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힘이 상당부분 중국으로 전이되는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의 변화는 한국 안보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껏 한국 안보는 한미동맹이 제공하는 억지력, 즉 힘에 의존했다면 이제부터 가장 큰 안보의 자산은 외교가 될 것이다. 핵무기의 위협이 고조된 냉전의 절정기에서 빌리 브란트는 이런 말을 했다.
"미사일 수를 세는 일, 대포 사정거리나 위협설 등은 국방장관과 전문가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미사일 수, 대포 사정거리, 위협설이 중대한 의미가 된다는 것은 정치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정치는 그러한 우려와 설(設)들이 시험되지 않는 점을 염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에곤 바,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201면)
에곤 바는 "우리는 유럽에서 군사적인 것을 정치적 분별력 다음 순위에 배치시킴으로써 항상 (전쟁을 억지하는데) 잘해나갔다"고 말한다. 정치적이면서 전략적인 문제를 우선시하기 위해 빌리 브란트는 1971년에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났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소위 안보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북한이나 중국의 미사일 수나 새로운 위협을 북한보다 앞서서 선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북한이 슬쩍 뭘 보여주기만 하면 이걸 더 부풀려서 설명해 줄줄 아는 북한 군사력 홍보맨이 안보 전문가다. 그러나 정말 안보가 소중하다면 대한민국은 주변국과 함께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지하는 정치-전략적 수완을 길러야 한다.
지금 보수정권의 행태는 한 마디로 '고자질 외교'다. 전 세계에 북한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끊임없이 알리며 "북한을 압박해 달라"고 사정하는 그런 외교다. 그 결과 미사일 숫자를 세고 대포 사정거리를 계산하는 논리가 더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점점 더 위험해졌기 때문에 국방비를 더 늘려야 한다. 이것이 과연 안보논리가 맞는가?
올해 4월에 필자가 중국 사회과학원에 이어 요령대학교 한반도센터를 방문하여 장시간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학장을 비롯하여 다수 전문가는 "중국의 동북경제 도약은 한반도 안정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1950년의 한국 전쟁은 신생국인 중국의 국력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 쏟아 붓게 해서 중국을 통일할 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것이다.
중국이 한반도 불안정 사태에 개입해서 얼마나 희생이 컸는가를 강조하면서 "유사시 북한으로부터 난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한다. 사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38선 이북에서 그토록 급하게 압록강까지 진격하지만 않았더라도 중국은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 전쟁이 그들에게는 내우(內優)를 불러일으키는 외한(外患)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쟁으로 얻을 게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우리 안보 자산이라는 것이 오직 군사력과 동맹이라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얼마든지 한반도 전쟁억지에 활용할 수 있는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있고, 대한민국이 이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가에 전쟁 억지의 본질이 있다. 역시 문제는 미사일과 대포의 숫자가 아니라 정치-전략적 수완이다. 특히 부상하는 중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우리는 그 현실을 직시하고 협력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준비된 답변이란 무엇인가? 한․미․일 군사일체화와 전시작전권 전환 연기를 필두로 한 군사력 중시를 본질로 하고, 단지 하나의 치장이자 화장술로 한․중․일 동북아평화협력구상, 통일 대박을 공허하게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힘주어 말한다. 왜 정책적 성과가 없냐고 물으면 "북한이 비정상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든 게 북한 탓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창조적으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책임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게 과연 다음 세대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안보논리가 맞는가? 그리고 묻고 싶다. 그렇게 안보를 강조하는데, 왜 안보 상황은 더 나빠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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