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운 조합원은 지난 5월 18일 세월호 침묵 시위 '가만히 있으라' 행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돼 꼬박 하루 반 동안 유치장 신세를 졌습니다.(☞관련 기사 : "저도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연행됐네요. (ㅋ)") 길거리 공연 즉 '버스킹'이 취미인 그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곡을 직접 쓰고 길거리에서 여러 번 공연을 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제 일생일대의 사건"이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황 조합원은 "세월호 참사 이후 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황 조합원은 지난 14일 직원-소비자 조합원들과 함께 안산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에 다녀온 뒤 글을 써 보내주었습니다. 편집자.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지난달 18일 열린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일일호프의 수익금 중 일부를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위해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희생자 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넣을 USB를 마련한 뒤, 저는 이명선·서어리 기자, 그리고 안종길 조합원과 함께 합동 분향소 세월호 가족대책위 사무실에 방문했습니다.
이젠 날씨만큼이나 많이 썰렁해진 합동분향소 초입에 들어서니 마음 또한 시리더군요.
'그만 덮을까요? 다음 순서는 당신입니다!'
노랑 플래카드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올라오는 슬픈 감정에 휘말리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제 익숙할 법도 한 현장인데도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이명선 기자, 세월호 참사가 다 정리되고 안산분향소를 찾고 싶었다던 안종길 조합원, 곧 만날 동혁이 어머님을 인터뷰했던 서어리 기자…. 우린 제일 먼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합동분향소로 향했습니다.
방명록을 작성하고, 대형 브라운관에 희생자들 얼굴이 한 명씩 지나갔습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는 다음 일정 때문에 조급하게 돌아봤지만, 이번에야말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두 눈으로 꼽으며 겸허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세 번째 분향임에도, 올라오는 미안함과 정부를 향한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참사 후 100일이 지나서야 쓸 수 있었던 노래가 턴테이블에 올려져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지. 집으로 못 돌아올 걸 상상도 못 했어. 태어나 처음으로 가는 제주도행 비록 날씨는 구지고 안 좋았지만 우리들 마음까지 흐려질 순 없었는데. 선박 내 여러분들 가만히 있으라 안내방송 듣고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서 엄마가 보고 싶다. 내 동생 어떡하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가만 있었는데. 그림 그리는 예슬이 노래하는 보미 목사되고 싶다고 했던 차웅이 너희들의 꿈은 하늘에서 빛나고 빛난 별 보며 너희를 응원할께. 이제 내 눈가에 눈물이 되진 말아줘 안녕 안녕 안녕"(자작곡 <20140416>)
가사 속 인물인 박예슬, 박보미, 정차웅 학생의 얼굴이 제 눈 앞 영정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난 5월 18일, 광주 5.18 민주화 기념 공원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 제안자 용혜인 씨가 경찰들에 둘러싸여 울부짖는 걸 보고, 저는 바로 광화문으로 향했다.
"국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국민입니까?" 목이 터져라 외치는 물음에 용혜인 씨, 그리고 저를 비롯한 100여 명의 시민들은 '경찰서 연행'이란 대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루면 나갈 것이라던 기대와 달리 기어이 2일의 시간을 거의 채우고 풀려난 저는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을 나누는 '동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경찰서에 연행된 시기가 성년의 날과 맞물렸던 터라, 불가피하게 경찰서에서 성년을 맞이한 대학생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에게 쓴 페이스북 메시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유치장에서 성년을 맞이한 나의 아들아! 여러가지 핑계로 분노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길들여진 어른들을 대신해 차가운 유치장에서 이틀을 보내는구나.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 고 가르쳤고, 주위에 가지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며 관심을 가지란 말에 너는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였다. 벌써 멋진 어른으로서 한걸음을 잘 디딘 것 같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잘 정제되어서 훌륭한 언론인이 되거라. 불편한 잠자리지만 좋은 꿈꾸고 갇힌다는 불편도 알았으니 내일 자유롭고 기쁘게 보자꾸나. 다시 한 번 성년을 맞이한 것을 축하한다. 당당한 어른 초입에 선 **야!"
전 지금까지 '권리 위에 잠자는 자'였습니다.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자는 무감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이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뭐하며 살래?'에서 '어떻게 살래?'로 말입니다.
저는 지금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래?'에 대한 고민을 풀기 위해, 하늘로 수학여행 간 친구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제주도로 가는 중입니다. 분향소 앞에 섰던 그 마음,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 자문하면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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