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강원도 춘천시에서 열린 2만5000명이 참여한 마라톤 행사. 늦깎이 참가자 정채금(54) 씨가 탄 휠체어를 다른 두 명이 밀어주며 천천히 뛰어오고 있었다.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10킬로미터 마라톤을 완주한 이들은 화상 환자 자조모임인 '해바라기' 회원들이다.
페인트공이었던 정 씨는 2년 전 화상을 입었다. 일을 마치고 줄을 타고 내려가다가 고압선에 걸려서 감전 사고를 겪었고, 한쪽 팔과 한쪽 발목을 절단했다. 정 씨의 휠체어를 밀고 온 유운영(49) 씨도 화상 환자다. 13년 차 전기공이었던 그는 전봇대 위에서 공사를 하다가 감전 사고를 겪고 한쪽 손을 제대로 못 쓴다.
유 씨가 마라톤 행사에 참여한 이유는 "화상 환자도 당당하게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뛰다 보니 정 씨가 마음에 걸려 휠체어를 함께 밀었다. 그는 "다 불편한 사람들인데 밀고 갈 사람이 없으니 밀고 왔다"며 "늦게 왔지만 잘 뛰든 못 뛰든 한마음이라는 걸 확인하고 성취감도 느꼈다"고 말했다.
유 씨처럼 화상을 입은 해바라기 회원 12명이 이날 10킬로미터를 완주했다. 몸이 불편하거나 수술을 앞두어 직접 뛰는 대신 응원에 나선 회원, 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와 베스티안 화상후원재단 직원까지 합치면 30여 명이 참여했다.
"화상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사고"
화상 환자들의 마라톤 참여를 기획한 오찬일 해바라기 회장은 "화상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려고" 이날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회원 한 명이 친구와 마라톤에 참여하던 것을 보고 행사를 착안했다.
"화상 환자들은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대부분 여름에도 반팔, 반바지를 안 입어요. 여성들은 치마를 안 입어요. 누군가는 편견을 깨야 해요. 가만히 있다고 누가 해결해주지 않거든요. 우리가 스스로 만든 벽을 깨야죠. 회원 한 분이 마라톤에서 뛰는 것을 보고 '아, 이거다.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 회장 자신도 2007년 가게 누전으로 화재가 나 전신 59%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최근까지 총 24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는 "불이 존재하고 문명이 발달하는 한 화상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사고"라며 "전국에 54만700명 화상 환자 중에 9000명이 중증 환자인데, 그 9000명이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저도 장애 4급 판정을 받았어요. 오늘 뛴 회원 절반이 장애인이에요.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우가 많아요. 목욕탕도 마음껏 못 가고, 음식점에 가도 쫓겨날 때가 있어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해도 '우리가 그런 데 가도 될까?' 하고 망설이기도 해요."
"한국에서 화상 환자가 왕따당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 씨는 돌 때 중국 음식을 만드는 기름을 뒤집어쓰고 전신 30~4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이 씨의 부모님은 고민 끝에 이 씨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2006년에 미국행을 결정했다.
"예전에 학교에서 애들한테 놀림 받았어요. 화상 환자로서 따돌림이랄까. 폭력도 있었어요. 어머니가 중학교 때는 그런 일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데도 미국에 갔어요."
미국에 가니 놀림 받는 일은 없어졌다. 이 씨는 "한국은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고 화상 환자에 대한 선입견도 큰데, 미국은 그런 게 훨씬 적다"며 한국에서도 사회적인 시선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차별받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됐을 외국행이었다.
오찬일 회장은 화상 흉터 때문에 한국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화상 환자들이 참여하는 마라톤은 차별의 '벽'을 깨기 위한 작은 시작이다.
"미래의 어린이들이 화상 흉터 때문에 한국을 떠나거나 왕따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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