를 유발시켰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성황사의 후신인 영모전(永慕殿)이 건립되고, 단종은 지역신령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단종은 영월 일대에서 오늘날까지 마을의 신령 또는 무신(巫神)으로 숭배되고 있다. 영월에는 “인간이 단종을 보살피지 않으면 도깨비가 보살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종과 신적 존재들의 관계가 밀접하다.
영월에서의 단종 숭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사후에 태백산의 산신이 되어서 갔기에 태백산 일대에서 그를 태백산신으로 관념하는 것과 영월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지역의 마을들에서 단종을 주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태백산은 이 지역의 명산으로서 조선 전기부터 현재까지 영산(靈山)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영월에서 활동하는 강신무(降神巫)는 일 년에 수차례나 이 산에서 ‘산맞이’를 한다. 이곳에는 무당이 단종의 현몽을 받아 세웠다는 단종대왕비각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그곳에서 기도하는 무속인들에게 재인식되고 있다. 영월에 거주하는 무당들은 단종을 몸주로 모시거나 굿을 할 때 단종을 주된 신으로 청배하는 일이 많다. 이들에게 있어 단종은 중요한 신령이어서 이들은 굿을 통하여 영월의 지역민들에게 단종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켜 간다.
단종을 모시는 마을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영월군, 태백시, 봉화군 일대에 분포한다. 그 마을들에는 단종이 생존 시에 어떤 형태로든 마을과 연관을 맺었음을 강조한다. 단종이 마을에 들러 잠시 쉬었다거나 그가 띄운 연이 마을에 닿았다거나 하는 등의 당설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영월 지역에서 마을신, 무신으로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한다. 영월 지역민들은 혼인이나 회갑 잔치를 치른 후에 청령포에 들러 단종유지비각 앞에서 모든 일이 잘 치러졌음을 고한다. 이뿐 아니라 단종대왕이라 불러서 항상 경의를 나타내는 생활습관도 있다. 이처럼 영월 지역에서 단종은 신앙생활뿐 아니라 의례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하는 살아있는 신령으로 존재하고 있다.

[황지(荒池)] 낙동강의 발원 못. 큰 강의 발원지에는 그 장소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이 만들었을 범상치 않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남한에서 가장 긴 물줄기 525㎞, 1,300리의 낙동강의 시작이 되는 황지는 전설로만이 아니라 15℃ 정도로 변함없이 유지되는 수온 때문에 새벽이나 겨울철이면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찾는 사람들에게 영험한 기운과 신비감을 안겨준다. 태백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연못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상지, 중지, 하지의 세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 5,000여 톤의 물을 변함없이 뿜어내는 연못은 태백을 감싸는 태백산, 함백산, 백병산, 매봉산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물길이 땅속으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청정한 물이다. 하늘[天]의 기운이 땅[潢]으로 연결되는 첫 물이라는 의미로 ‘천황’으로 불리던 연못은 경상도로 내려가 부산의 을숙도 앞 남해로 흘러 바다와 만난다.
황지연못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신비한 기운의 노스님이 이곳의 지독한 구두쇠였던 황씨를 찾아 시주를 권하며 선행을 베풀기를 빌었다. 그러나 황씨가 노승에게 시주 대신 던진 것은 쇠똥 한 덩어리였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노승의 뒤를 미안한 마음의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쫓아가 쌀 한 바가지의 시주를 하자 노승은 집안의 운명이 다했다며 며느리에게 지금 즉시 절대 뒤를 돌아 집을 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일렀다. 노승의 예언을 믿은 며느리가 마을 언덕을 넘어가는 순간 황씨의 집은 땅으로 꺼지며 지금의 연못이 되었고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본 며느리는 그 자리에 굳어 돌장승이 되었다 한다. 황지를 신성시하였을 사람들이 연못을 소중히 여기길 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전설일 것이다.(자료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한국민속신앙사전, 백두대간의 역사 등)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학교를 열며> 얘기합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이어진 분수령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에서 1정간 13정맥이 갈래치고 또 기맥, 지맥으로 뻗어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에서 모든 강들이 시원하고 그 강줄기에 기대어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일구어졌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그 산줄기와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대어 사는 이 땅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대간입니다. 낙동정맥, 호남정맥, 땅끝기맥 등 정맥과 지맥, 기맥을 모두 아우른 백두대간입니다.

지난 3년에 이어 앞으로의 백두대간학교는 이 땅 곳곳으로 갈래친 백두대간을 찾아갑니다. 앞으로 백두대간학교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하나, 백두대간학교의 원래 취지대로 백두대간 걸작 구간 산행을 계속합니다.
둘, 백두대간에서 갈래친 정맥, 기맥의 걸작 구간도 찾아갑니다.
셋, 월별, 계절별로 특별히 아름다운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넷, 산행과 문화유적 탐방을 아울러서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도록 합니다.
다섯, 참가자들이 희망하시는 산줄기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합니다(전체 일정은 유지하지만, 꼭 고수하지는 않습니다).
여섯, 산행 후 계절별, 지역별 특색 있는 먹거리로 뒤풀이 자리를 마련합니다.
일곱, 멤버십 강화를 위해 정기 산행 이외에 비정기 산행(번개산행, 종주산행, 번개모임 등)도 추진합니다.
여덟,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중심이 되는 산행을 이어갑니다.
아홉, 백두대간학교가 지향하는 산행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땅 여러 갈래로 백두대간의 아름답고 소중한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그 아름다운 산줄기를 늘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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