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제1비서가 황해남도 신천을 방문했다. 신천 지역은 6.25 전쟁 당시 미군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곳으로, 북한에서는 반미교육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김정은 제1비서는 이곳에서 미국에 대해 막말 수준의 비난을 쏟아냈다.
“미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인간살육을 도락(재미)으로 삼는 식인종이며 살인마”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침략의 원흉이자 흉물”, “살인귀”, “귀축(아귀와 짐승)같은 만행” 같은 직설적인 표현의 비난을 늘어놓았다. 말을 험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 북한이라지만, 최고지도자가 직접 이런 원색적인 말을 했다고 보도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제 서른 살에 불과한 김정은의 젊은 혈기도 물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평양 시민들을 동원해 반미 결의대회까지 조직한 것을 보면 김정은 제1비서가 미국에 대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억류 미국인 석방했지만 달라진 것 없는 미국에 불만
최근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김정은 제1비서의 이런 반응을 이해할 만도 하다. 북한은 10월 22일 억류 중이던 제프리 파울 씨를 풀어준 데 이어, 11월 8일에는 케네스 배 씨와 매튜 토드 밀러 씨도 전격 석방했다. 미국의 설명대로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억류 미국인 모두를 풀어준 것이다. 김정은 제1비서가 파울 석방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요청을 고려해 특별조치를 취했다”고 밝힌 것처럼 북한은 나름대로 미국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한 것이었다.
억류 미국인 석방을 위해 11월 7일 평양을 방문했던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은 방북 뒤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국가 인정이나 평화협정 같은 (북·미 관계의) 엄청난 돌파구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북한 지도부의 미국과의 대화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북한은 클래퍼에게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통과 과정에서도 기대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북한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과정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지도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조항과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는 조항을 빼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의 의중을 담은 쿠바의 수정안이 많은 표차로 부결된 것이다. 인권결의안 통과과정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볼 때,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미국의 태도에 불만이 높아졌을 것이다.
북미대화, 남북대화 당분간 어려울 듯
사실 북한이 억류 미국인들을 풀어줬다고 해서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핵과 장거리로켓, 인권 같은 북·미 간 주요 이슈에 변화가 없는 한 미국의 대북정책이 쉽게 바뀌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북한은 뭔가 변화를 기대했던 듯하다. 클래퍼의 방북 당시 북한이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북한이 지금의 국제정세를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미국을 맹비난하고 반미 군중대회까지 조직하고 있는 만큼, 당분간 북·미 대화가 진행되기는 어려워보인다. 북한은 당분간 ‘반미’를 통해 대내 결속을 도모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 같다.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3주기와 연초마다 진행되는 한미 군사훈련 등 시기적 여건도 대화 재개에는 유리하지 않다. 북·미 관계 뿐 아니라 남북관계도 당분간 대화의 계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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