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하다가 팀장님이 회사에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팀장님 '답정너' 같아요. 야근 시러요!!!!"
(답정너 :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사장님 손님 오신 줄도 모르고 월 마감 업무에 정신 팔려서 대처가 늦었더니 그걸로 아침부터 한소리 들었습니다ㅋㅋ 업무태만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죠.. 일을 '잘' 한다고 생각은 안 했고 적어도 '열심히'는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일로 모든 걸 부정당한 느낌이었어요.ㅠㅠ"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 그룹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일못유)'(☞바로 가기 :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푸념 글이 올라온다.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실수해서 점장에게 욕먹은 이야기, 면접에서 '또' 떨어진 이야기, 내일 당장 대학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는데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 능력 없는 상사한테 면박 받은 이야기….
여기 모인 조합원 대부분은 아르바이트생, 계약직 노동자, 말단 직원 등 불안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는 20~30대다. 이들은 일 못 하는 자신을 '일못', '일못테리안'이라며 자조적으로 부른다. '일못테리안'들이 경쟁하듯 올리는 웃기지만 뒷맛이 쓴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째 다 제 이야기 같아 '좋아요'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조합원들은 "가입해서 글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일못유는) 영혼의 안식처"라고 한다.
"'일못'은 너의 탓이 아니다"
일못테리안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한 '일못유'의 창시자는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여정훈 씨다. 여 씨는 12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일못유 탄생 비화를 밝혔다. 여 씨는 환경단체에서 잠시 일했을 당시 자신이 정말 일을 못한다는 사실을, 특히 사무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회의감을 느낄 때마다 페이스북 담벼락에 주저리주저리 글을 올렸고, 반응이 꽤 좋자 내친 김에 그룹 페이지를 만들었다.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불과 넉 달 만에 가입자 수가 2800명을 넘었다.
여 씨는 "장난삼아 만든 곳이지만, 일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다같이 고민해보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일못'을 전적으로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환경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면서,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런데 일을 못 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경험을 해요. 인격 모독을 당하고, 해고를 당하죠."
여 씨의 얘기대로, '일못유'에는 열악한 여건 탓에 생기는 문제가 제 탓으로 돌아오거나, 노동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들이 자주 올라온다.
"공공근로를 하고 있습니다. 음란물, 조건만남 게시글을 하루에 200~300개씩 봐요. 요즘 제 별명은 야동헌터, 혹은 음란마귀 퇴마사... 5명 뽑아야되는 자린데 3명밖에 없습니다. 저번 달엔 하루에 500~700개를 소화해야 했어요. 수위 높은 음란물을 몇백 건 보고 있을 때면 펑펑 울고 싶습니다. 이러니 자연스레 일을 회피하게 되고 속도가 느려져요 ㅜㅜ 기승전 일못."
"11월달 옛날 어떤 사람이 근로기준법을 지키자고 말하고 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그 일이 있은 다음 한참 후에 태어났지만, 저번에 일하던 카페에서 점장이랑 근로계약서 써달라, 주휴수당 달라, CCTV로 맨날맨날 지켜보다가 가게로 와서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지 말라, 8시간 일하다 배고파서 사온 과자 먹는 거 가지고 버릇없다 해고한 내 친구들을 다시 불러오라고 울면서 싸우다 일을 때려치웠어요."
그는 최근에 부당하게 해고당한 조합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입사 3개월 만에 해고를 당했대요. 회사에서는 자기더러 수습 직원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계약서가 근로계약이 아니라 용역계약이었던 거죠. 3개월간 일 시키고 일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해도 법적으로 문제없게끔. 기업들이 이렇게 고용 형태를 악용해서 사람을 써요. 정말로 일을 못해서 잘리는 게 아닌 거죠."
고(故)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몸을 불사른 지 44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같은 구호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아직 계급사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직장에서 상사는 직급 낮은 직원을 어린아이로 생각해요. 또 부모가 아이에게 벌을 주는 차원에서 용돈을 깎듯 임금을 깎습니다. 임금은 용돈이 아닌데도요. 임금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필요합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일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도 행복하다"
'일못유' 페이지에는 상단 고정 게시물이 있다. 지난 9월 말, 80대 노인이 지하철 전동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숨진 소식을 듣고 떠오른 단상을 정리한 여 씨의 글이다. "맨 뒤의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혹은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속도와 정확도에 대한 요구를 조금은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사고로 돌아가신 할머니가 알고 보니 한 다리 정도 건너면 아는 분이더라고요. 이 사고는 정시 출발에 대한 압박으로 생긴 일입니다. 만일 그 할머니 같은 '맨 뒤에 오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 지하철은 그때도 빨리 출발했을까요."
그는 '일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들도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속도와 완성도에 대한 압박이 심해질수록 일을 못 하는 사람도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일 잘하는 사람도 자신에게 일의 하중이 몰려 힘들 수밖에 없어요. 일을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사실은 모두 다 같은 구조 아래서 고통받는 거죠. 저는 사람들이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이 구조를 보았으면 좋겠어요."
"적성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없는 구조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적성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일못'이 되는 거죠."
또 다시 '구조' 얘기다. 구조를 탓하면 누군가는 '운동권이나 하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정치적인 메시지로 비치기도 쉽다. 그는 괘념치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일못유' 조합원들의 문제의식이 당연히 노동 이슈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일못유 조합원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이 달라질까.
"못 바꿀 것도 없죠. 엄혹했던 1970~1980년대에도 계속 사회를 변화시켜 왔잖아요. 못한다고 생각하면 끝이지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법 개정 운동이든 다른 조직적인 공동행동이든 우리가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봐요. 그리고 일 잘하는 사람은 소수고, 일 못하는 사람이 다수잖아요."
"'일못유' 가입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 받을까 걱정도…"
'일못유'는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지난 9일에는 오프라인 모임을 했다. 20여 명이 모여 자기 직장, 학교 생활에서 느끼는 좌절감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태워 없애자는 의미로 밀랍 초를 태웠다. 앞으로도 오프라인 모임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팟캐스트도 준비 중이다. 익명 '일못' 사연을 소개하거나, 일은 못해도 먹는 건 잘 먹자는 취지에서, '음성 먹방(먹는 방송)' 코너도 구상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고민거리도 생겼다. '일못'은 페이스북 계정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여 씨는 이곳에 올린 글로 누군가는 불이익을 받지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알바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잘린 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까진 이 페이지에 가입해서 불이익 받는 분이 없지만, 한 번은 같은 회사 선후배가 맞닥뜨린(?) 일이 있었어요. 훈훈하게 끝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 씨 본인은 '일못'이라지만, '일못유' 관리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페이지 관리자가 '일못'이 아니라 '일잘' 아니냐'는 의혹성 글도 많다. 그는 "오해"라며 "일이 아니니까 잘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손사래 치는 여 씨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금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에게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웃으며 "일하는 게 힘드니 별 것 안 하고 살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13일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좌절했을 수많은 수험생들에게 한 마디 부탁했다.
"당연히 좌절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앞으로 내가 더 잘하면 돼'라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 대신 나를 좌절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를 한 번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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