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4박5일, 얼어붙은 땅 위를 기어서 움직였다. 두 손과 두 다리, 가슴과 이마를 차례로 땅에 대고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라는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눈이 녹지 않은 아스팔트 위를 기고 또 기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비정규직이 더 이상 나와선 안 된다"며 한겨울 오체투지에 나선 여성 노동자들의 행진은 청와대를 앞에 두고 중단됐다. 행진 닷새째인 26일 오전, 경찰은 마침내 광화문광장에 도착한 이들에게 단 한 걸음의 행진도 허락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명령이에요. 어서 일어나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허사였다. 5일간의 오체투지로 진흙투성이가 된 여성 노동자들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시작한 것은 지난 22일. 회사의 '야반도주'로 텅 빈 사무실을 뒤로한 채 다시 거리에 나섰다. 10년 가까이 "죽는 것 빼고 다 해본" 복직 투쟁을 벌였지만, 회사는 국회에서 이뤄진 노사합의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도 외면했다.
복직을 위해 1895일을 싸운 끝에 2010년 국회에서 회사와 정규직 고용에 합의했지만, 회사는 해고자들이 복직하자 업무도 임금도 주지 않고 '유령 취급'을 하더니 급기야 지난해 말 모두가 퇴근한 틈을 타 사무실을 이전하는 야반도주까지 감행했다.
텅 빈 사무실을 농성장 삼아 지킨 것도 1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이제는 비정규직 법·제도의 폐기없이는 어떤 싸움도 이길 수 없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거리에 나선 이유다.
서울 신대방동 기륭전자 본사에서 시작해 국회, 광화문, 청와대까지 이어지 여정이었다. 당초 오체투지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11시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5일간의 오체투지를 마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광화문광장을 겹겹이 막은 탓에, 이들의 행진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길을 내 달라"며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린 채, 꼬박 7시간을 버텼다.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광장을 찾은 수녀님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담요를 덮어줬지만 일부 참가자는 이조차도 거부했다.
"경찰 다리 사이를 기어서라도 가겠다"며 경찰의 구둣발 사이에 머리를 파고들었지만,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긴 대치의 시간은 행진 시작 7시간만인 오후 4시30분께 종료됐다. 일부 참가자들은 부축을 받고서도 한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5일간의 행진을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은 결국 청운·효자동주민센터가 아닌,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유흥희 기륭전자 분회장은 "낮은 자세로, 온몸을 기어 비정규직의 현실을 알리려 했지만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예전엔 민주주의가 공장 문 앞에서 멈추는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이곳 광화문광장 대로에서도 민주주의는 멈춰 있었다"고 했다.
기자회견 내내 흙이 묻은 목장갑으로 눈물을 닦던 유 분회장은 "지금 거지꼴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2014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비정규직의 모습"이라며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더 이상 우리 같은 비정규직이 이 땅에 없어지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기륭전자 조합원들과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오체투지 행진단은 내달 5일 2차 행진을 이어갈 계획이다.
한편 경찰은 이날 광화문광장 옆 차로에서 방송차량을 통해 오체투지 안내 방송을 진행한 백모 씨를 특수공무집행방해로 연행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