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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해방군? 소설 속 드러난 미군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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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해방군? 소설 속 드러난 미군의 민낯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2)

I.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2. 소설 속의 미군 통치

미군정 3년 동안 발표된 소설 가운데 미군 통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적어도 50편이 넘는다. 미국을 묘사하는데 단순히 부정적 언어를 사용한 소설도 많고, 미군정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미국의 가치와 문화를 거부하는 소설도 적지 않다. 주제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본다.

1) 분단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고통을 그리는 소설

1945년 8월 38선을 따라 한반도가 분단되었지만 초기엔 고향이나 가족을 찾아 남북을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계용묵의 <별을 헨다>(1946)와 김송의 <정임이>(1948)는 38선을 넘으며 미군의 총을 맞고 목숨을 잃거나 강간을 당하는 한인들을 보여준다. 김송의 <한탄>(1948)과 최태응의 <월경자>(1948)는 한반도를 분단해 점령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에 대해 한인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분단이 굳어지고 독립의 꿈이 좌절되면서 한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에 의혹과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1946년 발표된 정비석의 <귀향>, 채만식의 <역노>, 김영수의 <혈맥>, 1947년 발표된 김동리의 <지연기>, 1948년 발표된 이근영의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등에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비석은 <귀향>에서 손님들과 외국인들은 주인과 원주민들에게 전혀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미군들에게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채만식은 1948년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하고 있다. 박노갑은 1948년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무영은 1947년 <나라님전 상사리>를 통해 미국이 38선 이남을 식민지로 만들고 착취할 작정이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제기한다.

김영수는 <혈맥>에서 아마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크게 왜곡된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에 관해 잘 묘사하고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좌익 학생과 그에 반대하는 우익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좌익 아들은 '신탁통치'라는 말이 잘못 번역된 것이라며, 그 협정의 취지는 연합국들이 민주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이 학생은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며 우익 테러분자들의 습격을 당한다.

사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들이 합의한 내용은 한반도의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소 공동위원회와 조선의 임시 민주정부를 통해 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계획했다. 소설의 주인공 좌익 학생이 주장한 대로 민주 자치정부의 발전과 조선 민족의 독립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탁통치'라는 말에 초점을 맞춘 왜곡된 보도가 퍼지면서 한인들의 분노와 폭력이 고조되었다. 미국 국기를 찢기도 했다. 김구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민중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신탁통치에 저항하자고 촉구했다. 미군정에 대항하는 총파업이 벌어지고 공장은 폐쇄되었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한인들이 이렇게 완강하게 저항하자, 미군정은 잽싸게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것처럼 선전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신탁통치를 구상해오면서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조선의 독립을 불러올 가장 적합한 구조라고 믿었지만. 이에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 신문들은 일제히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원하는 반면 소련이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보도하며 소련에게만 모든 비난을 퍼부었다.

실제로는 소련이 신탁통치보다 조선의 즉시 독립을 선호했다. 미국은 다음과 같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제안했다. 1943년 3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한 이든 (Anthony Eden) 영국 외상에게 조선을 국제적 신탁통치 아래 두자고 제안했다. 1943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만난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조선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꾸리고 유지할 능력이 아직 없으므로 40년간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동의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필리핀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준비하는 데 약 50년이 걸린 경험에 비추어 조선 사람들은 적어도 20~30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대응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국무장관은 조선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해보고 5년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소련 외무상은 연장 없이 한 번만 실시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소련의 <타스(Tass)> 통신은 미군정이 "소련에 반대하는 선전선동을 용인하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항의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미군정 통제 아래 있는 조선 신문들이 "부정확하고 악랄한 정보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타스>의 보도와 주장에 대해 그 무렵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신문들은 그대로 보도했지만,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 신문들은 눈감고 있었다.

미군정 공보부가 1946년 4월 서울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60%의 응답자가 소련이 실제로 신탁통치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원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겨우 6%였다. 이에 따라, 커밍스 (Bruce Cumings)가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지적했듯,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에 대한 왜곡 보도 때문에 38선 이남에서 반공 및 반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친일 극우 세력이 최초로 그들의 정책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2) 친일파를 고용하는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소설

해방 이후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를 없애는 일은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이무영의 <굉장소전>(1946), 계용묵의 <바람은 그냥 불고>(1947), 엄흥섭의 <발전>(1947) 등은 민중의 염원과 달리 친일 부역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채만식은 <맹순사>(1946)에서 그들이 처벌받기는커녕 미군정에 다시 고용되는 기막힌 현실을 드러낸다. 전명선은 <방아쇠>(1947)를 통해 그들이 승진까지 하는 분통 터질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미군정은 일본 관리들과 한인 부역자들을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한반도 남쪽에 일본의 식민통치 구조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특히 일본의 포악한 관료, 경찰, 군대 등을 온존시킨 것은 조선 민중에게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인사 정책은 북쪽에서 펼쳐지는 정책과 정반대였다.

소련 군부는 조선인민위원회와 공조해 일본 관리들을 체포하고 구금했으며, 한인 부역자들도 지속적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야말로, 매큔 (George McCune)이 1946년 지적한 대로, 한인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일제하의 친일파는 미군정 아래서 친미파가 되고, 누구든지 미군정에 편들면 쉽게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7년 발표된 김일안의 <뺨>, 1948년 발표된 박계주의 <예술가 K씨>, 이근영의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전홍준의 <준동>, 최태응의 <월경자> 등은 이렇게 불공정한 미군들을 묘사하고 있다. 채만식은 1946년 <미스터 방>에서 한인 통역자들을 통한 미군정 통치의 부정적 영향을 잘 풍자하고 있다. 내용이 재미있어 대강 소개한다.

"해여지고 (닳고) 고린내 나는 구두짝 꼬매어 주고 징 박아 주고 닦아 주고" 하던 '꼬삐투리 삼복이'가 길거리에서 어찌 하다 미군 소위를 만나 통역을 맡게 되어 '미스터 방'이 되었다. "거진 매일같이 미스터 방은 S소위를 낮에는 거리의 구경으로 밤이면 계집 있는 술집으로 인도하였다" 경회루를 구경하면서 S소위가 무슨 건물이냐고 묻기에 미스터 방이 "킹 듀링크 와인 앤드 딴스 앤드 씽 위드 땐써"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기생 데리고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하든 집"이란 뜻이었다.

이런 식으로 S소위에게 조선을 소개한 공로가 여러 가지로 많아 통역이 된 지 사흘 후에 크고 호화스런 저택을 받았다. 그리고 식모를 두고, 침모도 두고, 손님 부림할 계집아이까지 두었다. 이런 그에게 줄을 대려고 "하루에도 방 선생을 찾는 이가 여러 패씩 있었다. 그들의 대개는 자동차를 타고 오고 인력거짜리도 흔치 않았다. 그렇게 찾아오는 그들은 결단코 빈손으로 오는 법이 드물었다. 좋은 양과자 상자 밑바닥에는 으례껀 따로히 뿌듯한 봉투가 들었곤 하였다"

물론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든 양심과 양식을 저버리지 않는 지식인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염상섭의 <양과자 갑>(1947)과 김만선의 <귀국자>(1948)는 미군정에 우호적이거나 미국 관리들에게 협조하기를 꺼려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3) 농민들의 좌절을 묘사하는 소설

해방 직후 남쪽 인구의 80%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그 중 거의 80%가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대다수 민중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 토지개혁이었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채만식의 <논 이야기>(1946)는 그 무렵 농민들의 좌절과 비애를 풍자적으로 잘 묘사한 걸작이다. 일본인들과 조선 토지를 수탈하던 동양척식회사가 쫓겨 갔는데도 자신의 토지를 갖지 못하는 농민이 절망의 구렁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해방이 농민에겐 아무 쓸모도 없다는 한탄을 자아내도록 이끈다. 몇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독립이 되기로서니.....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남의 세토 (貰土: 소작) 얻어, 비지땀 흘려 가면서 일 년 농사 지어, 절반도 넘는 도지 (賭地: 소작료) 물고, 나머지로 굶으며 먹으며 연명이나 하여 가기는 독립이 되거나 말거나 매양 일반일 터이었다..... 나라가 다 무어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이번엔, 일(본)인이 내놓구 가는 내 땅을 저희가 팔아먹으려구 들어? 그게 나라야?..... 일 없네, 난 오늘버틈 (부터)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애길 삼심육 년두 나라 없이 살아왔을려드냐.....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할 땅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야?.....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

1946년 3월 남쪽 민중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맛보게 되었다. 38선 이북에서는 조선인민위원회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 것이다. 이에, 커밍스가 1981년 지적하듯, 그 무렵 남쪽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데모는 대부분 북쪽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황순원의 <황소들>(1946), 최정희의 <풍류 잡히는 마을>(1947), 안회남의 <농민의 비애>(1948) 등은 높은 소작료와 미군정의 곡물수집 정책에 따른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담고 있다. 이근영의 <고구마>(1946)와 홍구의 <뒷골 방천 사람들>(1947)은 해방이 되었는데도 삶이 개선되지 않자 미군정에 항의하며 지주들과 맞서기 시작하는 농민들의 변화를 묘사한다. 그리고 1947년 발표된 김현구의 <산풍>과 박찬모의 <어머니>는 이러한 농민들의 좌절과 분노가 1946년 가을 이른바 '10월 항쟁'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미군정의 곡물수집 정책과 가파르게 오르는 식량 가격은 남쪽 민중을 1946년 가을 파업과 항쟁으로 이끌었다. 1945년 10월 도입된 미군정의 '미곡 (쌀) 자유시장' 정책이 실패한 뒤 부활된 강제 식량 공출은 흔히 일제에 부역했던 경험 있는 경찰에 의해 집행되었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면, "38선 이남에서 미국이 식량 공출을 위한 식민통치 기구를 부활시킨 것"과 "1946년 봄 38선 이북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미군정은 쌀 배급량을 일본이 전쟁 중에 허용했던 양의 절반으로 줄였기에 쌀 생산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4)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여주는 소설

노동 소설은 미군정의 노동 정책에 대해 좌절하고 분개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그리고 있다. 이동규는 <오빠와 애인>(1945) 및 <소춘>(1946)에서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공장을 관리하려던 한인 노동자들의 희망이 공장을 사유화하려는 미군정 정책에 의해 물거품이 되자 불만을 터뜨리며 파업을 벌이는 사건을 다룬다. 김영석은 1946년 발표한 <폭풍>을 통해 미군정이 후원하는 <대한독립 촉성 노동총연맹>에 대항하여 민주적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투쟁을 보여준다. 역시 1946년 발표한 그의 다른 소설 <전차 운전수>는 노동자들의 민주적 노동조합을 막기 위해 책략을 쓰는 '해방자라는 양가죽 뒤에 숨은 늑대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이른바 9월의 총파업 전야를 그리고 있다. 1947년 발표된 강형구의 <연락원>과 전명선의 <방아쇠>는 노동자들의 불만과 원한이 폭발된 1946년 9월의 총파업을 각색한 소설이다.

실제로 남쪽 전역에 걸쳐 다양한 노동조합 대표들은 1945년 11월 <전평>이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를 조직했다. 이는 1946년 중반까지 38선 이남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노동조직으로 모든 산업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탄압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공장에 수백 명의 한인 관리자들을 임명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매큔이 1950년 보고했듯, 일본인들이 고용했던 전직 고위 종업원들이었다.

홍효민을 비롯한 문학평론가들은 작가들에게 "사회주의적 현실주의와 혁명적 낭만주의"에 바탕을 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고취하라고 촉구했다. 특히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 소속 좌익 작가들은 한인들의 절대적 다수인 '농민과 노동자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결연하게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하층 계급을 착취하는 상층 계급을 후원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농민과 노동자 계급이 지주와 관리인 계급에 반대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5) 저속한 미국 문화를 거부하는 소설

많은 작가들은 미국 문화를 거부하고 그게 한인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비판했다. 특히 한인들을 상대로 한 미군들의 저속한 성적(性的) 행위는 작가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채만식은 <역노>(1946)에서 한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오만함과 인종차별을 보여준다. 김동리는 <지연기>(1947)를 통해 러시아군인들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미군들은 한인들을 경멸한다고 생각한다. 이봉구는 <뿌라운과 시계>(1948)에서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차별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

참고로 미군정 공보처가 1946년 4월 서울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40% 남짓한 응답자들은 미국인들이 한인들을 경멸한다고 생각했지만, 39%의 응답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김동리가 <지연기>에서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16%의 응답자만 미국인들이 소련인들보다 한인들을 더 경멸한다고 생각한 반면 68%의 응답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일안은 <뺨>(1945)에서 미국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저속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1947년 발표된 염상섭의 <양과자 갑>이나 1948년 발표된 채만식의 <낙조>는 한인들이 미국인들의 도덕적 타락에 불쾌해하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미군들과 한인 매춘부들의 성적 방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최정희는 <풍류 잡히는 마을>(1947)에서 한인 여성이 미군들에게 강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도 그리고 있다. 한 대목 소개한다.

"그들은 그보다도 밤이면 술집 갈보를 노리고 달려드는 미국 병정이 더 걱정스럽고 무서웠다..... 미군들은 자동차 안에서 갈보를 보고 손을 내밀어 흔들며 '헬로오'를 연발하고 밤이면 자동차에 조선인 통역관을 하나씩 싣고 내어 달렸다..... 한번은 미군들의 지프가 꽤 깊은 진흙 구렁텅이에 빠졌다. 미군들은 그것을 끌어 올릴 수가 없어서 집집마다 들어가서 이불 속에 벌벌 떠는 마을 사람들을 끌고 나왔다."

실제로 <동아일보>는 미군들이 한 한인 여인을 집단으로 강간한 사건을 1946년 3월 13일 처음으로 보도했다. 1947년 1월 미군 네 명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여인 세 명을 겁탈했는데, 이 가운데 두 명은 젖먹이를 데리고 있는 가정주부였다. 이에 대해 한인들은 범죄자들을 최고형으로 처벌하라는 여론을 조성했지만, 미군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비슷한 때인 1947년 1월 인천에서도 미군 헌병들이 한 여인을 집단으로 강간했다. 1948년 3월엔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미군 두 명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성행위를 거부하는 15세 소년 두 명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한 소년은 죽었고, 다른 소년은 크게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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