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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에 미친 사람'이 반바지 입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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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에 미친 사람'이 반바지 입게 된 사연

[우리 아이는 왜 거울을 안 볼까] 오찬일 해바라기 회장 인터뷰 <1>

"화상은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사고잖아요. 사실 숫자로 보면 화상 입은 사람이 많은데도, 자꾸 소수로 분류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만히 있기 때문이에요. 활동 보조를 받는 장애인은 고속버스 탈 권리를 외치면서 버스터미널에서 버스 타기 퍼포먼스를 했잖아요. 그런데 화상 장애인들은 뭘 하고 있나 싶더라고요."

화상 치료를 받는 사람은 약 55만 명이다. 그 중 중증 화상 환자가 9000명이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런데도 화상 입은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소수처럼 여겨진다.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는 것, 자신을 "화상에 미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오찬일 화상 환자 자조모임 '해바라기' 회장이 이 모임 활동을 시작한 이유다.
카센터 겸 무전기 대리점을 운영했던 오찬일 회장은 2007년 가게 누전으로 불이 나 전신 59%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사고 이후 가게를 정리한 그는 처음에 막막했다. 다쳤고, 돈은 없었고, '절에 들어갈까' 생각할 정도로 우울했다.
그러다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다른 화상 환자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 '해바라기' 온라인 카페가 2009년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2010년에 덜컥 회장 직을 맡아버렸다. "그대로 없애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후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했다.

반팔, 반바지 입다

막상 회장이 되고 보니, 이 모임이 단순히 화상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데 그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병원비 등 경제적인 문제로도 힘들어했지만, 다른 문제들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이 트라우마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정신적이고 가정적인 문제도 많아요. 이혼율도 높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은둔형 회원들이 많았어요. 우리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은둔형 회원들을 한 명, 한 명 설득해서 모임을 꾸리기 시작했다. 번개 모임, 생일 파티, 야유회, 대중교통으로 콘서트 가기 같은 행사를 기획했다. 오프라인 회원 모임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 회장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여름에도 토시로 흉터가 남은 팔을 가리고 다니던 그는, 해바라기 활동을 하면서 여름에 반팔, 반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내가 남들한테 가리지 말고 나오라고 해놓고, 정작 내가 가린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사진으로 말해요'

일일이 화상 전문 병원을 찾아 '해바라기' 전단지를 돌리던 그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사람들을 만날 계기를 만들었다. 화상 환자를 지원하는 베스티안 재단을 통해 명함을 만들고 강의도 다녔다. '의료비 지원 제도' 등을 알아봐주고, 장애 진단 제도도 안내하면서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그렇게 꾸준히 모임을 만들고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덧 그는 회원들과 친해져 있었다.
은둔형 회원들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동국대학교 학생들과 '포토 보이스' 행사를 한 것이었다. '사진으로 말한다'는 취지의 이 행사에 안면 화상 회원 10명이 참가했다. 평소에 외출을 꺼리던 회원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들을 사진에 담았다.

"안면 화상 장애인은 사는 모습이 다른 화상 입은 분들과 다르거든요. 이분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낀 걸 사진에 담았어요. 본인이 자기 모습을 찍거나, 사진을 찍고 서로 얘기하는 거예요. 이 사업을 하면서 대학생들과 식사도 같이 하고, 동국대 캠퍼스도 구경하면서 이분들이 자신감을 얻은 거예요. '숨어 살 게 아니라, 이제는 나가도 되겠다' 하고요."
이 사업은 올해부터 장애인재단 공식 사업이 됐다.

병원→트라우마 센터→재활까지

'포토 보이스' 사업은 작은 시작일 뿐이다. 해바라기 활동을 할수록, 오 회장은 바꿔야 할 제도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화상 환자에게 턱없이 부족한 건강보험 보장성 문제, 치료 이후 재취업 문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심리적 상처 문제 등등. 그가 특히 가장 마음 아플 때는 회원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집 밖으로 안 나올 때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를 겪은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트라우마 센터를 만들었다잖아요. 사실 저도 화상을 입고 첫 2년간은 정신과 치료를 받았어요. 그게 도움이 안 됐어요. 이런 식이에요. '죽고 싶어요?' '예.' '그럼 약 더 드셔야겠네요.' 그러고는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하고, 좋은 얘기를 해줘요. 그런데 그 말이 잘 귀에 안 들어와요. '아, 이 사람들은 그냥 직업상으로 말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한 화상 환자가 한국장애인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의 화상 환자 지원단체인 피닉스 재단에 다녀온 일이 있다. 그가 작성한 연구 보고서를 오 회장도 받아서 공부했다. 피닉스 재단의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이 재단의 운영방식은 단순히 치료비를 지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화상으로 다친 사람들이 치료 이후에 겪는 심리 문제를 치유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재활까지 연계해 지원했다.
"미국에는 화상 트라우마 센터가 25곳이 있어요. 화상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서 트라우마 센터로 곧바로 연결돼요. 그리고 재활까지 연결해줘요. 그게 미국 피닉스 재단 시스템이에요. 거기 다녀와서 우리나라에도 화상 환자를 위한 전문 인력과 전문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는 슈라이너스 병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는 화상을 입은 어린이나 청소년이 병원 학교에 가면 '정규 교육'으로 인정을 해줘요. 한국에서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치료 때문에 유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하는 거죠. 물론 우리나라에도 몇몇 대학병원 안에 '병원 학교'가 있는데, 주로 소아암 환자들이 대상이에요. 화상 아동을 위한 병원 학교도 마련됐으면 해요."

"우리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요"
오 회장에게는 꿈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화상 트라우마 센터와 화상 전문 재활병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려면 회원들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
"화상 흉터 때문에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에, 일단 우리 스스로 밖으로 나오는 게 급선무에요. 그게 되면 우리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제 꿈은 화상 트라우마 센터와 화상 전문 재활병원이 생기는 거예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지나간 발자국이 길이 되리라고 믿어요. 그 길을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효과가 크다고 생각해요. 국가나 사회가 숨어있는 우리 찾기를 바라기 전에, 스스로 나와서 벽을 깨야죠. 숨어있는 우리를 공무원이 찾을까요? 우리 스스로 나와서 깨우치고 활동하고 싶어요."
▲ 오찬일 해바라기 회장.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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