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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의 '봉고'대통령을 아시나요?"

4번째 방한한 봉고 대통령과 한국 외교사

지난 9일 방한한 엘하지 오마르 봉고 온딤바 가봉 대통령이 10일 노무현 대통령과 면담하고 오찬을 가졌다.

'봉고의 가봉 대통령이냐', '가봉의 봉고 대통령이냐'로 헷갈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봉고 대통령은 낯선 인물은 아니다.

지난 1975년 첫 방한 이후 4번째 방한 인 것.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노 대통령까지 만나며 한국 현대사를 섭렵하고 있는 봉고 대통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한국의 외교사의 여러 페이지를 넉넉히 메울 만 하다.

특히 1975년 봉고 대통령의 첫 방한과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첫 가봉 방문은 냉전시기 한국 외교의 희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경회루 리셉션에, 서울대 명예박사에, 자동차 이름도 헌정
▲ 1975년 봉고 대통령 방한 기념우표

아프리카 서부, 적도 남단에 위치한 가봉 공화국은 지난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1962년에는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했지만 1974년 북한과 도 외교관계를 시작했다.

신생 독립국들이 속속 유엔에 가입하고 비동맹 그룹이 친북노선을 노골화하던 무렵, 냉전 대결 외교의 첨병이던 한국은 가봉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치열한 외교전 끝에 한국 정부는 1975년 7월 가봉 공화국의 봉고 대통령을 국빈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위원장이고 각부 장관이 위원이 되는 '국빈영접 방한 준비위원회'까지 열렸다. 그리고 희극은 봉고 대통령이 입국한 김포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가봉이 어디 있는지 봉고가 누군지도 모르는 1400명의 정관계 인사들이 김포공항에 나와 영접했고 연도에는 수십 만 명의 시민들이 동원돼 힘차게 가봉국기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봉고 대통령의 방한 첫날 밤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주최로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김종필 국무총리 등 정부 3부 요인이 모두 참석한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까지 참석했을 정도.

다음 날 경희 의료원 시찰에 나선 봉고 대통령은 침술 치료를 받고 보약을 처방받는다. 평소 몸 챙기기에 지극 정성인 봉고 대통령을 위한 한국 정부의 배려였던 것. 정부는 심지어 한의사를 가봉에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기아자동차가 신형 승합차를 출시하면서 '봉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압권. 봉고 대통령에 앞서 방한했던 포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물론,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방한한 그 어떤 외국 정상도 이같은 환대를 경험하진 못했다.

방한 마지막 날 만찬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특히 유엔총회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에 대해 계속적으로 지지를 해주신 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서 본인의 심심한 경의와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고 말했다.

공전절후의 환대 이유가 이 문장에서 설명된 것. 당시 뜨거운 남북외교전에서 북한은 콩고를, 남한은 봉고를 아프리카 돌파구로 삼았던 것이다.

봉고 대통령은 3박 4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그해 7월 8일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떠났다가 도로 돌아와서 몇 시간을 더 머문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당시 '성접대설'과 맞물려 갖가지 뒷말을 낳았다.

또한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가봉을 방문했을 때는 가봉 군악대가 한국의 애국가가 아닌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외교적 가치는 여전?

봉고 대통령을 맞은 4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될 노 대통령은 10일, 청와대에서 오찬을 주최하며 "각하께서는 높은 경륜으로 가봉의 안정과 발전을 이끌고 계시다"고 말했다.

1967년부터 집권하고 있는데다가 지난 2005년 7년 임기를 다시 시작한 봉고 대통령의 '경륜'을 따를 사람이 드물어 보이긴 한다.

봉고 대통령은 올해 만해대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주최 측은 "봉고 온딤바 가봉 대통령은 1990년부터 다당제 민주헌법을 도입하고 공명선거를 통해 점진적인 민주화를 정착시킴으로써 정정이 불안정하고 쿠데타가 끊이지 않는 주변 국가들에 모범이 되고 있는 점을 인정 받았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찬 이전에 봉고 대통령과 환담을 가졌다.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 회담이 아닌 '환담'을 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공식 정상회담을 열 특별한 의제는 없고 아프간 문제, 남북정상회담 문제로 바쁘지만 짬을 냈다는 이야기다.

냉전기에는 비동맹 외교전 사이의 줄타기로, 탈냉전기에는 치열한 자원전쟁의 조정자로 봉고 대통령의 외교적 가치는 여전한 모양이다.
아프리카의 민주 지도자냐? 장기집권한 독재자에 불과하냐?
▲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 가봉 방문 기념우표, 전 전 대통령 기념우표는 대량발행으로 인해 아직도 수집자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1967년 당시 대통령이 사망해 32세의 나이로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봉고 대통령은 지난 2005년 16번째로 헌법을 고쳐 7년 임기를 새로 시작했다.

봉고 대통령은 당시 4명의 야당 후보를 물리치고 79.2%의 지지를 얻었지만 민주적 선거였는지에 대해선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올해 72세의 봉고 대통령이 2012년 이후에 대통령 자리를 내놓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봉고 대통령은 지난해 일찌감치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해놓고 있다.

만해상 주최 측은 봉고 대통령을 '아프리카의 민주 지도자'로 추켜세우고 있지만 보편적 평가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봉고 대통령은 각종 스캔들로 국제적 악명을 떨쳐왔다. 지난 1990년 이웃나라 콩고 대통령의 딸(당시 28세)와 재혼해 화제를 낳았던 그의 부인 숫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1992년에는 프랑스의 고급 콜걸들과 정기적으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폭로됐고 봉고 대통령은 이같은 사실을 보도한 자국 일간지 2개를 폐간시키며 외국 신문들의 국내 배포도 강제로 중단시켰다.

봉고 대통령은 지난 2004년에는 고아돕기 미녀 선발행사를 연다며 '미스 페루'를 초청했는데 이 행사 역시 '성매매' 스캔들로 이어지기도 했다.

1975년 방한 당시에도 "한국 정부의 '미인계'에 봉고 대통령이 기꺼이 넘어갔다"는 '카더라 통신'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물론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론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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