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는 순간, 밀린 원고의 첫 부분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머리는 생각에 잠겨 있지만 방앗간의 벨트처럼 강력한 저작근은 어금니를 가동하여 혀 측면의 감각적인 놀림과 적절히 스며드는 침의 도움을 받아 부드럽게 익은 쌀알을 단맛이 나도록 잘게 으깬다. 형체 불명이 된 액상의 양식은 일방통행의 신호를 따라 연동 운동에 실려 식도를 내려간 뒤, 생물학자와 화학 분자식과 물리 교과서를 희롱하듯 난삽하면서도 기묘한 과정을 거쳐 변신하고는 혈액의 분자 캡슐에 탑승할 티켓을 획득한다. 세상의 이치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자양은 심장의 힘찬 격려에 고무되어 혈관을 타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간다. 신체의 주문서에 따라 자기를 스스로 배달하듯 달리는 추상의 존재를 우리는 에너지라 부른다. 그 힘의 대부분은 고심하는 두뇌가 사용한다.
음식이란 총칭의 물질이 인체라는 생화학적 기계 속에 들어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에너지라는 존재로 변환하는 그 자체를 한 면으로는 삶이라고 표현한다. 음식물이 입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이후의 과정은 멋진 자동 기계가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따라서 메뉴의 목록은 인간의 지대한 관심사 중의 하나다. 요리사와 레시피는 먹을 것의 선택을 위해 생긴 우아한 보조 수단이다. 그러다 보니 조리에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식자재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요리의 재료를 어떻게 생산하고 또 선택할 것이냐, 이 책 <살리는 사람 농부>(한살림, 2014년 10월 펴냄)는 거기에 관련되어 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는 음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음식의 재료는 시장에서 팔고, 재료의 생산은 농부가 한다. 그러한 체계는 단순하고, 따라서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형의 틀을 깨뜨릴 때 생기가 돋는 법이다. 익명의 농부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흙의 색깔과 대기의 맛에 가까운 농산물을 만들고 싶었다. 다단계의 유통 과정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려는 사람들끼리 먼저 나누고 싶었다. 그리하여 원주에서 사회운동을 하던 박재일이 1986년 12월 초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란 간판으로 쌀가게를 열었고, 그것이 출발점이었다.
농산물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혈안이 된 행위에 경고하는 방식으로 다른 영농법을 택했다. 잔류하는 독성을 피하기 위해 무농약 재배를 시도하고, 땅이 지치지 않도록 배려하여 유기농법을 권장했다. 시간에 지불한 정성의 가치는 내면으로 축적되는 것이어서, 줄어든 소출 탓에 손에 쥘 수 있는 동전의 무게는 가벼웠다. 그 허전함을 메우도록 유통 과정을 단축하여 소비자에게 직접 배달하도록 방법을 고안했다. 믿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식탁에 제공한다는 구상이었다. 따라서 생산자조합과 소비자조합의 이원적 구성이 한살림의 기본 구조가 됐다. 이 책은 한살림에 상품을 공급하는 생산자들 중 16인을 찾아 기록한 현장 인터뷰다. 따라서 한살림에 대한 설명은 그 가족들에게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한살림 바깥에 있는, 예를 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이익 극대화 유혹을 거부한 농부들
한살림은 식재료의 생산과 유통에 사상을 부여하고자 하는 공동체다. 그 사상의 대부분은 소박한 도덕 감정이다. 그 전체를 아우르는 조합이라는 울타리는 법적 개념인데, 주식회사나 유한회사 같은 법인보다 구성원의 결속이 더 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신념은 가지되,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 뜻은 의외로 중요하다.
프리츠 하버가 합성 비료를 만들어 냄으로써 어느 정도 식량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강력한 농약이 인간의 이기심에 방해가 되는 벌레를 신속하게 즉결 처분했다. 화학약품이 초래하는 부작용이 문제일 뿐이지,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이익은 실존적 행복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것은 세종에서 배를 키우며 유기농법을 고수하는 이병주 씨가 회고하는 박재일의 말에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다. "우리는 뭐든 우선은 감사하게 먹어야 해요. 농약 친 것도 먹고 우선은 남들과 어울려야 해요." 텔레비전에 나와 유명해진 고급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어느 요리사의 한마디도 일맥상통한다. "굶주린 사람이 혼자 돌아서서 먹는 컵라면도 훌륭한 음식입니다."
한살림은 모든 생산과 소비를 존중하되, 자기들만의 방식을 따로 지키며 가능한 삶의 하나임을 바깥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삶은 가치를 지닌다. 사람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생명의 끈으로 연결돼 있고, 그 생명을 유지시키는 에너지 공급원에 돈과 직결되지 않는 마음을 쏟아 넣는다는 자세가 바로 그 가치다. 그런 가치를 짠맛과 단맛을 줄여 먹기에 다소 심심한 과자를 씹듯이 음미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묘미다. 이 책을 쓴 저자 김성희의 성격이 그러하다. 흥분하지 않고, 격정이 있어도 자제하는 태도는 박원순이 사무처장을 하던 시절 김성희가 참여연대의 사무국장을 맡았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런 성품에서 나온 글이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파도치는 해변과는 거리가 먼, 잔잔한 호수면을 떠올리게 한다.
기우인지 모르나,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유기농 식품이 건강에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일상의 상식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우리의 수명이 회사의 정년처럼 고정되어 있다면, 특정한 음식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수량화하는 데 성공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체는 종합 체계를 훨씬 넘어선 복잡계의 대표적 조직이다.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방향에 따라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음식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자 김성희는 한살림 식품을 애용하지만, 나는 여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김성희가 나보다 건강하고 체력이 더 나은 것 같지는 않다. 짐작컨대, 마음만 다를 뿐이다. 김성희의 심성과 행동이 사실을 증명하는데, 그것도 아는 사람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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