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을 다각적으로 추진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일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이 과제를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경색된 남북관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다차원적인 접근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초 나는 이단 네 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지난 5년간 경색된 남북 당국 간 대화를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편 민간 기업들로 하여금 대북 교역을 활성화하고 경협을 추진케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 동안 수세적 입장에서 경원시해온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교류와 대화를 장려하기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7년간 파탄된 군사정전회담도 어떤 형태로든지 조속히 복원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피스메이커> 359쪽)
4월11일 정세현 통일부 차관과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를 수석대표로 하는 차관급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림으로써 근 4년 동안 닫혀 있던 당국 간 회담이 다시 열렸다. 북측에서 적십자사를 통해 비료 20만 톤 지원을 요청한 데 대해 그런 대규모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라야 가능하다고 응답함으로써 당국 간 회담이 재개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남측은 비료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시키는 '상호주의' 입장으로 나섰고 북측이 이에 반발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포용정책은 상호주의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라서 남한 수구세력이 포용정책을 비판할 때 단골로 들고 나오는 것이 상호주의였지만, 첫 접촉에서 남측이 상호주의를 고집한 것은 이산가족 상봉이 호소력이 큰 과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경험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회담이 결렬된 후부터 북측은 '햇볕 정책'에 대한 비난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잠수정에 의한 도발행위도 이때 일어난 일이다. 국내언론은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햇볕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시도했던 '상호주의 원칙'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결렬된 이번 회담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북측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가진 자로서 먼저 베풀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선공후득(先供後得)'의 지혜를 강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 남북대화가 다시 재개된 것은 이로부터 1년 후인 1999년 5월 남북 당국 간 비공개 접촉을 통해서이다. (<피스메이커> 361-362쪽)
경제교류, 민간교류와 군사정전회담 재개 등 다른 과제들을 위한 조치도 이어졌다. 4월에는 정부가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고, 9월에는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가 정부 지원 아래 발족했다. 그리고 군사정전회담을 파탄에 빠트렸던 김영삼 정부의 자존심 위주 정책을 현실적으로 수정해서 6월에 '장성급 회담' 형태로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은 포용정책의 산물이라기보다 현대그룹의 사업이었다. 10년 전 이미 노태우 정권의 비호 아래 북한 지도부의 승인을 받아놓고 있었음을 박철언의 회고 중 1989년 2월 초 북한에서 막 돌아온 정주영을 만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개발은 엄청난 역풍에 부닥쳐야 했다. 물론 9년 후인 1998년 11월에야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으나, 당초의 구상대로였다면 1989년 7월에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대북 경협도 10년은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향적인 대북 정책과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향한 북방 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판과 견제가 너무 심했다.(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권 57-58쪽)
정주영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북사업이 남북관계의 경색에 따라 지연되고 있다가 김대중 정권 출범 후에야 실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 동안 이 사업을 살려내려는 현대그룹의 노력이 치열했을 것은 분명하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김대중 정부의 경협정책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앞서가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후에 현대가 관련된 대북송금이 포용정책 비판의 빌미가 되는 것도 기업의 정책이 정부 정책을 앞서간 상황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로 볼 수 있다.
남북 경협의 '준비된 선수'인 현대그룹의 활약 외에는 1998년 내내 포용정책의 성과가 크게 나타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악재가 속출했고, 그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포용정책의 기조를 무너트리지 않은 것이 김대중 정부 첫 해 대북정책의 가장 큰 성과라 할 것이다.
가장 큰 악재는 8월31일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 1호' 미사일이었다. 북한은 이 발사로 평화적 목적의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궤도에 올렸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국제기구에도 발사를 예고하지 않았고 발사 4일 후에야 공식발표가 나왔기 때문에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북한은 오랫동안 군사기술로서 미사일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금도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이 장사정포인데, 소련의 카튜샤 로켓을 발전시킨 것이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때 헤즈볼라가 수천 발의 카튜샤 로켓을 이스라엘에 발사해서 43명의 사망자와 4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일이 있다. 그 후 미국인 이스라엘 거주자 30명이 북한을 상대로 1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했다. 헤즈볼라가 발사한 로켓의 핵심부품이 북한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스커드 미사일 역시 소련이 개발한 기술을 북한에서 발전시킨 무기다. 걸프전에서 부각된 스커드 미사일은 미국에 의지하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무기다. 이것을 필요로 하는 아랍국들이 북한의 가장 중요한 외화 획득원이 된 까닭이다.
로켓기술은 외화획득에 앞서 북한의 군사적 안보를 위한 절대적 자산이다. 1994년 6월의 위기에서 미국과 남한의 주전파를 좌절시킨 것이 바로 장사정포였다. 이 무렵의 한미연합사 회의 광경을 김종대는 <프레시안>의 '군사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비극' 연재에서 이렇게 그렸다. (☞관련 기사 : 전쟁 준비 미군, "반대하는 한국군 가만두지 않겠다")
이 당시 한국군의 걱정은 영변을 포격을 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며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가장 위협적인 것은 북한의 장사정포인데, 갱도 안에 있는 장사정포를 무력화하려면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북한 장사정포 중 170미리 포는 거리가 걸(멀?)어서 우리 포가 미치지 못하고 갱도 진지나 산의 뒤쪽에 있는 포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일일이 특수부대가 가서 제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개전 초 2~3일 이내에 우리 군사력의 37%가 손실되고 서울에서 100만 명 이상 사망한다는 것이 우리 측 결론이었다.
그런데 게리 럭(연합사령관)이나 프랭크스(연합사 작전참모)는 이런 한국군의 걱정을 무시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랜턴 장비를 부착한 미 7공군사령부의 F-16을 동원해서 북한 장사정포를 제압하는 방안이다. 당시 7공군에서는 27대의 F-16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성 부사령관과 당시 3군사령관인 윤용남(육사 19기) 대장이 이 방안을 "관철하라"고 당시 연합사 지상구성군 선임 장교로 가 있던 정경영(육사 33기)에게 지시했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것을 미국에 설득하지 못하면 서울 시민은 집단학살 된다. (…)
이 주장을 들은 7공군은 경악했다. 저공비행으로 방공망이 조밀한 북한 장사정포를 타격할 경우 그 생존확률은 50%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7공군이 "절대로 못한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커밍스 대령은 다시 불같이 화를 냈다.
아직 핵무기를 확보하지 못한 북한에게는 전쟁억지력의 핵심이 장사정포에 있었다. 50여 킬로미터 사거리를 가진 장사정포의 남한 수도권에 대한 위협이 걸프전에서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의 위협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컸던 것이다. 북한형 스커드 미사일인 사거리 500킬로미터 전후의 로동1호는 정밀성이 떨어지고 북한의 경제사정으로는 다량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장사정포의 직접 위협에 비해 먼 지역에 대한 위협은 훨씬 약했다.
1994년 제네바합의로 핵 사업에 제동이 걸린 북한이 억지력 확장을 위해 노력할 분야는 당연히 미사일이었다. 그 기술의 구입을 원하는 아랍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개발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1998년에 이르러 김정일이 후계를 완성하는 시점에서 그 동안의 성과를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대포동 1호를 발사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광명성 1호의 궤도 진입 성공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위성 자체보다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발사지점에서 155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남쪽 태평양상에 떨어진 추진체였다. 어떤 탄두라도 그 거리까지 보낼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 추진체가 65킬로미터 상공으로 지나갔다는 사실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로동미사일의 사거리가 1300킬로미터까지 늘어나 있었으므로 일본열도에 대한 위협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머리위로 날아간 데 대한 충격은 새로운 것이었다.
미국도 충격을 받았다. 몇 주일 전부터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제기되고 있던 차에 대륙간탄도탄(ICBM) 수준의 장거리미사일 발사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미국에서도 소동이 벌어졌다. 공화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정치 공세의 계기로 삼았다. 당시 워싱턴에서 대북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베트남전 이후 최악의 혼란 상황'이었다. 공화당은 대북 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했고, 1999년 회계연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지원 예산 전액을 삭감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지원 예산 3500만 달러는 결국 나중에 미 외교협회의 중재를 통해 살아났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정책 전반을 재검토할 대북 정책 조정관을 임명하라는 외교협회의 권고를 동시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윌리엄 페리 대북 정책 조정관이 임명되었다. 그가 임명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화당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연철 <냉전의 추억> 232-233쪽)
남한의 대북정책이 포용정책으로 바뀐 데 대한 북한의 직접 응답은 1998년 내내 없었다. 바로 이득이 되는 현대그룹의 사업에만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남한의 포용정책에 대한 북한의 신뢰는 꾸준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6월 15일 '연평해전'이 일어날 때 북한의 태도 변화가 분명히 확인된다. 북한 측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비교적 합리적인 자세를 지켰던 것이다.
신뢰가 신뢰를 낳는 것이다. 햇볕정책의 초기 실적이 부진한데도 신뢰를 잘 지키고 키울 수 있었던 출발점은 정책담당자 임동원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확고한 신뢰라고 생각된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한완상이 대북정책 담당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주화세력의 명망가로서 매우 큰 정치적 효용을 가진 인물이었는데도 1년을 버티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어쩌면 임동원이 아무 다른 정치적 효용성이 없는, 남북관계 발전 하나에만 매달린 인물이기 때문에 그 역할이 흔들리지 않은 면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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