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는 이제 누구에게나 알려진 익숙한 문제지만 여전히 멀리 떨어진 별나라 이야기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저탄소녹색성장’이 등장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기체가 정책대상이 되고 여기저기서 캠페인이 추진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사회든 그리고 누구의 삶이든 탄소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소주병마저 탄소를 품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환경재단의 ‘350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는데, 이는 온실기체의 농도를 350ppm으로 줄이자는 캠페인이다. 참이슬 병 뒷면을 보면 ‘35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실 350ppm은 국제적인 목표로 제시되곤 하는 450ppm이나 400ppm보다 높은 수준이고, 온실기체 배출 세계 7위인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 목표보다 야심차다.
영국의 극우 정치인 크리스토퍼 몽크턴 같은 기후변화 회의론자는 돌출행동으로 매스컴을 탈 뿐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는 2012년 도하 기후변화당사국총회의 공식 회의장에서 회의론을 펼치는 발언을 하다 총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출입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회의론이 등장했다. 유엔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가 국제기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전을 거듭하고 있고, 그 토대가 되는 협약과 의정서의 뼈대가 부실해 기후변화 대응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유엔기후변화기본협약과 교토의정서가 각각 1992년과 1997년에 채택되었고, 2008년부터 지금까지 주요 국가들이 의무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온실기체 감축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감축효과는 미흡하고 오히려 400ppm을 넘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교토의정서 2차 기간(2013~2020년)에도 이런 추세가 바뀔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의무감축을 통한 국제협력은 이론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에 대단히 효과적이지만,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국제무대라는 현실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국 내부의 입장과 전략에 따라, 그리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가 동맹들의 힘겨루기에 따라 국제협력의 틀이 변경돼왔다.
역사적으로 온실기체를 많이 배출한 국가들과 현재에 많이 배출하는 국가들에게 국제적 목표(예컨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온도 상승을 2도로 제한, 온실기체 농도는 450~480ppm으로 제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할당량을 부과해 의무적으로 감축하는 방식에서 각국이 자발적으로 목표를 수립하고 감축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변화를 맞고 있다. 의무감축을 거부한 미국과 자발적 감축을 주장해온 중국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인데, 마침 올해 미․중의 양자 합의가 결실을 봤다.
미국과 중국은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국이자 온실기체 배출국이다. 미국은 2025년까지 배출량을 2005년 대비 26~28% 감축한다고 발표했고, 중국은 2030년부터 배출량을 감소시켜나간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후변화 대응에 걸림돌로 지목되었던 두 나라의 양자간 합의가 다자간 합의체인 유엔기후변화당사국총회의 ‘포스트 2020 체제’의 협상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낙관하는 전망이 우세하다. 올해 뉴욕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정상회의에서 일정한 공감대도 형성했으니, 2015년 파리 기후변화총회(COP21)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중국이 핵발전을 엄청나게 늘리고 있는 문제나 정권교체로 인해 미국의 목표가 폐기되거나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넘어가자. 미국과 중국의 목표가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목표로 내세운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43~51%에 비해 약한 수준이다. 이것은 문제의 시작에 불과하다.
시간도 문제다. 곧 열릴 리마 기후변화총회(COP20, 12월 1일~12일)는 포스트 2020 체제를 위한 협상문 초안에 포함될 의제를 결정해야 하고, 2015년 실무급 회의에서 초안을 작성해야 한다. 파리총회는 그 초안을 놓고 최종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가 감축행동에 나서야 하는 만큼 2020 이전 체제보다 더 복잡하게 꼬일 수밖에 없다.
코펜하겐(COP15)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으라는 법도 없다. 완화와 적응, 재정, 기술개발과 이전, 역량형성, 행동과 지원에 관한 투명성 제고 등의 논의를 주도하는 조직인 더반 플랫폼(Durban Platform) 회의가 복잡한 셈법으로 지지부진하다. 협상의 뇌관은 자발적 감축 방식인 ‘각국의 자발적 기여(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INDCs)’이다.
현재 감축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국가들과 의무감축에서 이탈한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자발적 감축방식은 국제적 목표와 맞춰야 하는 지난한 조정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각국이 제시한 감축목표의 총합이 국제적 목표를 밑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반 플랫폼에서 INDCs 평가 및 목표 재조정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미국, 호주, 일본 등은 목표 조정은 각국의 선택사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EU 등은 사전평가 후 목표의 상향 등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INDCs의 범위에 감축 이외에 적응, 기술이전, 역량형성 등을 포함하는가도 쟁점이다.
선진국과 개도국은 2015년 3월까지 혹은 파리총회 이전에 INDCs을 제출해야 한다. 리마에서 파리로 가는 길은 과거 기후총회와 합의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셀프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오염물질을 많이 하는 나라들이 배째라 식으로 나오거나 오염 책임이 많은 나라들이 그만큼 투표권을 많이 행사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게 정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원점(1992년)으로 회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녹색기후기금(GCF)의 공식․비공식 회의도 마찬가지다.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재원조성과 관리와 집행 등 세부 쟁점에 대해 이견이 존재하고 있어 리마총회의 장애요소이다. 장애물은 또 있다. 총회의 의장을 맡은 페루 정부가 국제회의 준비 소홀과 협력 미흡으로 시민사회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다. 시민사회는 기후정의 진영과 함께 기후변화 민중회의(Peoples’ Summit on Climate Change)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페루 정부는 통상적으로 진행된 정부기구와 비정부기구 간의 거버넌스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 공식 회의의 주요 의제를 중재할만한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실제 페루는 반환경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영국 환경감시단체 글로벌 위트니스는 브라질, 온두라스, 필리핀에 이어 페루를 환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살해당하는 국가라고 지적한다. 이게 바로 마추픽추나 <꽃보다 청춘>에 감쳐진 페루의 현실이다. 페루로 떠난 ‘기후변화 여행’을 보라(관련 자료). 쿠스코는 ‘물 전쟁’을 겪고 있고, 각지에서 기후변화의 취약성이 나타나고 있다.
해외개발연구소와 오일체인지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G20 정부들은 화석연료 탐사․개발에 직간접적인 지원과 보조로 한 해 평균 880억 달러를 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기후총회가 어려움에 처한 진짜 이유가 아닐까. 유엔기후변화당사국총회의 미래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가 정면에서 직시해야 할 것은 이런 현실이 아닐까. 우리의 시간과 총회의 대표자들의 시간은 다르다. 이제 두려워 말고 현실의 문을 두드려보자.
2014년 12월 1일~12일, 페루 리마에서 제20차 유엔기후변화당사국총회(C0P20)이 열립니다. 포스트 2020이 결정되어야 하는 2015년 파리 총회를 앞둔 회의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지난 2008년 이래로 프레시안과 공동기획을 통해 유엔기후변화총회 현장의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번 리마에서 열리는 총회도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여느 언론보다 빠르고 정확한 현장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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