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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소 만나기 전에 돌아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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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 미소 만나기 전에 돌아오지 마라

1월 폐사지학교, 충주 불탑과 마애불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의 새해 1월, 열세 번째 강의는 충청북도 충주 일대에서 이뤄집니다. 새해 아침 기운이 가득한 1월 17일(토) 당일로 진행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남한강 물길이 젖줄처럼 흐르는 충주는 예로부터 중원(中原), 예성(蕊城) 그리고 국원(國原)이라고 불렸으며 정토사지(淨土寺址)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에 따르면 중주(中州)라고 불렀던 곳입니다. 더구나 고대 삼국들이 남한강 물길을 장악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장미산 아래에 있는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한 기념으로 세운 척경비(拓境碑)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삼국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접전이 이루어졌음인지 이곳은 나라 안 어느 곳보다 삼국의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1(보물 제1401호). “나는 이곳에 앉아 숱한 시간을 둔곡에 찾아든 은자처럼 보냈었다.” ⓒ이지누


폐사지학교 1월 강의는 이와 같은 충주 일대를 찾아갑니다. 충주에는 삼국의 복합적인 흔적이 남아있는 마애불이 있는가 하면 한강을 오르내리던 배들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마애불이나 탑과 같은 독특한 불적(佛跡)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들은 뱃길의 안전을 도모하여 민간의 배들은 물론 세곡선(稅穀船)들이 무사히 하항(河港)에 다다를 수 있게 하였을 것이며, 더불어 강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무사안녕을 도왔을 것입니다. 한때는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했지만 지금은 터만 남은 개천사지와 보각국사 환암(幻庵) 혼수(1320~1392) 스님이 머물렀던 청룡사지 또한 돋보이는 곳입니다. 충주호를 만드느라 본래 절터에서 옮겨온 개천사지(정토사지)는 법경대사(法鏡大師)와 홍법국사(弘法國師)가 머무른 선종 사찰이었으며, 청룡사지는 불교 경전을 출간하던 간경소(刊經所)로도 이름을 떨치던 곳이었습니다.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제17호) ⓒ이지누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다음은 이지누 교장선생님의 폐사지 답사기인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과 2007년 <불교신문>에 연재한 마애불 이야기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충주는 산길과 물길이 만나 어우러지며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워 놓은 곳이다. 고대 삼국이 남한강 물길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던 덕분에 삼국의 문화가 혼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에서는 흔치 않은 고구려의 유적들을 볼 수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고구려에서 세운 비석으로 알려진 중원 고구려비 뒷산인 장미산은 백제가 축성을 했지만 고구려가 보수를 했으며 최후에는 신라가 차지했으니 그 아니 묘한 인연일까.

그것은 불교문화에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중앙탑이라고 불리는, 신라의 탑 중 가장 높은 탑인 중원 탑평리 7층석탑과 같은 경우는 주위에 절집이 발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우뚝 솟았으니 궁금증이 더한다. 더구나 탑 주위에서 발굴되는 와편들은 모두 고구려 계열의 것들이어서 의문은 증폭된다. 추정컨대 고구려의 와편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고구려의 영토이었을 당시 치소(治所)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라가 영토 다툼에서 승리를 하고 난 후, 물길을 확보한 기념으로 물길과 맞닿았으며 고구려의 치소가 있었던 이곳에 거대한 탑을 세운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7층탑은 평지에 방형의 단을 쌓고 다시 그 위에 탑을 세운 모습이다. 그것은 신라의 탑 중 가장 높은 것이며 규모보다는 높이를 더한 것이니 상징적 의미를 담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한 까닭은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조성 시기를 통일신라 초에서 원성왕 재위(785~798)년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찾아가야 하는 부처님도 계신다.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그것이다.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 중턱의 작은 암벽에 베풀어진 불보살은 모두 9구나 된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애불상군이어서 불쑥 찾아와 마음을 쉬는 곳이기도 하다. 불과 4~5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둔곡(遁谷)과도 같았다. 찾는 이 귀하고 혹 찾더라도 머무는 이 드물었으니 나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여하게 자리를 지키는 불보살이 아홉 분이나 계시니 그 아니 든든했겠는가. 그들에게 기대어 그친 생각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일군 마음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정(靜)을 동(動)의 반대개념으로 둔다면 정양(靜養)이란 고요할 때 기른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사상가인 혜강(惠岡) 최한기(1803~1879)는 <기측체의> ‘추측록’에서 말한다. “정(靜)할 때에는 비록 소리가 없으나 듣는 정신은 그대로요, 형체가 없으나 보는 정신은 그대로인 것이니, 기틀을 잊어 혼매하지 말며 또한 생각을 일으켜 소란하지 말아서, 먼지 없는 거울과 티끌 없는 물같이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곳에 앉아 숱한 시간을 둔곡에 찾아든 은자처럼 보냈었다. 늘 따라붙는 그림자가 성가시기도 했지만 모든 행동을 나를 따라 할지언정 오로지 말을 하는 것만은 따라하지 않는 그를 보며 부끄럽기도 했었다. 부처님이라고 달랐을까. 마치 은자처럼 숲 그늘로 스스로를 가린 채 대여섯 평의 마당만을 남기고는 깎아지른 절벽만을 남겨놓았다. 그는 이토록 후미진 곳에서 천년이 넘도록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놓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어찌 그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웅숭깊은 말을 헤아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고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소리없는 말은 귓전에 더욱 큰 울림으로 들리기만 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그 깊은 울림에 마음을 떨면서 서성거렸으니 그만큼 나를 되짚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감사한 불보살들의 생김생김 또한 글머리에 이야기한 것처럼 고대 삼국의 미술양식들이 혼재되어 있어 더욱 잦은걸음을 나누었던 것이지 싶다.

더구나 이만한 불보살이 베풀어져 있음에도 남아있는 기록이라고는 조선후기에 이병연이 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 한 곳밖에 없다. 그 책에 “가금면 봉황리에 높이 1장의 미륵불이 있다(彌勒佛 在可金面 鳳凰里高一丈)”고 되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1장이란 10척(尺)을 말하는 것이니 대략 따져 3m 남짓한 것이다. 이곳에 새겨진 불상들 중 3m에 달하는 것은 가장 깊숙한 곳에 독존으로 새겨진 여래좌상 정도이다. 바위 전체의 높이는 3m 가량 되지만 실제 조각된 불상의 높이는 2m 남짓하다.
불상의 대좌는 없으며 무릎은 상체에 비해 너무 넓어 크게 과장되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시무외인이며 왼손은 여원인으로 삼국시대에 유행한 수인이다. 법의는 통견이지만 마멸이 심해 의문(衣紋)의 확인은 쉽지 않으며 어깨 또한 무릎처럼 넓게 표현되어 있다. 목의 삼도는 선명하며 상호는 방형으로 투박한 느낌이다. 머리의 나발은 불거진 듯 뚜렷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사각형의 투박한 상호와 부어 있는 것 같은 눈두덩이다. 그것은 화불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체에 비해 과장되어 있는 두광 안에 모셔진 다섯 구의 화불 중 맨 아래의 화불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데 눈이 부어있어 불거져 보인다. 이는 불상의 조성 시기가 고대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식은 주로 북제(北齊)와 수(隋)나라에서 유행했던 것이며 눈이 부어있는 것 같은 상호는 보물 제198호인 경주 남산의 불곡석불좌상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부처골 감실부처라 부르는 그 불상의 조성 시기 또한 애매하지만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로 잡고 있으니 이곳 봉황리 마애여래좌상 또한 그 무렵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에서 부드러운 신라의 향기를 맡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투박하며 당당하고 거칠기까지 한 고구려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다. 불곡석불좌상이나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국보 제201호인 경북 봉화 북지리마애여래좌상이 투박하여 세련된 미감을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부드럽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독존으로 계시는 여래좌상에서 20m 남짓 떨어진 곳에 다시 작은 암벽이 있는데 이곳에는 모두 8구의 불보살이 베풀어져 있다. 지금은 그나마 철제 계단으로 다리처럼 만들어 놓았기에 망정이지 전에는 이 곁을 지나면서도 이곳에 불보살이 있는 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들이 허다했다. 발밑이 워낙 아찔하니 바위에 기대어 몸을 지탱하기 급급할 뿐 쳐다볼 엄두는 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보고 나면 어찌 잊으랴. 비록 깨져버린 상호이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계시니 처연한 아름다움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곳의 불보살들은 크게는 한 곳에 새겨졌지만 마치 두 군데에 나뉘어 새긴 것 같다. 왼쪽에는 시무외여원인을 한 여래좌상과 그를 향해 공양을 올리는 공양상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다섯 분의 보살들이 에워싸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것 같은 여래좌상은 무릎 아래가 깨졌지만 법의는 통견이며 U자형으로 가슴 아래에 모이고 있다. 여래상을 향하고 있는 공양상은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쪽은 꿇었다. 왼손은 보주이거나 혹은 찻잔을 들고 팔꿈치는 왼쪽 무릎에 올려놓았다. 허리춤에 둥근 고리의 장식이 있으며 오른쪽 발 아래로 한 가닥 천의 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몸의 일부분이 깨지긴 했지만 이만하면 상당히 사실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옆의 바위에 새겨진 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보살군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륵반가사유상의 왼쪽보살상이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가슴까지는 조각되어 있지만 그 아래는 없다. 또 오른쪽 치마를 입은 보살상 또한 그렇다. 미륵반가사유상의 왼쪽 팔에 가슴 부분이 가린 것이다. 그것은 왼쪽에 있는 세분의 보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두 조금씩 겹치며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위 면이 좁은가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더욱 궁금증이 더한다. 이는 불화에서 볼 수 있는 회화적인 구성이며 나라 안의 마애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또한 이들이 디디고 선 역삼각형의 대좌들 또한 북방의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낯설기는 마찬가지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은 비록 얼굴은 깨졌지만 삼국시대후기에 유행한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턱을 괸 오른손이나 발목을 잡은 왼손의 손가락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마애 미륵반가사유상은 드물기도 할 뿐더러 이렇듯 많은 보살들에게 둘러싸인 곳은 또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황홀하지만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백제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보살상들이 머금고 있는 미소이다.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눈과 코 그리고 입을 찾고 나면 그들이 머금은 여린 미소가 보이리라. 그 미소 만나기 전에 돌아오지 말 것이며 못 보았으면 다시 가야 하리라. 그 아름다운 모습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시기적으로는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할 무렵에 조성되었다고 짐작하지만 그들이 내뿜고 있는 향기는 고구려와 백제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 국의 특징들이 불거지지도 않았으니 더욱 묘한 것이다. 그 매력 때문에 이들에게로 향하는 나의 발길을 아직껏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2(보물 제1401호). “그 미소 만나기 전에 돌아오지 말 것이며 못 보았으면 다시 가야 하리라.” ⓒ이지누

<충주 청룡사터>
청룡사지는 환암(幻菴) 혼수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아니 지금도 그곳에 계신다. 지금은 비록 부도탑과 탑비로 남으셨지만 그 말씀들이야 어디 가겠는가. 그 말씀 되새기러 가는 길, 들머리의 숲길부터 묵은 길맛이 푸지다. 예전과는 달리 바로 코앞까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버렸지만 스님에게로 가는 길만은 여전하다. 짧으면 어떤가. 얼기설기 나무들이 웃자라 하늘을 가리니 산문은 저절로 만들어지고 곁으로는 개울물까지 흐르니 도솔천이 따로 있을까. 자늑자늑 걸었다. 숲으로 된 산문을 들어서자 곧 마주치는 위전비(位田碑)로부터 혼수 스님의 부도탑인 보각국사(普覺國師) 정혜원융탑(定慧圓融塔)이 있는 곳까지, 그리곤 다시 들머리로 내려왔다가 오르기를 대여섯 번, 숲에는 나뭇잎에 쌓였던 는개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소리를 목탁 소리 삼았다. 운율도 없고 투박할 뿐 낭랑하지도 않지만 아무도 없는 산길에 그만한 벗을 얻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들머리로 내려와 스스로 산문이라고 정한 숲 그늘에 서면 말씀들이 떠돌았다. 나옹이 묻는다. “입문구는 무엇이냐(問入門句)?” 그러면 혼수 스님이 대답했다. “들어오니 도리어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入已還同未入時)”고 말이다. 그 전에 이미 나옹은 혼수에게 당문구가 무엇이냐고 물었었다(翁問如何是當門句). 그러자 혼수 스님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不落左右) 그 가운데에 서 있는 것입니다(中中而立)”라고 한 뒤였다. 혼수 스님이 공부선장의 당문에 서 있었던 때문이다. 그 말을 되새기며 다시 탑비가 있는 곳까지 올랐다가 내려왔다. 이번에는 다시 “만약 모래를 찐다면 어떻게 좋은 음식이 되겠습니까(如蒸沙石 豈成嘉餐)”라는 말을 들고 올라갔다. 나옹이 혼수에게 “밥은 왜 쌀로 짓느냐(問飯何白米做)”라고 물었기에 혼수가 대답한 말이다.
공부선장에서 나옹과 혼수, 당대의 큰 스님이었던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공민왕은 그 말들을 입격문(入格文)으로 택하고 혼수 스님을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자 스님은 도성을 빠져나가 위봉산(圍鳳山)에 숨어버렸다. 지레짐작으로 왕이 자신을 내원(內院)에 머물게 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혼수 스님은 그 이전부터 나라의 부름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피하고 보는 스님이었다. 청룡사 서쪽 기슭에 스스로 흙과 나무를 날라 연회암(宴晦菴)을 짓고 머물던 스님에게 공민왕은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할 것을 바랐다. 그러나 스님은 홀연히 금오산, 오대산을 떠돌며 법을 참구했을 뿐 왕의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 1361년 가을에는 강릉의 안렴사(按廉使)를 시켜 대궐로 모시고 오라고 하자 스님은 따르는 듯 동행하다가 도중에 사라져 멀고 깊은 산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스님은 줄곧 숨고 나라에서는 부득부득 그를 찾아내는 숨바꼭질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1372년에는 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 불호사(佛護寺)에 머물다가 다음해에 내불당(內佛堂)으로 불려 들어갔으나 스님은 곧 빠져나와 멀고 먼 평해(平海)로 가버렸다. 그러나 왕은 전국에 명을 내려 스님을 찾았고, 1374년 정월에 다시 내불당으로 들어갔으나 9월에 왕이 승하하고 말았다. 다음해에 스님은 송광사(松廣寺)로 떠났다가 서운사(瑞雲寺)를 거쳐 연회암으로 돌아온 것은 1378년이었다. 그러나 다시 궁중에서 사람을 보내 광암사(光巖寺)를 맡아 달라고 하여 3년을 지내고 난 후 이제 그만 물러가겠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님은 더 말할 것 없이 캄캄한 밤길을 달려 원주의 백운암(白雲菴)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만큼 심지가 굳고 곧은 것이지 싶다. 우왕 9년인 1383년 2월, 스님을 국사로 책봉하려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은 게를 읊었다. “30년 동안 속세에 들어가지 아니하고(三十年來不入塵) / 물가와 수풀 밑에서 참된 성정을 길렀는데(水邊林下養情眞) / 누가 시끄러운 인간사를 가지고 소요하며(誰將擾擾人間事) / 자재하는 몸을 속박하고자 하는고(係縛逍遙自在身).”

그러자 궁중에서는 아예 국사 책봉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 스님이 계시던 이곳 청계산 연회암으로 와 국사로 봉했으며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오불심종(悟佛心宗) 흥자운비복국이생(興慈運悲福國利生) 묘화무궁도대선사(妙化無窮都大禪師) 정변지웅존자正(遍智雄尊者)의 존호로 받들었다. 그 후 공양왕이 즉위했을 때와 조선 태조 1년인 1392년에 스님은 국사의 일을 두 번이나 돌려보냈으나 그때마다 왕실에서는 스님이 돌려보낸 국사의 일을 되돌려 보냈을 뿐 받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말씀이 없지만 그가 남겨 놓고 간 행동만으로도 보고 배울 것이 한둘이 아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또 그 자리 찾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곳에 머무는 일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혼수 스님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왕실과 숨바꼭질을 했던 것이리라.
가을비는 장인의 귀밑머리에서도 피할 수 있다고 했던가. 어느새 비는 그쳤다가 뿌리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뿌연 연무가 가득하지만 그래도 부득부득 보이지도 않는 글을 더듬어 읽어보려고 탑비 앞을 서성거렸다. 12살에 출가한 스님은 충혜왕 2년인 1341년에 선시(禪試)에 합격했으며 29살 때인 1348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근 2년 동안, 나무열매와 베옷을 입은 채(食木衣麻) 마음을 다잡고 잠도 자지 않으며(攝心不寐) 잠시도 몸을 눕히지 않았다(脅不暫衡)고 하니 그 무시무시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지 싶다.

그러나 홀로 두고 온 어머니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말을 듣자 “바위 앞의 송백에게 말을 하노니(寄語巖前松栢樹) / 다시 와서 너와 더불어 일생을 마치리라(重來與爾終天年)”라는 게를 남기고 홀연히 행장을 수습하여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는 효성스러운 스님이었다. 그 후 스님은 금강산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스님이 더불어 일생을 마치겠다고 한 것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법이었으니 그 약속을 굳게 지킨 것이다. 그로부터 선원사(禪源寺)로 달려가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에게 <능엄경>을 배우고 휴휴암(休休菴)에 3년을 머물렀다가 청계산 자락의 청룡사로 들어와 손수 연회암을 지었던 것이다.
<능엄경>에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 했던가. 스님 부도탑 곁으로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맑고, 나뭇잎을 때리는 물방울 소리는 둔탁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혼수 스님 말씀이나 장삼자락 날리는 소리 또한 허공에 떠돌고 있으니 부도골이 온통 소리로 가득하다. 그 소리를 바라보면 절로 정신이 모아지고, 눈을 감고 손을 모아 앉으면 그곳이 곧 선정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더 나아가라고 한다. 아예 그곳에서 떠나 듣는 것조차도 버리고, 듣고 있는 그 놈으로부터도 돌아앉으라고 말이다. 그래야만 무설시(無說示)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나에게 멀다. 다만 이렇게 앉아 혼수 스님의 호가 왜 무작(無作)이었는지 어렴풋하나마 가늠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쁘기 짝이 없다.
무설시와 무작시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무 말이 없는 경지에 다다랐는데 또 무엇을 만들 것인가. 모든 것 놓아버렸는데 또 다시 무엇을 잡겠는가 말이다. 불현듯 마른 번개가 지나갔다. 스님이 지나간 것이다.

▲청룡사지 혼수 스님의 부도탑인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국보197호, 가운데) ⓒ이지누


2015년 1월 17일(토요일) 폐사지학교 제13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출발(아침 7시, 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 →중앙탑사적공원→중원창동마애불→점심식사 겸 뒤풀이(유기농채식뷔페)→충주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충주청룡사지→서울 향발

▲폐사지학교 제13강 답사로 ⓒ폐사지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장갑, 얼굴가리개(버프),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13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울러 폐사지학교 카페(http://cafe.naver.com/pyesajischool)에도 많이 놀러 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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