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헌법의 정교분리 원리에는 역사가 없다
한국의 헌법 제20조 2항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20세기 이후의 많은 현대적 국가들의 추세를 따라 정교분리의 원리를 추구하는 국가임을 한국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교분리가 법적 원리로 채택된 첫 번째 사례는 1791년 비준된 미국 연방수정헌법 제1조다. 이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이 법적 원리를 받아들여 오늘날엔 반수를 훨씬 상회하는 나라들이 정교분리를 법적으로 제도화하였다.
한데 이 미국의 연방수정헌법 제1조는 유럽 계몽주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세기 전반기에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그 참혹함을 봉합하는 협상의 원리가 바로 종교 간, 그리고 종교가 매개가 된 정치 세력 간의 공존의 원리이다. 그리고 이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종교와 국가에 대한 시민적 자유의 개념까지 포함한 똘레랑스(관용) 정신으로 발전하였고, 이 계몽주의적 정교분리론이 미국의 연방수정헌법에 의해 최초로 법제화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계몽주의적 정교분리론은 이민자들 다수파의 종교적 패권주의가 낳은 종교와 국가의 파행적 밀월 관계, 그로 인한 종교의 위기, 국가의 위기, 시민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법적 원리로서 재해석되었다.
요컨대 미국에서 시작된 정교분리 원리는 유럽과 미국의 역사와 성찰의 산물이다. 그 성찰을 요약하면 이렇다. 국가가 특정 종교(특히 소수 종파들)를 제약해서는 안 되고, 특정 종교(특히 가톨릭과 개신교 다수파)가 국가를 통제해서도 안 되며, 국가 및 종교로부터 시민 개개인의 종교의 자유 혹은 비종교의 자유가 침해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1948년 7월 17일에 반포된 제헌헌법에서 이미 정교분리는 성문화되었는데, 이 헌법과 더불어 탄생한 제1공화국의 종교 편향성은 이후 역대 어느 정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실은 이것은 건국 직전의 사회, 즉 해방 이후 미군정기 3년간의 정치와도 별반 차이가 없다.
미군정 당국이 1946년 7월 서울 지역의 약 1만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한 이념 성향 여론조사에서 약 77퍼센트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또 중도 좌익 성향의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대중적 정치 세력이었다. 즉 남한 지역은 대중의 성향에서나 제도적 토대에 있어 (중도적) 좌편향성이 압도적으로 강한 사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 당국은 남한을 극우 반공 사회로 재편하고자 했고, 이때 반공 성향이 가장 강했던 개신교 세력, 특히 월남자 개신교도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들 월남자 개신교도의 다수는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헤게모니 투쟁에서 실패하고 심각한 정치 보복을 당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강했다[체험적 반공주의]. 더욱이 그들 중 남성과 청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념을 공격적 적대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미군정 당국은 이들의 반공주의적 행동주의 성향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것은 이들의 체험적 반공주의는 수행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음을 뜻한다[수행적 반공주의]). 이 과정에서 개신교에 대한 당국의 편파적 지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여 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기인 15년 동안 남한 사회는 중도 좌편향 사회에서 초강경 극우 반공 사회로 전환되었다. (물론 이러한 극적인 전환은 남한의 내적 요인의 결과만은 아니다. 북한 정권의 강경한 극좌 편향성,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 갈등이 매우 고조되어 있던 냉전주의적 국제 정세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남한 내의 요소와 남과 북이라는 외적 요소, 그리고 냉전주의적 국제 정치적 요소 등이 뒤얽히며 1945년 이후 내전이 계속되고 1950년에 전면전이 발발하였으며, 그 결과 남한 사회가 극우 반공 사회로 극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때 개신교가 남한의 정부와 지배 세력의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행위자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한국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리는 전혀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다. 당시 남한의 개신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3퍼센트를 넘지 못했음에도 남한 사회, 특히 극우 반공적 체제의 건설은 정부 당국과 개신교의 공공연한 동맹에 의해 압도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이런 역사를 단순 반영했다면 인구 대비 소수파에 불과했던 기독교를 국교로 천명하는 이상한 헌법이 제정되었어야 하고, 그런 역사를 성찰하고자 했다면 정교분리의 원리를 더 철저히 하는 법의 제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관련 하위법들과 판례들에 의해 구체화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 근대국가의 역사에서 그런 사례는 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의 경우 이 헌법적 원리는 힘의 원리에 의해 해석되어 왔다. 즉 법 해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한 이들에 의해 정교분리 정신이 구체화되어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교분리법의 역사는 개신교에 유리하게 적용된 사례들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교분리론을 위한 역사를 쓰다
300쪽 정도 되는 책의 부피에 비해 세밀한 정보들이 굉장히 많이 소개되어 있고 그 정보들이 명쾌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은 저자의 '기자스러움'이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이러한 명쾌함은 많은 대중의 공감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다. 나는 책의 가치를 논하는 데 있어, 그 내용의 질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고 그로 인해 다른 관련 텍스트들을 읽게 하는 독서 욕망을 부추기며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나름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지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책의 가치는 저자 자신의 서사 구성 능력보다 그 책을 매개로 하여 벌어지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 과정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이 주제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생각을 진척시키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한국의 정교분리론의 역사로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역사란 과거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역사관, 즉 하나의 명징한 객관적 사실의 발굴로 귀결된다고 확신했던 역사 인식론은 이미 19세기에 몰락해 버렸다. 역사학의 학제사에서 20세기는 이러한 지난 세기적 역사 인식론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탐색해 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책으로 저술된 역사 텍스트 자체는 아직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요소다. 그 텍스트를 대중이 읽고, 그 독서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꿈이 뒤얽히며 발생하는 의미들, 그리고 이 의미들을 둘러싼 대화와 실천들이 이어질 때 그것은 비로소 역사가 된다. 즉 역사 텍스트를 둘러싼 담론 현상이 바로 역사다. 가령 1948년 이후 이승만 정권의 종교 편향성에 관한 역사 텍스트를 읽는 2010년대의 독자인 우리가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과 바람을 갖고 그 텍스트를 읽어내고, 그러한 해석을 둘러싸고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며 또 우리 시대의 종교 편향성에 대해 모종의 의견과 실천을 도모할 때, 이 텍스트는 우리에게 역사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역사 쓰기의 한계가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다루어진 많은 정보들이 일으키는 복합적이고 때로 모순적이기까지 하는 양상을, 그로 인한 해석적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일부 독자들에게는 너무 단조롭다는 평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 몇몇 독자들의 불평은 그러했다. 가령 대통령별로 종교 정책을 다루다보니, 대통령의 종교에 얽힌 개인사를 이야기하게 되고 그것이 그 정권의 종교 정책의 중요한 배후가 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는 것은, 읽는 재미는 있지만, 너무 단순한 혹은 위험한 저널리즘의 한 사례로 지적될 우려가 있다.
어느 정권이든 이질적인 여러 세력이 제휴한 권력 동맹을 통해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 동맹 내의 각 분파들은 서로 더 강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 상호 간의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 그리고 이 암투 과정에서 각 분파들은 권력 동맹 안팎의 여러 정치 세력들과 선택적 제휴를 하곤 한다. 또한 여기에 국제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 하여 특정 정권의 정책들 속에는 그러한 여러 권력 동맹 안팎의 세력들 간의 타협과 갈등이 담겨 있고, 국제 정치적 환경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때 대통령의 사생활이나 사적인 종교 취향이 정책에 미치는 변수는 그다지 크지 않다.
물론 짧은 분량의 글에서, 그것도 대중적 글에서 이러한 복잡한 정치과정을 세세히 다루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들을 남겨두는 것은 중요하다. 하여 독자들은 설사 명쾌한 답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그 답에 이르는 하나의 생각의 여지를 갖게 되고 거기에서 출발하여 더 많은 독서와 생각을 통해 다양한 상상력을 펼치게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많은 대목에서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두지 못하는 결함을 지닌다.
이 책의 한계에 관해 하나 더 논하자면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세 가지 축 가운데 전통적인 두 가지 논점만이 길게 다루어져 있는 반면, 최근 점점 부각되고 있는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다루고 있는 두 가지란, 국가가 특정 종교 세력(개신교 주류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종교 편향성을 지니는 것과, 특정 종교(개신교 주류 집단)가 국가의 형성에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종교 편향성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의 서사가 결여하고 있는 세 번째 요소란 국가와 특정 종교 간의,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동맹 관계가 초래하고 있는 시민의 종교적 혹은 비종교적 권리의 침해 문재이다. 흔히 이 세 번째 요소를 종교 인권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바로 이 종교 인권의 관점에서 종교와 국가가 일으키는 권력 효과를 비평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말했듯이 세 번째 요소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권력의 관점에서 다루는 데 있어 좀 더 최근에 주목받는 논점이다. 요컨대 이 책은 이 주제에 관한 좀 낡은 관점과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으로 국가와 종교를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고, 특히 한국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 이것으로 이 책을 너무 과하게 비평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 다만 그가 향후 이 책의 속편을 쓴다면 이 세 번째 논점에 더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이 책을 읽을 것인가…한국적 정교분리론의 역사 쓰기, 읽기, 실천하기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 마지막 구절에서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종교와 권력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구구절절한 얘기들이 이 한 문장 속에 압축되어 있다. 나의 식으로 다시 말하면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리에 관한 역사 만들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역사가 될 만하다. 즉 그가 바라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몇 가지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이 읽고 참고하며 더 발전된 생각과 의견, 그리고 실천을 이어가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책은 더 활발한 논의를 위한 거점이 될 것인가? 즉 우리는 어떻게 이 책을 읽을 것인가?
아마도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종교와 정치의 불온한 관계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헌법상의 정교분리론의 문제점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조항이 삭제되어야 한다거나 수정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이것을 국교 조항으로 바꾸자거나 혹은 더 강력한 의미의 종교국가(Religious State) 조항으로 만들자는 것은 다종교 사회이자 국민의 절반이 무종교인으로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고, 다양성에 대한 똘레랑스를 확장하려는 현대 사회적 비전과도 배치된다. (고대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은 야훼를 국교로 하는 사회였다. 그리고 이 두 나라가 멸망한 뒤 수세기 후에 유다국의 후손들이 만든 사제국가사회는 종교국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는 교황청이나 호메이니 이후의 이란 같은 나라가 종교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정교분리의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역사의 지점들을 예리하게 읽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해석과 법적 부대장치들이 필요한지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가령 국가의 냉전주의적 정치 혹은 기득권자 편향적 정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가톨릭 사제단을 정교분리 잣대로 비난하는 일단의 미디어 권력이나 보수적 법률가와 종교인들의 주장은 한국의 정교분리 원리의 잘못된 해석의 역사를 조금도 성찰하지 못한 결과다.
1974년, 박정희 정부가 인혁당 2차 재건위 사건을 조작해서 국가를 독제 체제로 통제하고자 기도할 때 이에 대해 저항하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비판 집단을 향해 국무총리인 김종필이 정교분리에 위배된 신앙 행위임을 주장하였고, 그리스도교 내의 많은 보수적 이론가들, 그리고 대학이나 법조계, 언론계 등의 여론 조작자들이 같은 주장을 폈다. 또 1990년대 후반 이후 도처에서 터져 나온 개개인의 (비)종교적 자유에 대한 주장에 대해 법원은 종교 자유를 개인의 자유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기관의 자유로 해석하곤 했다. 이것 역시 인권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해석의 도구로 정교분리 원리가 이용되었던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리가 역사성을 상실한 결과다.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으니 문구에 대한 해석의 경향성이 결여된 탓에, 힘의 원리가 해석을 좌지우지한 것이다. 하여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형성된 권력에 대하여, 그 폐해에 대하여 더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 사례들을 더 깊게 성찰하고 그것들 속에 작동한 부당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제한하는 해석들과 실천들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정교분리 원리의 역사를 쓰고, 읽으며 실천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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