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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늦으리, 구이저우(貴州)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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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늦으리, 구이저우(貴州) 비경

1월 중국학교 답사

중국 <소수민족의 땅> 구이저우(貴州. 귀주)는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성으로 성도는 구이양(貴陽)이며, 첸(黔) 혹은 구이(貴)로 약칭됩니다. 북쪽은 쓰촨(四川), 서쪽은 윈난(雲南), 동쪽은 후난(湖南), 남쪽은 광시(廣西壯族自治區)와 경계를 이루고 있지요. 면적 17.61만㎢으로 남한의 1.5배, 인구는 약 3,600만 명으로, 이중 한족이 65%이고, 소수민족이 35%를 차지합니다.

소수민족 가운데는 먀오(苗)족 35%(약 440만명), 부이(布依)족 23%(약 290만명) 이외에 둥(侗)족, 이(彝)족, 수이(水)족, 후이(回)족, 거라오(仡佬)족 등이 살고 있습니다. 지형이 험준하고 왕래가 적어 고립지가 많으므로 오지로 구분되고 있지요. 그러나 남방 카르스트 지형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구이린(桂林)을 지나면서 볼 수 있는 기이한 풍광들이 이어지므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껏 숨겨져 있어, 중국에서도 독특한 풍광과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큰 변화가 몰려오고 있으므로 늦기 전에 가봐야 할 곳입니다.

▲소수민족의 땅, 구이저우(貴州) ⓒ중국학교

중국학교(교장 조관희, 상명대 교수)의 2015년 새해 벽두 <구이저우 답사>는 1월 11일(일)부터 17일(토)까지 1주일간 진행됩니다. 이번 여행은 구이저우의 성도 구이양(貴陽)을 중심으로 서쪽의 자연경관, 북쪽의 중국현대사 유적, 동쪽의 소수민족 마을 등 노선별 특색이 뚜렷합니다. 이러한 여정을 소화하기 위해 이동이 다소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하루 평균 3∼5시간 정도 이동하며 각 지점마다 충분한 여유를 갖고 둘러볼 수 있습니다.

<구이저우 여행>을 대표하는 아이콘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수하(白水河)가 만들어낸 중국 최대의 절경 <황궈수(黃果樹)폭포>

▶중국 공산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은 <쭌이(遵義)회의 유적지>

▶소수민족 중의 소수민족 <허쟈(革家)마을>

▶용맹스런 치우의 후예 <먀오족(苗族) 성인식>

▶고루(鼓樓) 광장에 울려 퍼지는 <둥족(侗族) 대합창>

▶명불허전 중국 10대 명주 <마오타이주(茅台酒)의 고향>

조관희 교장선생님은 저명한 중국학자이자 중국여행가입니다. 지난 여름, “가기는 쉽지 않지만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로의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베이징,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그리고 황산과 장가계 등이 중국 여행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중국 여행의 감추어진 매력을 보여드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중국학교는 앞으로 봄·가을에는 중국문명의 핵심을 이해하는 명강의를 열고, 여름·겨울에는 중국여행지를 엄선해 답사하는 학교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구이저우(貴州)에는 남방 소수민족들의 의식주와 춤과 노래 등 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으며, 중국 남부 카르스트 지형이 빚어낸 기이하고 수려한 자연풍광이 여행객을 압도합니다. 평평한 지형이 거의 없고 길이 험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고립된 마을들은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문화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이 전국적으로 교통망을 정비해가면서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구이저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현대화의 물결은 구이저우 소수민족들의 삶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 같은 소수민족 마을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여러 가치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15년 새해 아침, 더 늦기 전에 구이저우로 함께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제1일차>

첫째 날은 구이저우(貴州)로 이동합니다. 구이저우의 성도인 구이양(貴陽)까지는 아직 국내에서 직접 가는 항공편이 없어 일단 인천에서 상하이 푸둥공항으로 갔다가 상하이 홍챠오공항으로 이동하여 국내선을 타고 구이양에 도착합니다. 구이양에 도착한 뒤에는 전용버스를 타고 서쪽 노선 답사를 위해 안순(安順)으로 가서 투숙합니다. 구이양에서 안순까지는 2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제2일차>

둘째 날은 안순(安順) 지역 관광입니다. 이 날은 전닝현(鎭寧縣)의 황궈수(黃果樹)폭포와 수렴동(水簾洞), 용궁동(龍宮洞), 핑바현(平壩縣)의 톈룽툰바오(天龍屯堡)를 둘러보고 쭌이(遵義)로 이동합니다. 톈룽툰바오에서 쭌이까지는 약 202km이며 버스로 대략 3시간 걸립니다.

황궈수(黃果樹)폭포

중국 최대의 폭포인 황궈수폭포는 원래 백수하(白水河)폭포라 불렀으나, 폭포 옆에 현지 사람들이 황줴수(黃桷樹)라 부르는 용수(榕樹)가 한 그루 있어 황궈수(黃果樹)라 부르게 되었다. 석회암 지층이 장기간 침식되다가 하상(河床)이 갑자기 떨어져 나가서 형성되었다. 백수하(白水河)가 동북의 산허리에서 절벽을 뚫고 쏟아져 오다가 이곳에서 총 낙차 100여m로 9계단을 이루며 폭포로 떨어진다. 황궈수폭포는 이 가운데 가장 큰 제4계단이다. 폭 101m(수량이 줄어들면 너비는 좀 줄어든다)의 물이 높이 77.8m 위에서 굉음을 내며 떨어진다. 유속 17m/초, 최대 유량 1,000㎥/초. 안개가 구름에 잇닿고, 수많은 흰 비단이 거꾸로 걸린 듯하며, 가는 것은 주렴 같고 굵은 것은 빙벽 같이 끊임없이 서우담(犀牛潭)으로 뛰어든다. 서우담은 이 충격으로 18m와 15m의 거대한 담(潭)이 되었고 내리친 격랑이 20여m 거꾸로 치솟는다. 폭포 부근의 천생교(天生橋)는 길이 1㎞, 폭 200∼300m로, 위의 석림(石林)이 걸렸는데 그 형상이 기이하여 볼만하다. 현재 황궈수풍경구에는 18개의 대형 폭포와 4개의 지하 폭포가 발견되었다.

▲은하수의 전설을 품고 있는 중국 최대의 황궈수(黃果樹)폭포 ⓒ톰톰

수렴동(水簾洞)

황궈수폭포의 안쪽 암벽에 석회암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다. 6개의 창, 5개의 공간, 3줄기의 샘, 6개의 통로로 이루어진 길이 134m의 동굴이다. 동굴의 위아래와 양측은 온통 넝쿨로 바람에 흔들인다. 동굴에서 폭포를 통해 세상을 내다보면 청량한 기운에 신선의 세계에 들어선 듯하다. 어떤 동굴에는 모폭대(摸瀑臺)가 있어 폭포수를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용궁(龍宮)풍경명승구

안순(安順) 시내에서 약 32km 떨어진 마터우향(馬頭鄕) 룽탄촌(龍潭村)에 있다. 카르스트 지형이 충분히 발육한 모습으로, 동굴, 폭포, 협속, 봉우리, 절벽, 하류 등이 모여 있어 ‘카르스트박물관’이라 불린다. 이 풍경명승지는 용궁중심구(龍宮中心區), 선당(漩塘), 유채호(油菜湖), 마황(螞蟥)의 4지역으로 나뉜다. 용궁중심구(龍宮中心區)는 모습이 기이하고 변화가 많아 신화 속의 수정궁전과 비슷하다 하여 용궁(龍宮)이라 하였으며, 와룡호(臥龍湖), 영빈동(迎賓洞), 용문비폭(龍門飛瀑), 용담천지(龍潭天池), 용궁암호(龍宮暗湖), 방각암(蚌殼岩), 호혈동(虎穴洞)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동굴의 길이는 약 15km에 달하는데 그 중 1,260m를 개방하고 있다. ‘지하에는 리강(漓江)이 하늘에는 석림(石林)이 있다’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기이하고 신비로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천지(天池)는 일명 용담(龍潭)으로 불리기도 하며 수심 43m, 지름 40m로 주위는 절벽에 잡목이 무성하다. 천지 오른쪽에 높이 50m, 폭 25m의 용문(龍門)폭포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는데 역시 중국 최대의 동굴 폭포이다. 또한 중국 최대의 동굴 사원이 있는데 바로 용궁 관음동(觀音洞)이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불전이 천연 용암 동굴이라는 점으로, 인공 조각 불상이 32존 모셔져 있고 또 관음과 비슷한 모양의 천연 종유석이 유명하다. 천지에서 방각암(蚌殼岩)까지는 800m이며 방각암은 내청과 외청으로 나뉘어 있다. 방암(蚌岩)에서 일한동(一旱洞)까지는 일명 호혈(虎穴)이라고도 하는데 면적이 1,500㎡이며 역시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진다.

톈룽툰바오(天龍屯堡)

구이양(貴陽)에서 7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윈난(雲南)으로 가기 위한 교통의 요지이다. 원나라 때 중요한 역참 중 하나로 이곳에 반롱역(飯籠驛)이 설치되었으며, 명나라 초기에는 주위안장(朱元璋)이 남쪽 지역을 진압하기 위해 역시 이곳에 둔병을 실시하였다. 이주해온 병사들은 대개 쟝쑤(江蘇)나 저쟝(浙江)에서 온 한족(漢族)들로 이 주변에 사는 토착민들과 구별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마을 이름을 ‘톈룽툰바오(天龍屯堡)’로 개칭했다. 둔보문화(屯堡文化) 연구가들이 명대에 이루어진 서남지역 둔전이야말로 구이저우, 윈난 개발의 시작이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구이저우는 명나라 영락(永樂) 11년(1413)에 성(省)으로 독립하여 윈난, 쓰촨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톈룽툰바오에는 현재 1,00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천(陳), 정(鄭), 장(張), 선(沈)씨 가문이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명대 강남 한족의 문화를 계승하여 구이저우 안에서 한족문화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어, 복식, 건축, 종교신앙, 생활풍습, 음식문화 등의 방면에서 600여 년 전의 전통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건축물들은 평시에는 일반 가정집으로, 전시에는 군사시설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온 마을이 석조건축물들이며 다양한 돌조각들이 눈길을 끈다. 복장은 봉양한장(鳳陽漢裝), 노래가락은 익양고강(弋陽高腔), 의례는 둔보지희(屯堡地戱) 등이 계승되고 있다.

▲톈룽툰바오의 연극 장면 ⓒ중국학교

직금동(織金洞)

안순에서 서북쪽으로 3시간 정도, 구이양에서 서쪽으로 4시간 정도 거리의 직금동은 타계동(打鷄洞), 건굉동(乾宏洞), 직금천궁(織金天宮) 등으로도 불린다. 총 면적이 70여만㎡의 용암동굴로서 이 중 현재 35만㎡가 개발되어 있다. 동굴 길이는 약 12.1km로 추측되며, 이 안에는 세계 용암 동굴의 모든 침적 형태가 모여 있어 ‘용암동굴의 왕’ ‘천하제일동(天下第一洞)’이라고도 불린다.

<제3일차>

셋째 날은 구이양(貴陽)의 북쪽에 있는 쭌이(遵義)에서 중국 공산혁명의 역사를 확인합니다. 우선 쭌이 회의 유적지(遵義會議會址)와 마오쩌둥 고거(毛澤東故居)를 답사하고 마오타이진(茅台鎭) 홍쥔산(紅軍山) 홍군열사릉원(紅軍烈士陵園)과 기념비(紀念碑), 국주문화성(國酒文化城) 등을 본 후 다시 구이양으로 귀환합니다.

쭌이회의 유적지(遵義會議會址)

1934년 가을 쟝졔스(蔣介石)의 제5차 공산당 토벌작전에 쫓겨 대장정에 나선 홍군이 1935년 1월 초 이곳 쭌이에 이른다. 80만 대군으로 출발한 홍군은 여러 전투를 거치며 5만도 안 남은 채 구이저우성 북부산악지대로 접어든다. 호남성에서 사천성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손에 넣어야 되는 군사적 요충지가 바로 쭌이였다. 4차 토벌전 이후 홍군 지도부에서 밀려나 있던 마오쩌둥이 이곳에서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친소련파인 기존 지도부의 실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장원텐(張聞天), 왕쟈샹(王稼祥),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등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군사적 실권을 쥐게 된다.

이후 마오쩌둥 노선을 중심으로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마침내 중국 공산혁명이 성공하게 된다. 즉 쭌이(遵義)회의는 중국 공산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쭌이회의 유적지는 원래 국민당 25군 제2사 사단장 바이휘장(柏輝章)의 사저였다. 중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이층집으로 1930년대 초에 지어졌으며 당시 쭌이에서 손에 꼽는 웅장한 건물이었다. 1935년 1월 초 홍군이 쭌이에 도착한 후 홍군총사령부가 거주했으며 1월 15일-17일까지 주 건물 2층 작은 거실에서 쭌이 회의가 진행되었다.


마오쩌둥 고거(毛澤東故居)

1935년 1월 홍군이 쭌이에 있었던 기간에 중앙정치국 위원이었던 마오쩌둥, 장원텐, 왕쟈샹이 머물렀던 곳이다. 원래 천남변방군(川南邊防軍) 제2여(旅) 여단장 이화이지(易懷芝)의 사택으로 1933년에 지어진 서양식 집으로 면적이 대략 580㎡이다. 쭌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 된 마오쩌둥은 2층 왼쪽 방에 머물렀는데, 현재 방 안에 침대와 의자, 차 테이블, 군용 전화기, 탁자 등 당시 사용했던 생활용구들을 진열해 놓고 있다. 장원텐은 1층 왼쪽 방, 왕쟈샹은 2층 오른쪽 방에 머물렀으며 그 이외의 방들에는 당시 중앙 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경호인들이 머물렀다.

홍쥔산(紅軍山) 홍군열사릉(紅軍烈士陵)과 기념비(紀念碑)

홍군열사릉원은 쭌이(遵義)시 상강(湘江)변 풍경이 수려한 펑황산(鳳凰山) 남쪽 기슭 소용산(小龍山) 위에 자리잡고 있다. 쭌이회의 유적지에서 약 1km 떨어져 있는 홍군열사릉원은 홍3군단 참모장이었던 덩핑(鄧萍)의 묘, 홍군 무덤, 당시 쭌이에서 희생된 홍군 열사들의 동상 및 기념비로 유명하다. 1984년 쭌이회의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되었으며 비석의 정면에는 당시 덩샤오핑이 쓴 ‘홍군열사영수불후(紅軍烈士永垂不朽)’라는 금색의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전체 높이는 30m, 하단부 폭은 6m, 정상부 폭은 2m에 달한다. 기념비 정상에 5m 높이의 소비에트 상징인 낫과 망치 조각상이 있다. 비석 하단은 직경 20m, 높이 2.7m의 둥근 고리가 에워싸고 있는 형상인데 그 안에 새겨져 있는 28개의 별은 쭌이회의의 정신이 영원히 빛남을 상징하고 있다. 둥근 고리 내벽에는 한백옥(漢白玉) 부조 4개가 각각 ‘오강(烏江) 도강’ ‘쭌이 인민의 홍군맞이’ ‘누산관(婁山關)대첩’ ‘적수(赤水) 도강’을 표현하고 있다. 둥근 고리는 5m에 달하는 4개의 홍군 두상이 받치고 있는데 이 거대한 두상은 자색 화강암으로 조각한 것으로 동남쪽은 홍군 노병의 형상, 서남쪽은 청년 홍군의 형상, 동북쪽은 적위대원(赤衛隊員) 형상, 서북쪽은 여자 홍군 형상이다.

국주문화성(國酒文化城)

국주문화성은 런화이(仁懷)시 마오타이주(茅台酒) 공장 안에 있으며 한(漢),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清) 및 현대로 구분된 7개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하고 있는 편액과 서화, 문물 작품이 약 5,000여 점에 달하며 역대 주류업의 발전 과정과 역사상 술과 관련된 정치, 경제, 문화, 민속 등 방면의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중국 5천년 주(酒)문화의 정수를 응축하여 소개하는 동시에 마오타이주의 발전 역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4일차>

넷째 날은 구이양에서 동쪽으로 소수민족 마을들을 찾아갑니다. 오전에는 구이양에서 182km 떨어진 카이리(凱里)까지 이동하여 마탕(麻塘)거쟈(革家)마을을 답사하고, 오후에는 랑더(朗德)상채(上寨)먀오(苗)족마을에 가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그들의 공연을 관람합니다. 이후 104km 떨어진 두쥔(都匀)으로 이동하여 넷째 날의 일정을 마칩니다. 구이양에서 카이리까지는 약 3시간 20분, 랑더에서 두쥔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됩니다.

카이리(凱里)

귀주성 동남부의 묘령(苗嶺) 북쪽 기슭, 청수강(淸水江) 상류의 용두강(龍頭江)가에 위치한다. 첸(黔)동남 야오족둥족자치주(苗族侗族自治州)의 행정중심지로 신흥공업도시이다. 인구 41만명. 이중 먀오(苗)족은 60%를 차지한다. 이곳은 먀오족의 고향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명절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노생절(蘆笙節)이 유명하다. 카이리시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는 먀오족의 촌락이 퍼져 있고, 정교한 자수와 은세공으로 알려진 먀오족의 전통 의례를 볼 수 있다.

서쪽으로 15㎞ 떨어진 향로산(香爐山)은 명·청시대에 먀오족이 봉기할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여기에는 봉기와 관련된 민간 전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음력 6월 19일에는 근처의 먀오족 사람들이 모여 전통적인 ‘등산’축제를 가진다. 카이리박물관은 구이저우 동남부의 인문지리 및 소수민족 문화를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민족박물관이다.

마탕(麻塘)거쟈(革家)마을

마탕(麻塘)은 전형적인 거쟈(革家)마을로 카이리시 북쪽으로 18km, 향로산에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한가할 때 밀납을 써서 물들이는 납염(蠟染)을 하거나 자수옷을 짓는다. 이 지역 여자들은 8∼9살부터 꽃무늬 납염을 시작하여 15∼16살 쯤에는 납염의 달인들이 된다. 거쟈(革家)는 아주 독특한 소수민족으로 자신들만의 생활습관과 언어, 복식을 지니고 산다. 거쟈는 활쏘기 명수였던 후예(后羿)의 자손이라 전해지는데, 남자들은 성년식 때 화살을 쏘는 풍습이 있으며, 여자들의 복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머리 비녀도 화살 모양이다.

거쟈 인구는 대략 5만여 명으로 구이저우 동남쪽에서만 거주하고 있는데 카이리 서북쪽에 흩어져 살고 있는 거쟈인은 겨우 만여 명 정도이며 중국 55개 소수민족 안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먀오족으로 구분해 넣으려 하지만 거쟈인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복식이나 얼굴빛 등으로만 보아도 먀오족과는 구별되며 생활습관, 문화 등이 먀오족과는 전혀 다르다.

▲거쟈마을 아가씨들(상)과 화살 모양의 비녀 ⓒ중국학교

랑더(朗德)상채(上寨)먀오(苗)족마을

카이리(凱里)시와 레이산(雷山)현 사이에 위치한다. 국도를 타고 가면 곧장 마을까지 이른다. 촌락은 90여 호에 500여 명으로 모두 이곳에서 자랐다. 배산임수로 사방은 청산이 그림 같고 큰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가옥은 간란식의 조각루(吊脚樓)로 지세의 높낮이에 따라 산아래에서 산허리까지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작은 시내가 산채 앞을 졸졸 흐르며 강가에는 논밭에 관개하는 수십 개의 물통차가 돌고 있다.

산채의 중심 광장에는 나뭇대가 세워졌고 소뿔 같은 곳에 돌로 갈아 만든 거대한 동고(銅鼓) 하나가 걸려있다. 산채의 작은 길은 이리저리 교차하며 돌조각으로 ‘人’자 모양으로 깔았다. ‘행사 때는 다리에 제사지낸다’(過節祭橋)는 전통습속에 따라, 각 절기 행사 때 거리의 작은 다리들을 돌아다닌다. 집집마다 태양, 달, 산신 모양의 전지(剪紙)를 붙였고, 사람 사이의 분규를 해소하는 전통적인 표지물(나뭇가지, 대꼬지, 백지, 가시나무 가지를 하나로 묶은 것)을 걸어두었다.

전통복장을 한 먀오족 아가씨들은 산채의 문에서 두 손으로 소뿔잔을 들고 노래 부르면서 손님에게 ‘길막기 술’(攔路酒)을 올린다. 그런 다음 광장에 모여 기둥 주위를 돌며 둥둥 울리는 동고(銅鼓)소리 속에서 춤을 춘다. 이를 ‘채동고’(踩銅鼓)라고 한다. 이때 천진하고 활발한 먀오족 아가씨들이 분분히 등장하여 손을 잡고 소매를 들어 올려 노생무(蘆笙舞)를 춤춘다. 끝으로는 참관하는 순서로 친구집을 방문하여 ‘나그네’(遊方)와 마주 노래한다. ‘나그네’란 ‘요마랑’(搖馬郞)이라고 칭하는데, 곧 먀오족의 자유연애의 습속을 보여준다. 마음에 들면 노래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데 문답이 하나씩 이어지는 가사는 무척 아름답다. 최근 랑더먀오족 마을은 금동남(黔東南)먀오족둥족자치주의 첫 번째 노천민족민속박물관으로 정식 개방되었으며 민족민속문물진열실과 초대소를 설치하였다.

▲랑더상채마을의 전통민속공연 ⓒ중국학교

<제5일차>

다섯째 날은 두쥔(都勻)에서 바사먀오족마을(岜沙苗寨)로 이동합니다. 이동 거리는 249km로 약 4시간 정도 걸립니다. 오후에 총포휴대가 가능한 중국의 마지막 총잡이 부락으로 독특한 풍속을 지닌 바사먀오족마을을 탐방하고 저녁에는 자유시간을 갖습니다.

바사먀오족마을(岜沙苗寨)

바사먀오족 부락은 주민이 2,000여 명 정도이며 구이저우성 총쟝(從江)현 남쪽 6km 떨어진 곳의 5개 산채에 분산되어 살고 있다. 바사는 수풀 무성한 삼림 속에 있으며 그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로 짓고 수렵을 겸하고 있다. 깊은 삼림 속에 있어서 1,000여 년 이상 매우 은폐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바사마을은 그리 크지 않으며 목조 건물들도 소박하고 단순하다. 전설에 의하면 먀오족의 선조는 치우(蚩尤)인데 바사인들은 치우의 셋째 아들의 후예라고 한다. 바사 남자들은 성인식을 통해 낫으로 머리 아랫부분을 밀어버리고 윗부분을 길게 남겨 상투를 트는 독특한 두발 형태를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두발을 바사먀오족 언어로 ‘후군’(戶棍)이라 하며 남성 복식 중 가장 중요한 표지로 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치우의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며 현재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남자 두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장년의 남자들은 몸에 칼을 차고 화약총을 어깨에 메고 있어 고대 무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사 여자들도 옛 자수 문양의 아름다운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데, 은으로 된 목걸이, 팔찌 등으로 한껏 장식하고 있어 이목을 집중시킨다. 바사먀오족의 머리 위 상투는 나무를 상징하며 입고 있는 푸른 천의 옷도 아름다운 나무껍질을 상징한다고 한다. ‘바사’는 원래 ‘풀과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바사인들에게 나무는 바로 생명이며,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기에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들은 또한 태양신을 숭배하여 행사 때마다 노생(蘆笙)을 불며 태양이 뜨는 곳을 향하여 줄지어 서서 춤을 춘다. 손님을 맞이할 때도 산채 문 앞에서 남자들이 노생과 망통(芒筒)을 불고 바사 아가씨들이 소뿔로 만든 잔에 쌀로 만든 ‘문막이 술’을 건넨다. 노생 연주 한 곡이 끝나면 세 발의 총성이 울리고 문을 열어 손님을 마을 안으로 맞아들이며 민속공연을 펼친다. 바사먀오족마을은 ‘태양 아래 마지막 남은 총잡이 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전형적인 바사족 전사 ⓒ중국학교

<제6일차>

이제 답사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여행 엿새째 날에는 주로 둥족(侗族)마을을 참관한다. 우선 빠샤에서 가오쩡(高增)향(鄕) 샤오황촌(小黃村)으로 이동하여 둥족의 대가(大歌) 공연을 관람한 후 중국 둥족 고루(鼓樓)문화의 중심이자 가장 큰 둥족 마을인 자오싱(肇興) 둥채(侗寨)를 답사한다. 둥족 문화를 둘러본 후 다시 구이양으로 귀환하여 시내에 있는 남명호(南明湖) 가운데 자리한 명대 누각 갑수루(甲秀樓)의 야경을 관광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다.

샤오황촌(小黃村) 둥족대가(侗族大歌)

샤오황은 가오쩡 향에 속한 둥족 마을로 ‘대가지향(大歌之鄕)’이라 칭해지는 풍류와 시의(詩意)로 가득한 곳이다. 작은 냇물을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주위는 온통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백 개의 조각루(吊脚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샤오황 사람들은 “밥은 몸을 살찌게 하지만 노래는 마음을 살찌게 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아름다운 화음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들인다. 마을 입구에 고운 복장에 은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소녀들이 나와 ‘길막이 노래’를 부르고 외부에서 묻혀올 수도 있는 좋지 않은 기운을 술 한 잔으로 씻어내게 한 후 나그네를 마을 안으로 안내한다. 풍우교(風雨橋)를 지나 마을 중심의 고루(鼓樓)에서 공연이 열린다. 마을 청년들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민족 이주의 역사를 노래하는 것에서부터 젊은 남녀의 사랑 노래 등 아름다운 합창이 울려 퍼지는데,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노래 축제에서는 천여 명이 한꺼번에 합창을 한다고 한다.

▲샤오황촌의 고루 ⓒ중국학교

자오싱(肇興)둥채(侗寨)

자오싱은 구이저우 동남부 먀오족둥족자치주 리핑현(黎平縣)에 위치한 가장 큰 둥족 마을 중 하나로 약 1,000여 가구에 4,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자오’(肇)는 ‘시작한다’, ‘가장 먼저’라는 의미가 있으며 자오싱은 이 일대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살기 시작한 마을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의 선조 루눙놘(陸濃暖)이 강서 지역에서 이쪽으로 이주해 온 후 이곳을 개간하여 번창한 것이라고 한다.

마을 안에 고루, 풍우교, 희대(戱臺), 조각루, 곡식창고 등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중국 둥족 고루문화(鼓樓文化)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자오싱에는 인, 의, 예, 지, 신이라는 유가적 덕목으로 이름 붙인 5개의 고루가 있는데 다층보탑 형식의 목재 건축물로, 옆에 세워진 풍우교, 희대 등과 함께 둥족의 의례와 행사 오락 활동 장소가 된다. 자오싱의 상징인 이 다섯 고루는 청말에 처음 세워진 것이지만 문화대혁명 때 훼손된 것을 1980년대 기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중국의 3대 고진(故鎭) 가운데 하나인 자오싱둥채 ⓒ중국학교

구이양 갑수루(甲秀樓)

구이양은 귀주성의 성도로 약칭은 축(筑). 귀주성의 중심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한다. 오강(烏江)의 지류인 남명하(南明河)의 상류 지역이다. 관할 지역은 칭전시(淸鎭市)와 카이양현(開陽縣), 슈원현(修文縣), 시펑현(息峰縣)이 포함되어 있다. 인구는 311만, 이중 시구 지역 인구는 220만이다. ‘산림의 도시’(森林之城)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명대 1569년 구이양부(貴陽府)를 설치했는데 구이산(貴山)의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구이양(貴陽)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갑수루는 구이양시의 상징으로 남명호(南明湖)에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는 남명호에 자라 같이 거대한 돌이 솟아 있어 사람들은 ‘오기’(鰲磯)라고 했다. 명대 만력 연간에 강동 순무(巡撫)가 남쪽 강안을 연결하는 둑을 만들고 풍수에 어울리게 누각을 세웠는데 이것이 ‘과갑정수’(科甲挺秀)에서 이름을 취한 ‘갑수’(甲秀)였다. 역대로 몇 번 중건되었다. 3층 누각이 높이 약 20m이다. 처마가 날아오르고 서까래가 조각된 모습이 매우 뛰어난 구조이다.

강 가운데 있는 누각의 오른쪽에는 ‘남곽(南郭)의 승경’이라고 하는 관음사(觀音寺)와 취미각(翠微閣)이 있다. 청대 옹정 연간과 가경 연간에 주조한 원형의 쇠기둥이 두 개 있다. 길이 각각 3m 이상의 육면에 글자가 적혀 있는데 이는 어얼타이(卾爾泰)가 남정(南征)하여 새긴 것이다. 누각의 아래에는 부옥교(浮玉橋)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고, 다리 위에는 함벽정(涵碧亭)이 옛 모습을 복원해놓고 있다. 누각에는 편액과 제영(題詠)이 상당히 많다. 이는 1981년 주체 건물을 수복할 때 벽 속에서 모두 나온 것이다. 이중 청대 류위산(劉玉山)이 쓴 장련(長聯)이 유명하여 쿤밍(昆明) 대관루(大觀樓)의 쑨란웡(孫髥翁)의 장련과 비견된다.

▲소수민족 마을 중심의 고루 ⓒ중국학교

<제7일차>

드디어 답사 마지막 날이다. 오전에 구이저우성 박물관을 둘러보며 일주일간의 구이저우 답사를 마무리한 후 공항으로 이동하여 상하이를 거쳐 귀국한다.

구이저우성 박물관

구이저우성 박물관은 구이양시 베이징로에 위치한 성급 박물관으로 1953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58년에 개관하였다. 총 면적 1.93만㎡이며 소장된 문물이 6만여 점에 이른다. 이 박물관이 중점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소수민족 관련 문물이며, 자수, 납염, 직물, 은장신구 등이 가장 많다. 특징있는 소장품으로 먀오족 혼인 기록 부목(符木), 먀오족 동물 문양의 술잔, 이족(彝族) 토사(土司)의 팔괘용포(八挂龙袍), 이족 문자로 된 <육조기략(六祖纪略)> 수초본(手抄本)과 수이족(水族) 묘장석각(墓葬石刻) ‘동고’(铜鼓) 등이 있다.

이번 <구이저우 답사>의 상세한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 중국학교 <구이저우 답사>는 2015년 1월 11일(일)~17(토)일까지 6박7일간 진행되며 참가비는 참가자 12명 이상 205만원, 16명 이상 195만원, 20명 이상 189만원입니다(모든 단체여행경비 포함하며 NO-TIP NO-OPTION NO-SHOPPING). 이번 답사는 조관희 교장선생님이 직접 인솔하며 (주)녹색세계여행이 준비하고 진행합니다. 자세한 내용 문의와 참가신청은 전화 02-2055-3700 팩스 02-2055-3900 (주)녹색세계여행 이경하 대표(011-316-4626)에게 연락바랍니다.


▲중국학교 <구이저우 답사> 약도 ⓒ중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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