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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취임 석달 만에 북한에 변심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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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취임 석달 만에 북한에 변심한 까닭은?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북핵, 역사에 길을 묻다(6)

사람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첫인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입견과 기대를 함께 품고 상대를 처음으로 만날 때, 첫인상은 선입견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기대를 키워주기도 한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철저하게 '북한 지도자는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는 정권'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선입견은 부시 대통령이 "나는 김정일을 증오한다"는 말에 압축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만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대신 9.11 테러와 아무 관계가 없었던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불렀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위협론을 근거로 미사일방어체제(MD)를 비롯한 군비증강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숨은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랬던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했다. 2007년 2월 13일에 채택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2.13 합의)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으로부터 해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두고 워싱턴에서는 '2월의 충격'(February Shock)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부시는 이듬해 10월에 이 약속을 이행했다.

'악의 축'에서 테러지원국 제외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북한과 직접 만나본 결과 선입견을 버리고 기대를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 핵심적인 이유였다. 부시 행정부가 실질적으로 북한을 처음으로 만난 시점은 이라크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어 네오콘을 쫓아내고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지 3개월이 지난 2007년 1월이었다. 그리고 북한 협상단을 만나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 만나보니 얘기가 되네' 뒤늦게 만나서 느낀 첫인상이 극적 반전을 연출한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2008년 6월 북한이 영변에서 냉각탑을 폭파하는 장면을 미국 방송 CNN을 통해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부시의 말 한마디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저건 검증 가능하군!"

▲ 북한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장면 ⓒ CNN 방송 갈무리

부시보다도 못한 오바마?

이에 반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등장 이후 북미관계를 비롯한 한반도 정세는 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오고 있다. 오바마는 대선 후보와 임기 초반에 적극적인 대북 메시지를 전달했다. 핵심적인 내용은 북미 직접 대화와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선 후보 시절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등 "적이든 우방이든 관계없이 모든 나라를 상대로 '단호하고 직접적인 외교'(tough and direct diplomacy)를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2009년 1월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2014년 12월 현재까지 6자회담은 한 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북미 고위급 대화도 2009년과 2012년 한 차례씩 열린 이후 자취를 감췄다. 북한이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북한은 '조건 없는 대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대화를 위한 대화에는 흥미가 없다"며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를 취해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오바마가 대선 유세 때 그토록 비판했던 네오콘의 화법과 너무나도 닮은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되고 만 것일까? 시계를 돌려 오바마 취임 초기인 2009년 2~4월로 돌아가 보자. 이 짧은 시간 동안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세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2월은 대북포용정책 시도기로, 3월은 대북정책 조정기로, 4월은 대북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한미일 삼각 공조로 잡은 것으로 말이다.

먼저 2월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2009년 2월 9일 해외 첫 순방지로 동아시아를 선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진정으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게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양자 관계를 정상화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며, 다른 나라들과 함께 북한 주민들의 에너지 수요와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원에 나설 것이다."

이 발언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북핵 해법으로 관계 정상화, 평화협정 체결, 경제 및 에너지 지원 등 포괄적인 상응 조치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북핵 폐기 '완료'가 아니라 "준비가 되어 있다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스티븐 보즈워스를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임명해 대북특사로 파견하고자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당시 북한과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둘러싸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국무부는 평양에게 북한이 발사를 취소하면 보즈워스 특별대표가 방북할 것이지만, 만약 발사를 취소하지 않으면 그의 방북 계획은 취소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조건부' 특사 제의를 거부하면서 로켓 발사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3월 들어 오바마 행정부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었던 제프리 베이더의 회고록 <오바마와 중국>에 잘 담겨 있다. 오바마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면서 "15년간 미국 행정부가 직면했었고 결국 양보했던 방식, 즉 도발-강요-합의-보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과 결별하는 정책을 원한다"며, 북한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역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지 말아야 한다"며,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불러내기 위해 유인책을 제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게이츠 발언의 취지는 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이어, 또다시 북한과의 합의를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6자회담 재개에 대해서도 강경론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베이더에 따르면 클린턴 국무장관은 NSC 회의 직후 자신을 불러 "미국은 6자회담 개최에 대해 보다 유보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회담의 지속은 "미국이 나약해 보일 수 있고 또한 미국의 지렛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은 6자회담을 자신의 중대한 외교적 업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6자회담에 대한 미국의 유보적인 태도는 중국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공개적인 발언은 내부의 기류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클린턴은 중국에 가서는 위에서 소개한 발언과 다른 취지의 얘기를 했다. 그는 3월 12일 중국 외교부 장관과 회동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6자회담을 재개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둘 사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 목표는 최고의 목표이고, 6자회담이 조속히 재개되어 이러한 목표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중략) 북한이 앞으로 미사일을 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인 것입니다"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위에 비슷한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4월 3일 미국의 대북정책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로켓 발사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하는 도발적 행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중대한 이익과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6자회담을 재개할 필요가 있다"며, "단기적인 문제와 관계없이, 모든 당사자는 가능한 신속하게 6자회담을 재개하는 것에 장기적인 이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유용하다면 언제든 평양에 갈 준비가 돼 있다"며 강력한 방북 의사를 피력했다.

아울러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 재개도 희망했다. 보즈워스는 "현재의 상황은 미사일 문제를 왜 다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며, "미사일 문제는 클린턴 행정부 막바지에 중대한 진전이 있었던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 때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북한의 로켓 발사 전까지는 오바마 행정부 내에는 강온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다.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더라도 6자회담과 북미대화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 달성은 변함없는 목표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4월 5일 북한이 로켓 발사를 강행하자, 분위기는 강경론으로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북한이 로켓을 쏘아 올린 시간에 오바마는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제로 한 연설문을 마무리하고는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체코 시간으로 4월 5일 새벽, 보좌진들이 오바마를 깨워 북한의 로켓 발사 소식을 전하자, 오바마는 프라하 연설문을 직접 수정했다. 오바마는 연설에서 "북한의 도발은 유엔 안보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이러한 무기의 확산을 방지할 수 있는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며, "규범은 구속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벌을 받아야 하며, 말(words)은 무언가를 의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강력한 국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00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장면 ⓒ프레시안 자료사진

오바마가 이러한 강경 입장을 천명한 데에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만류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켓 발사를 강행한 것이 주효했다. 동시에 자신의 역사적인 연설에 북한이 재를 뿌리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도 영향도 있었다. 북한의 로켓 발사는 '핵무기 없는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고, 또한 발사 시점도 자신의 연설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이로 인해 프라하로 모여지던 국제사회의 이목이 평양으로 향했다. 주요 언론이 오바마의 연설보다는 북한의 로켓 발사를 비중 있게 보도한 것이다. 이는 오바마의 북한에 대한 첫인상이 나빠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평양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관리들은 북한의 로켓 발사가 대북정책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입을 모은다. 2009년 5월 13일 필자가 만난 국무부 관리는 "취임 한 달 만에 대북특사를 보내기로 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큰 결단이었는데, 북한의 행동은 대단히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캐슬린 스티븐슨 주한미국 대사 역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것(9.19 공동성명과 그 이후의 진전)을 토대로 상황을 더 진전시키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했는데, "평양은 대화보다는 미사일과 핵실험 같은 도발행위로 반응"했다고 비난했다.

취임 초기 적극적 포용(engagement) 시도가 "북한의 도발"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판단한 오바마 행정부는 강력한 한-미-일 공조체계를 바탕으로 "북한의 패턴을 종식시키겠다"는 강경기조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표적인 협상파였던 보스워즈의 아래 발언에 잘 드러난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만 하더라도 북한과 적극 대화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그러나 출범 6개월 동안 우리의 열망은 싸늘하게 식어버렸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대화 의지에 미사일과 핵실험으로 응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정부 내에서는 회의론이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실망과 좌절은 미국만의 몫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 대한 북한의 실망감도 대단히 컸다. 미국이 대북 특사 파견을 타진한 2009년 2월 중순∼3월 초는 북한이 강력히 반발했던 한미합동군사훈련 '키 리졸브/독수리 훈련'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 훈련의 실시 여부를 새롭게 출범한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은 북한은 유엔군(미군)과의 장성급 회담을 통해 이 훈련의 취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군사훈련은 연례적이고 방어적인 것이라며 북한의 요구를 일축했다.

더구나 이때를 전후해 주한미군 사령관 등 미군 수뇌부는 수시로 김정일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면서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한미연합군의 투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새롭게 출범한 미국 행정부가 북한 지도자의 건강 문제를 언급하면서 군사 훈련을 강행하자, 북한의 오바마에 대한 첫인상도 나빠졌다. 북한은 미국이 MD로 북한의 로켓을 요격할 수 있다고 언급하자, "우리의 평화적 위성에 대한 요격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며, "가장 위력한 군사적 수단으로 보복타격전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북한이 로켓 발사를 강행한 데에는 내부적 목적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발사 시점 자체가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하기로 한 12기 최고인민회의 및 4월 15일 고(故) 김일성 주석의 생일(태양절)을 앞둔 때였다. 또한 김정일 와병설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시점이라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할 필요도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2012년 강성대국론'을 주창하고 있던 시점이었고, 위성 발사를 그 상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업으로 간주하던 터였다. 그러나 미국의 해석은 달랐다. 북한을 "엄마에게 젖 달라고 떼쓰는 아기"에 비유하면서 "미국의 관심 끌기"라거나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는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결국 미국은 북한의 로켓 발사를 '위성의 탈을 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로 간주하고, 이 사안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했다. 어떤 나라가 위성을 발사했다는 이유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북한의 반발도 거셌다. 2차 핵실험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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