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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미군의 '한국 어린이 사냥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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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미군의 '한국 어린이 사냥의 해'?

[문학예술 속의 반미] 이승만 정부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II. 이승만 정부 (1948-1960)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2. '기지촌 소설'의 등장과 '추한 미국인'

미 군정기의 정치 사회 현상을 다루면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소설 몇 편이 1949년 발표되었다. 미 군정 3년 동안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단편소설 10여 편을 발표한 채만식은 이승만 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미감정을 표출했다.

그는 <이상한 선생님>(1949)에서 해방 이전엔 친일에 앞장서다 해방 이후엔 친미로 돌변하는 교사를 비꼬고 있다. 앞에서 이미 얘기했듯 일제 식민통치 하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미 군정에서 전혀 처벌받지 않은 채 잽싸게 친미주의자들로 변신해 거듭 출세하는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1949년 썼지만 1950년 죽은 뒤 1972년 유가족에 의해 출판된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에서 채만식은 미 군정 아래서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해방 이전의 생활보다 나아진 게 전혀 없이 정치적 혼란과 절망만 가득한 해방 이후의 생활을 담고 있는 것이다. 두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젠장맞을! 이거 해방 잘못됐어, 잘못돼..... 어서 해방을 고쳐 해야지, 큰일났어!", "호랑이 한 마리를 내쫓았더니 사자하고 곰하고 두 놈이 앞마당 뒷마당에 들어앉은 꼴이 되었으니! 젠장맞을!"

이은휘는 <황영감> (1949)을 통해 미국에 편들기를 거부한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일본인들에게 봉사하다 해방 이후엔 미군 부대 청소부가 되어 축재를 꿈꾸는 아버지를 비판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젊은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장덕조는 <삼십년> (1949)에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소개하며 미국의 물질주의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 역시 미국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공된다고 생각하며 거부한다. 그리고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함으로써 한반도 평화가 깨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박용구는 1951년 한국전쟁 중 발표한 <고요한 밤>을 통해 한국인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폭력과 살인 등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의 '기지촌 소설'로 간주되는 이 소설은 성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미군의 총에 맞아 죽는 한 매춘부를 그리고 있다. 이로써 미군기지 주변의 '양공주'들이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참상을 폭로한다. 하나는 그들이 미군들에 의해 성병을 얻고, 다른 하나는 그 성병 때문에 다른 미군들에게 목숨까지 빼앗기는 기막힌 현실이다.

매춘부들에 대한 미군들의 총질은 1957년 발표된 송병수의 <쑈리 킴>에도 이어져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비판이 당분간 억제되었지만, 기지촌 소설을 통해 반미감정이 다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송병수는 이 단편소설로 <문학예술>지 신인상을 받아 문단에 오르게 되고, <쑈리 킴>은 1950년대 기지촌 소설의 대표작이 되었다. 참고로 제목 '쑈리 킴' (Shorty Kim)'은 '김가 성을 가진 꼬마'라는 뜻인데, 미국인들이 'shorty'의 's'를 세게 발음하고 't'를 약하게 소리 내면 '쑈리'처럼 들린다. 한국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미군 부대 주변에서 누나로 삼은 '양갈보'와 '양키들' 사이의 매매춘을 중계하는 10살 남짓한 주인공 쑈리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양키들이) 사추리 (성기)를 까 내놓고 그것을 좀 주물러 달라거나 흔들어 달라고 징글맞게 놀 때도 있지만 .....

사실 이런 곳에선 양키가 한국 사람 하나둘쯤 쏴 죽여도 고만이다. 요전에도 캡틴 캠프에 웬 한국 사람이 얼씬거리는 것을 보초가 쏴 죽였지만 구렁텅이에 쓱싹 해치우고는 누구 하나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젠 이 곳 양키 부대도 싫다. 아니, 무섭다. 생각해보면 양키들도 무섭다. 부르도크 같은 놈은 왕초보다 더 무섭고, 엠피는 교통순경보다 더 미웁다"

이와 관련하여, 2000년 <오마이뉴스>를 창립해 대표를 맡아온 오연호는 1950년대에만 미군 부대 주변에서 미군들의 총에 맞아 죽은 한국인들이 적어도 3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0년 "발로 찾은 주한미군 범죄 45년사"라는 부제가 붙은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라는 책에서 "미군의 총질은 ① 아무런 이유 없이, ②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③ 부대시설에 접근하였다고, ④ 부대 내 물건을 훔쳤다는 등의 이유로 자행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1957년은 주한미군 범죄자들에게는 '한국 어린이 사냥의 해'였다"며 "미군이 당긴 방아쇠의 과녁이 된 어린이 중에는 걸음마를 갓 배웠을 세 살 먹은 아기까지 포함되었다"고 밝힌다.

아마 1950년대 가장 충격적인 내용의 반미 소설은 1958년 발표된 전광용의 <해도초>일 것이다. 이는 10년 전인 1948년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독도 근처에서 40여척의 어선들이 '양키 비행기들'의 공습을 받아 두 명의 어부만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실제 <조선일보> 1948년 6월 11~18일 자에 따르면, 6월 8일 미군 B-29 폭격기들이 훈련하면서 독도 주위에서 고기잡이 하던 30여 척의 어선들을 공습해 16명의 어부가 죽고 10명이 다쳤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같은해 6월 17일 미군 당국이 일주일 이상 그 끔찍한 사건에 대해 확인해주지 않으면서 한국인들에게 그에 관해 완전하게 보고할 때까지 어떠한 판단도 하지 말도록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미군 당국은 사건 발생 8일 후에야 일본에서 공식 발표를 내놓았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B-29 폭격기들이 폭격 훈련을 하면서 조그만 어선들을 바위로 착각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반해 전광용은 <해도초>를 통해, 사건 당시 남한 신문들이 그랬듯, 어부들이 폭격기들에 그려진 미국 국기 표시를 육안으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폭격기들과 어선들의 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폭격이 실수가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참사에 대해 신영철 당시 중앙대 교수는 <조선일보>에 "동해여 말하라"는 제목의 조사 (弔詞)를 실었다. 아래에 몇 대목 옮긴다. 그 때는 <조선일보>도 신문 노릇을 제대로 했다는 점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동해여 말하라! 나의 사랑하는 동포 14명은 어찌하여 뉘 손으로 그 생명을 빼앗기었는가? 나의 동포는 무삼 (무슨) 죄 있기에 수천 년 조종 (祖宗)의 피로 지킨 내 나라의 바다 위에서 이방인의 총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가? .....

동해여 말하라! 나의 사랑하는 동포 14명과 우리의 배 11척은 어찌하여 뉘 손으로 그 생명을 빼앗기었는가? 뉘 생각했으리. '해방'되었다는 이 국토의 영해에서 난데없는 푸른 하늘의 불벼락을 맞고 이 나라의 근면한 인민이 쓰러질 줄이야! .....

동해여 말하라! 나의 사랑하는 동포를 죽인 비행국은 어느 나라의 짓이며 총을 겨눈 자의 국적은 어느 곳이냐! ..... 이 일이 어찌 자유의 용장 '워싱턴', 인도의 투사 '링컨'의 자손이 저지른 과오라 믿을 수 있느냐? 이 일이 어찌 파시스트 일제를 쳐부신 정의의 군대가 한 짓이라 믿을 수 있느냐? 이런 일은 일제 36년간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범선의 <오발탄> (1959)은 북쪽에 고향을 둔 한 가족의 비참한 생활을 통해 민족 분단의 비애를 잘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늙은 어머니는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 죽고 싶다"며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난 모르겠다. 암만해도 난 모르겠다. 삼팔선, 그래 거기에다 하늘에 꾹 닿도록 담을 쌓았단 말이냐 어쨌단 말이냐. 제 고장으로 제가 간다는데 그래 막는 놈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게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다면서 집을 잃어버려야 하는 현실은 북쪽에 고향을 둔 남쪽 사람들에겐 너무도 역설적이었다. 이렇게 한반도의 분단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죄로 작가 이범선은 그가 가르치던 고등학교에서 해직 당했다. 이 '문제' 소설은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1961년 같은 제목의 '명화'로 태어났다. 그러나 주인공의 늙은 어머니가 북쪽으로 가자는 게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적성'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엔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승만-박정희 반공 극우 정권에서는 분단의 슬픔이나 분노조차 제대로 표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봉화는 1959년 <추악한 미국인>이라는 번역서를 냈다. 레더러 (William Lederer)와 버딕 (Eugene Burdick)이 1958년 뉴욕에서 펴낸 <The Ugly American>을 번역해 출판한 것이었다. 사실에 바탕을 둔 그 소설 원본의 후기를 통해 저자들은 미국인들이 아시아 국가들에 '잘못된 원조'를 제공해왔다고 비판하며 아시아 국가에서 반미주의가 고조되는 것을 체험했다고 밝힌다. <동아일보>는 1959년 9월 5일 이 번역서를 소개하며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미국과 미국인들을 한 번 더 새롭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서평을 실었다. 반미 소설을 번역하는 자체가 반미주의의 표출이었던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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