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교수님이 생각난다. 내가 대학 다닐 때 교양 국어를 가르치던 분. 필수 과목이어서 1학년은 꼭 들어야 했다. 교수님은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파격 제안을 했다.
"시 30편 외우는 사람은 무조건 A+ 줍니다. 언제든 제게 찾아와서 30편 외운다는 걸 증명하면 수업 안 들어도 됩니다. 시험 안 봐도 되고요. 좀 틀리거나 버벅거려도 됩니다. 시 30편 외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니까요."
나는 이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그냥 수업 듣고 시험을 봤다. 수업을 함께 들은 친구들 거의 모두 그랬다. 솔직히 교수님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문득 읽은 시 한 편이 위로가 되고, 삶의 고개를 넘게 한다는 걸 안 뒤부터였을까. 교양 국어 교수님이 종종 생각났다. 시 30편 외우면 A+를 주겠다는 그의 제안이 꽤 괜찮은 교수법이란 생각과 함께.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 등을 모아 묶은 이굴기의 <꽃산행 꽃詩>(궁리, 2014년 11월 펴냄)를 읽을 때는 그 시절의 교양 국어 수업이 더욱 자주 떠올랐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다.
최근 나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적어도 식물 이름 100개는 입에 넣고 중얼거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백두산까지 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이다.
식물 이름 100개 정도는 줄줄이 꿰고 싶다는 저자의 계획을 보면서, 나는 가당치도 않게 시 100편을 "입에 넣고 중얼거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전혀 엉뚱한 생각이 아니다. <꽃산행 꽃詩>는 이 땅 곳곳에 피어난 꽃을 찾아 떠난 저자 이굴기의 발자국이자, 그가 꽃을 보며 떠올린 시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꽃과 시. 이 세상에 나고 자라면서 꽃을 보고 시를 떠올리지 않고, 시를 읽으며 꽃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꽃과 시 앞에서 감정이 출렁이는 그 순간,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참 좋겠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대개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시를 모르거나, 꽃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얄밉게도 이굴기는 이런 장벽을 기어코 훌쩍 뛰어넘고 만다. 이굴기는 땅에 바짝 엎으려야만 보이는 작은 야생화를 찾아 따뜻한 남도 진도로, 한반도 남쪽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개불알꽃을 찾아 저 차가운 백두산까지 간다. 꽃을 알아보는 지식과 눈썰미만 가졌다면 덜 얄미웠을 터. 하지만 이굴기는 꽃에서 시를 떠올리는 데 거침없고, 시(문학)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데 막힘이 없다.
무슨 심산인지 많은 사람이 연결시키는 '진달래 = 김소월의 <진달래꽃>', '메밀꽃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런저런 꽃 = 김춘수의 <꽃>', '동백꽃 =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등은 그의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꽃과 시가 대부분이다. 백두산 아래에 핀 개불알꽃에 물방울이 맺힌 걸 보고 이굴기는 오에 겐자부로가 초등학생 때 쓴 시를 불러온다.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
이굴기는 꽃에서만 시를 불러오지 않는다. 그는 강원도 태백산에 있는 사찰 백단사 어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걸 보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연기>를 떠올린다.
호숫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집 한 채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 연기가 없다면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시와 꽃은 우리 가까이 있다
빨리 읽지 말고, <꽃산행 꽃詩>를 베개 옆에 두고 잠들기 전에 천천히 읽는 거다. 모르는 꽃(식물)을 만나면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면 좋다. 시와 시인에 대한 정보도 함께 찾아보면 좋다. 더디 읽으면 어떤가. 지금은 겨울이고, 이 산 저 산, 이 들판 저 들판에 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으니 말이다. 겨우내 천천히 읽으며 봄을 기다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책을 다 읽고 덮을 즈음이면 어렴풋이 알게 된다. 진도, 울릉도, 백두산으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꽃이 지천으로 핀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시와 꽃은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 이굴기가 발품 팔아 쓴 책이 알려준 소박한 사실이다.
<꽃산행 꽃詩>를 다 읽었으니, 이굴기에게 '나도 이 정도는 안다' 하고 괜히 아는 척하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고정희는 언젠가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치자꽃이 언제 피는지 검색해 봤다. 향기가 참 좋다고 한다. 저 남도에서 꽃 소식이 들려오면 고정희 시집 한 권 들고, 해남 그녀의 생가를 찾아야겠다. 이제는 아주 조금 알겠다. 대단한 계획이나 거창한 꿈이 사람을 살게 하지 않는다. 때로는 시 한 편, 꽃 한 송이가 "일생을 버티게" 한다.
어느덧 내 나이 마흔. 여전히 시 30편을 외우지 못한다. 계획이 하나 생겼다. 봄이 오기 전에 시 30편 "입에 넣고 중얼거릴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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