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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물길처럼 도도하다, 충주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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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한강 물길처럼 도도하다, 충주고을

11월 고을학교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3강으로, 백두대간의 장쾌한 산줄기와 남한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감싸 안고 있는 충절의 고장, 충주(忠州)고을로 찾아갑니다. 충청북도 충주고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분지형(盆地形) 고을로서 계명산(鷄鳴山)과 남산(南山. 금봉산) 그리고 대림산(大林山)이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들 산 너머로는 남한강(南漢江)과 달천강(達川江)이 휘돌아 흐르는데 계명산 북쪽으로는 단양과 제천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대림산 남쪽으로는 달천강이 충주시내를 감싸고 흐르며 자연부락은 이들 산하(山河)에 기대어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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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가 세운 중원탑평리7층석탑(중앙탑) Ⓒ충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3강은 11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북충주IC→남한강(목계나루/가흥창터)→충주고구려비전시관/중앙탑→탄금대/탄금정→관아공원(축성사적비/청녕헌/제금당/산고수청각)→점심식사 겸 뒤풀이→팔봉서원(15:00)→미륵대원지/하늘재→괴산수안보IC→서울의 순입니다.

▲충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3강 답사지인 충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 연봉과 도도한 남한강이 감싸다

충주의 산줄기는 읍치구역의 중앙으로 계명산, 남산, 대림산의 낮은 산줄기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박달재로부터 천등산(天登山), 인등산(人登山), 지등산(地登山)이 충주호까지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월악산(月嶽山)과 포암산(布巖山)의 산세가 높이 솟아있고 서쪽으로는 오갑산(梧甲山), 국망산(國望山), 보련산(寶蓮山)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주흘산(主屹山), 조령산(鳥嶺山), 속리산(俗離山) 등 백두대간의 장쾌한 연봉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물줄기는 크게 남한강 본류 수계와 큰 지류인 달천강 수계로 나누어지는데 남한강 본류 수계는 북동쪽의 원주와 제천에서 흘러오는 제천천(堤川川)과, 남동쪽의 수안보면 미륵리에서 흘러오는 동달천(東達川)이 충주호로 합류합니다. 달천강 수계는 동쪽으로는 석문천(石門川), 오주천(五洲川), 오가천(五佳川)이 수안보와 살미면을 관류하여 수주팔봉(水周八峯)에서 달천강과 합류하고 서쪽으로는 충주에서 가장 넓은 들인 주덕평야(周德平野)를 형성하는 요도천(堯渡川)이 수레의산[修理山]과 부용산(芙蓉山) 일대에서 발원하여 달천강으로 유입됩니다.

충주의 주산(主山)은 계명산이고 안산(案山)은 대림산입니다. 외부와의 소통 방향은 서쪽으로 달천강이 남북으로 흐르다 남한강과 합수된 다음 계속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달천강에 놓인 나루를 통해 북쪽으로 나가기도 하고 서쪽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서쪽의 달천강과 남한강이 자연스런 해자(垓字)를 형성하고 동, 남, 북의 높은 산이 자연스럽게 성채(城砦)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충주를 포함한 중원지방(中原地方)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산성(山城)이 많은 이유는 이 지역이 한반도의 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로부터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강을 따라 발달된 수로(水路)와 백두대간의 남북을 연결하는 육로(陸路)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원(中原)이란 명칭은 신라 경덕왕이 충주지역에 두었던 5소경(五小京)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에서 연유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왕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였다.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충주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충주지방에서 확인된 산성(山城)은 한훤령산성, 충주산성, 충주영액, 용관동산성, 문주리산성, 보련산성, 봉현성, 장미산성, 견학리토성, 탄금대토성 등으로, 이들 산성은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연결하는 계립령로(鷄立嶺路)의 개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립령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156년(신라 아달라왕 3)에 개척되었을 만큼 일찍부터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되었습니다.

▲우륵이 조국인 가야를 그리며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 남한강과 달천강의 합수지점이다. Ⓒ충주시

백두대간 넘는 중요 교통로, 계립령

백두대간이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구분하는 분수령으로 양 지역 간의 교류에 장애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주변 산지에 비하여 현저히 낮은 해발 530m의 계립령은 자연적인 안부(鞍部)를 형성하고 있어 조령(鳥嶺)이나 죽령(竹嶺)보다 높이가 현저히 낮고 평탄할 뿐만 아니라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에 해당하므로 중요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남진하기 이전의 충주 지역은 마한소국(馬韓小國)의 영향 하에 있었고 이후 백제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원성을 설치하고 신라 영토인 영남지방으로의 진출을 꾀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으려는 신라와 백두대간을 넘으려는 고구려 간의 진퇴는 거듭되었는데 그러한 역사의 흔적이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국보 제205호)와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의 친선관계 그리고 양국 관계가 악화된 후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했던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한강 상류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이자 남진의 거점인 충주지역에 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당시 충주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긴박한 상황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삼국시대 중원지방은 주요 교통로이자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었던 곳으로 도시 기반시설이 확보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고대국가의 가장 중요한 경제자원인 철(鐵)이 생산되는 곳이었으므로 신라는 한강 유역 진출 이후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지배를 꾀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에는 1255년(고종 24) 몽고병이 대원령, 즉 계립령을 넘어 충주에서 고려군 1,000여 명을 격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전히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계립령 남쪽으로 조령(鳥嶺. 문경새재)이 개척되어 영남대로(嶺南大路)가 열리면서 충주 지역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충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방에는 여러 산성이 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충주는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가는 사람들이 길을 달리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경상좌도로 가는 사람은 죽령(竹嶺)을 넘어 순흥(順興), 안동(安東)고을로 향하고 우도로 가는 사람은 조령(鳥嶺)을 넘어 상주(尙州), 선산(善山)고을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주의 성곽(城郭)은 기능상으로는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으로 구분되며 충주읍성을 제외하면 모두가 산성이고 축조방법으로는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으로 구분되며 탄금대토성과 견학리토성 외에는 모두 석성입니다. 시기적으로는 탄금대토성이 가장 빠르며 삼국시대의 장미산성, 남산성, 용관동산성, 후삼국시대의 견학리토성,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까지의 대림산성과 보련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충주에 위치한 한훤령산성은 계립령 서쪽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축조되었는데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신라가 고구려 세력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충주시의 남쪽에 위치하는 충주산성, 충주영액, 대림산성 등은 충주시의 남동쪽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계명산, 남산, 대림산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습니다.

삼국의 각축장이 남긴 산성 유적

이들 산성은 남북 방향을 모두 방어할 수 있지만 주로 충주 방면에서 계립령이나 죽령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며 이밖에 이류면에 위치한 견학리토성,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탄금대토성, 가금면의 장미산성, 노은면의 보련산성 등이 있습니다.

충주의 성곽은 특히 5~6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성곽 축조와 운영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고려시대 대몽항쟁(對蒙抗爭),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의병운동, 현대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봉수(烽燧)는 30여 리마다 횃불과 연기를 올려 국방상 중요한 전신 역할을 수행한 성곽시설로 위치와 역할에 따라 한양(漢陽)의 목멱산(木覓山)에 설치된 경봉수(京烽燧), 해안선을 따라 설치된 연안봉수, 내륙 깊숙이 설치된 내지봉수(內地烽燧)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조선시대의 봉수망은 평안도를 향한 연안봉수와 내지봉수, 함경도를 향한 내지봉수, 전라도를 향한 연안봉수, 경상도를 향한 내지봉수의 5개의 직봉(直烽)노선과 직봉에 소속된 간봉(間烽)노선이 있었습니다. 충주는 경상도 동래에서 출발한 내지봉수인 제2거에 속하며 충주에는 있는 봉수는 직봉노선 상에는 심항산봉수, 마산봉수, 망이산봉수, 간봉노선 상에는 마골재봉수, 주정산봉수, 대림산봉수가 있었으며 이 중 마산봉수는 직봉노선과 간봉노선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역(驛)과 함께 원(院)은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관리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공공 시설물입니다. 원(院)은 역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운영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사찰과 결합되기도 하였는데 조선시대 전기에는 대로, 중로, 소로에 1,310개소가 설치되어 공무 수행자의 숙식은 물론 기로연(耆老宴) 및 빈민 구제활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쇠락하였고 그 기능을 지방 관아나 역에서 담당하였다가 통신체제인 봉수(烽燧)가 쇠퇴함에 따라 파발(擺撥)이 역(驛)과 결합한 역참(驛站)이 대부분의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원의 기능은 점차 민간의 주막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충주지방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원과 역도 발달하였습니다. 연원역지(連原驛址)는 연수동에 있는 역 터로서 충주 지역의 14개 역을 관할하였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역참(驛站) 유적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역참제도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가흥역지(可興驛址)는 가금면 가흥리에 있는 역 터로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연원역(連原驛)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충주 지역에서 운용되던 연원역, 단월역(丹月驛), 용안역(龍安驛), 안부역(安富驛) 등 다른 역에 비해 그 규모가 조금 작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흥역은 고려시대에 참역(站驛)으로 정비된 이후 조선 세조 때에는 주변에 가흥창(可興倉)이 설치되었는데 가흥창은 원래 금천면(현 가금면) 지역의 금천강 서쪽 기슭에 있던 고려시대 덕흥창(德興倉)이 옮겨온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가흥역에서 동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쭌

교통의 요충지여서 역(驛)과 원(院)도 발달

단월역지(丹月驛址)는 단월동 유주막 마을에 있는 역 터로서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 단월부곡(丹月部曲)이 있던 곳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장군이 이끄는 8,000명의 군사가 충주 탄금대에서 일전을 치르기 전 이곳에 진을 쳤었고 단월역 남쪽에 정지상(鄭知常)과 서거정(徐居正)이 시를 짓기도 한 계월루(溪月樓)가 있었다고 합니다.

안부역(安富驛)은 수안보면 안보리 음지말에 있는 역 터로서 조선시대에는 연원도(連原道)에 속한 14개 역 중 하나였습니다. 안부역이 있었던 안보리는 서울과 충청도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중요 길목으로서 남쪽으로는 소조령과 조령을 넘어 문경으로 통하고 북쪽으로는 수안보를 지나 충청감영이 있던 충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안부역 큰 길가에 온천(수안보온천)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음지말 마을회관 한쪽에 있는 석비(石碑) 중에 ‘안부역수(安富驛守)’라는 비문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이 안부역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도원지(慕道院址)는 신니면 모남리에 있는 원 터로 <대동지지(大東地志)> 정리고(程里考)에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에는 천곡에서 10리 간격으로 모노원(毛老院)이 있는데 곧 모도원(慕道院)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는 모도원(慕陶院)으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원역지((龍院驛址)는 신니면 용원리 외룡마을에 있던 역 터로 용안(用安)역, 용안(龍安)역, 용원역 등으로도 불렀으며 고려시대 이후 충주에서 한양 갈 때는 이 역을 통과해야만 하였습니다. 용원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與地圖書)> 등의 기록에는 각각 당시 충주목, 충원현에 운영되던 4개 역원의 하나로 기록된 만큼 원 터로서 중요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충주에서 장호원 방면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 상에 운영된 역으로 고려시대 창건된 숭선사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충주 지역은 초기에 마한연맹체(馬韓聯盟體)에 속했다가 백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는데 삼국이 충주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 때문에 백제,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두루 받아야 했습니다. 삼국의 충주 지역 쟁탈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의 남진정책으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충주, 제천, 단양, 영춘 등지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수도(首都) 다음 가는 도시로 승격시켜 남한강 유역 일대의 경영과 신라 정벌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면서 고구려 남진정책의 성공을 기리는 척경적(拓境的) 의미를 지닌 중원고구려비를 이곳에 건립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영토가 된 충주는 70여 년 후 신라가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던 548년(진흥왕 9)부터 고구려로부터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탈취한 551년 사이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는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충주가 신라의 지배에 들자 진흥왕은 친히 국원(國原)을 순행하고 계속 북진하여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6군을 탈취한 뒤, 555년에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세우고 마침내 함경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삼국통일 후 충주는 영토의 중심에 위치한 명실상부한 부도(府都)로서 정치, 군사,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고, 673년(문무왕 13)에는 국원소경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하였습니다.

통일신라 민심 안정 위해 중앙탑 세워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중앙탑)을 건립한 목적은 9세기에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등장한 지방 호족세력의 반 신라적 민심을 회유하고 불력(佛力)에 의탁해 신라의 안정을 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는 끝내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 유긍달(劉兢達)은 900년(효공왕 4)에 지금의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청길(淸吉), 신훤(莘萱)의 세력을 평정할 때 왕건과 인연을 맺은 후 왕건과 제휴하여 고려의 건국을 도왔습니다.

황제에 오른 왕건은 유긍달의 딸을 셋째 왕비[神明順成太后]로 맞아들여 두 왕자(정종, 광종)를 낳았으며 광종은 어머니가 죽자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충주에 숭선사(崇善寺)를 창건할 만큼 충주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렇듯 충주 유씨 유긍달 등 중원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과 제휴한 것은 후삼국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지역의 명칭이 중원(中原)에서 충주(忠州)로 개칭되었고 특히 주목을 끄는 변화는 충주가 국내 분쟁의 거점 지역에서 벗어나고 거란, 홍건적, 몽고, 왜구 등의 이민족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충절의 고장(忠州)’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1231년 몽고 제1차 침입 때 충주 지역 노비 출신 지광수는 노비와 잡류별초를 이끌고 몽고군을 격퇴하였고 1253년 몽고 5차 침입 때 70여 일간 충주산성(현 대림산성)에서 충주민의 항전은 몽고군의 남진을 완전히 차단시켜 승전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승리에 대한 공을 인정하여 전쟁에 참여한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관노비에게도 군공에 따라 벼슬을 주었으며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다시 승격시켰습니다.

1254년 철제도구의 생산지인 다인철소(이류면)의 거주민의 대몽항전도 공이 커서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소(所)를 익안현으로 승격시켰으며 이외에도 월악산 전투(1256), 충주 별초군의 제천 박달현 전투 등 대몽항전에서 10여 차례가 넘는 승전이 있었습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갈 때 충주에 잠시 머물기도 했고,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신돈(辛旽)과 이인임(李仁任)은 충주 천도(遷都)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말 의병전쟁 때도 주민들은 외적에 맞서 싸웠는데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8,000여 병사와 함께 순절한 신립 장군, 500명의 의병을 이끈 가금면 가흥리 출신 의병장 조웅(趙熊), 병자호란 때 활약한 임경업(林慶業) 장군 등은 충주의 우국충절을 돋보이게 하는 인물들이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하여 2개월 동안 있다가 환궁(還宮)한 것도 눈여겨 볼 일입니다.

특히 신립 장군이 최후를 마친 탄금대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북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강이 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문산, 견문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해발 100m 정도의 나즈막한 산으로 악성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타면서 제자들에게 노래와 가야금 그리고 춤을 가르쳤다는 곳이기도 합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제천에서 거병한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은 충주성을 함락한 뒤 친일적인 충청도관찰사 김규식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격고팔도열읍>의 격문을 포고하여 모든 관리들은 의병을 후원해 나라를 지킬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처럼 충주를 거점으로 한 의병전쟁은 전국적 의병전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일본의 강압을 받던 1908년에 충주에 있던 충청북도 도청이 청주로 이전된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충주 지역민의 애국 충절의 기질을 꺼려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신라 마의태자의 전설이 전해지는 미륵대원지 Ⓒ문화재청

충주향교와 팔봉서원

충주고을의 읍치구역(邑治區域)에는 읍성 터와 읍성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 그리고 관아(官衙) 건물인 청녕헌(淸寧軒)과 제금당(製錦堂) 그리고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이 남아 있습니다.

충주읍성(忠州邑城)은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교통로인 영남대로(嶺南大路)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 중요 거점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관하던 충주사고(忠州史庫)를 수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안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세 곳에 있었고 성의 동쪽에 조양문, 서쪽에 휘금문, 남쪽에 봉아문, 북쪽에 경천문이 있었고 동남쪽으로 암문(暗門)이 서쪽으로 수구문(水口門)이 있었으나 1896년 의병에 의하여 소실되었다가 고종3년(1866)에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치른 뒤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조칙(詔勅)을 받고 고종6년(1869) 2월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는 읍성을 개축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준공하였습니다.

축성사적비는 고종6년(1869) 충주읍성을 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충주목사 조병로가 동헌 앞에 건립한 것으로 전면 좌횡(左橫)으로 ‘축성사적비’라 쓰고 축성 연대와 성, 문루의 크기를 적어 놓았고 뒷면과 좌측면에는 축성과 관계된 사람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녕헌은 조선시대 충주목사가 집정하던 동헌으로 소실된 되었던 것을 1870년 당시 목사였던 조병로가 창룡사(蒼龍寺)를 헐어다 옮겨 세운 건물이며, ‘백성들에게 길쌈을 권장한다’는 뜻의 제금당은 중앙의 고관대작들이 충주를 방문할 때 숙소로 사용하였던 곳이고, 산고수청각은 수직청(守直廳)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모두 청녕헌과 함께 중건된 건물입니다.

충주항교는 조선 태조7년(1398)에 계명산 아래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인조7년(162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건립하여 1897년과 1936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지면(地面)을 2단으로 정지하여 첫 단에 외삼문과 명륜당을, 둘째 단에는 내삼문과 대성전 그리고 동, 서 양무(兩廡)가 배치되어 있고 그밖에 부속 건물들도 남아 있습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은 1582년(선조 1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자(李耔), 이경연(李慶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어 1672년(현종 13)에 사액(賜額)을 받았고 1612년(광해군 4)에 김세필(金世弼), 노수신(盧守愼)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1871년(고종 8)에 전국적인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98년에 복원하였습니다.

계립령 서쪽 아래 자리 잡은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는 석굴사원 터로 중원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라고도 부릅니다. 계립령은 신라 아달라왕 3년(서기156)에 처음 길이 열려 처음에는 계립령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하늘재라 불리게 되었는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경북 문경 관음리와 충북 충주 미륵리를 이어주는 백두대간 상의 옛 고개입니다.

전해지는 문헌이 따로 없어 미륵불 건립연대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륵대원’ 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살았던 바로 전 시대인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 경순왕의 자녀인 마의태자(麻衣太子)와 덕주옹주(德周翁主)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덕주옹주는 월악산에 덕주사(德周寺)를 지으면서 남쪽을 바라보도록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고 마의태자는 이곳에서 북쪽을 향해 석굴사원을 지어 미륵불을 조성하여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사찰의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관리들의 숙소 등이 있는 역원 터도 함께 발굴돼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3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사전예약 관계상 11월 15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고을학교 카페 바로가기)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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