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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늄은 제네바 합의를 깨부술 해머"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북핵, 역사에 길을 묻다(3)

1992년 '플루토늄 불일치'로 시작된 1차 한반도 핵위기는 1994년 제네바 합의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후인 2002년, 한반도 핵위기의 상자는 다시 열리고 만다. 기가 막힐 정도로 유사한 형태로 말이다.

유사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남북기본합의서로 상징되는 한반도 데탕트 분위기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및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더욱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1년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북·미 관계는 물론이고 남북관계도 큰 시련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들어 남북관계는 네오콘의 견제를 뚫고 새롭게 비상하고 있었다. 북한 역시 7.1 경제관리개선조치와 신의주 특구를 지정하는 등 경제 회생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적인 대외 환경"을 절실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반대 및 북핵 문제 여파로 중단되었던 북·일 관계도 2002년 들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해 9월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평양을 전격 방문한 것이다. 그의 방북은 1차 남북정상회담에 비견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동북아 냉전의 또 하나의 축인 북·일 관계 정상화의 시동이, 그것도 보수파인 고이즈미 정권에서 다시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유사성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을 '깡패국가'(rogue state)로 명명했던 미국은 2001년부터는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북한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이 유사하면서도 더욱 커진 것을 알 수 있는 표현이었다. 또한 미국의 플레이어들도 비슷했다. 아버지 부시 때 국방부 장관 및 차관으로 있었던 딕 체니와 폴 월포위츠는 아들 부시 때에는 부통령과 국방부 부장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리고 이들을 비롯한 네오콘이 대북정책을 비롯한 대외정책을 주도했다. 이 와중에 터진 것이 바로 2차 핵위기이다. 1992년에는 '플루토늄' 불일치였다면, 이때에는 '우라늄 불일치'가 문제였다.

주한미군 및 한미동맹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유사성이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1990년대 초반 펜타곤은 당초의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번복해 대규모의 미군 주둔 및 주도적 역할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북핵 문제도 침소봉대했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에도 미국은 주한미군의 변형(transformation) 및 전략적 유연성을 추진했다. 주요 골자는 한국 방어의 주도적인 역할은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은 다른 일, 즉 '테러와의 전쟁' 및 동북아 분쟁 발생 시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한미군과 관련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비교해보면, 전술적인 차이와 전략적인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술적인 차이는 주한미군이 1990년대에는 한국 방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계속하길 원했던 반면에, 2000년대에는 '보조적인 역할'로의 변경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인 목표, 즉 중국을 겨냥한 동북아 지역군으로의 재편 의도는 유사했다. 1990년대 초반에 북핵 문제가 미국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데 좋은 구실이었던 것처럼, 200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2차 핵위기와 주한미군 재편이 조우하면서, 미국은 미군기지 재배치, 이전 비용 분담, 전략적 유연성 등과 관련해 유리한 협상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는데

돌이켜보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조건과 환경을 안고 출범했다. 핵문제는 제네바 합의에 따라 해결 국면에 있었고, 미사일 문제 역시 타결 일보 직전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문제의 세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미 3자 관계가 선순환에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이를 송두리째 뒤집어버렸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반대했고, 북미 미사일 회담도 중단시켰다. 2차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관계 개선에도 부정적이었다. 급기야 2002년 들어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고, 핵 선제공격 대상에 올려놓았다.

"악행에 대한 보상"이라며 호시탐탐 제네바 합의를 파기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네오콘의 발호도 본격화됐다. 이들은 2002년 초부터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수용하지 않으면, 중유 제공 및 경수로 사업을 중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밝히기 시작했다. 중유 및 경수로 제공은 제네바 합의의 미국 측 핵심 의무사항이었다. 이게 중단된다는 것은 곧 제네바 합의의 파기를 의미했다.

▲ 영변 핵시설 내부 모습 ⓒ외교부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요구는 제네바 합의에도 맞지 않은 것이었다. 특별사찰은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2년 당시 경수로 사업의 진행 상황은 30% 정도를 맴돌고 있었다. 완공 목표인 2003년은 고사하고 언제 완공될 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북한은 강하게 반발하면서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처럼 제네바 합의는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문제가 터지기 전부터 "실 끝에 매달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급기야 미국 국무부는 10월 16일 충격적인 발표를 내놓았다. 북한이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보유 사실을 "시인했다"며, "북한이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제네바 합의가 파기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는 10월 3~5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방북 결과를 설명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국무부 발표 일주일 후에 외무성을 통해 미국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미국에게 '협상이냐, 핵 억제력이냐'를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했다. 뒤이어 부시 행정부는 중유 제공 중단 방침을 밝히고 예멘으로 항햐던 북한의 미사일 수출 선박을 나포했다. 그러자 북한도 핵 시설 재가동을 선언하고 IAEA 감시단을 추방했다. 그리고 미국이 거듭 협상을 거부하자 북한은 2003년 1월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2차 한반도 핵위기가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우라늄 불일치'의 진실은 무엇일까? 불일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실게임이다. 당시에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이용해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미국의 주장과 "날조된 것"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북한은 영변에서 대규모의 현대식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이걸 놓고 본다면, 북한이 2002년에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었을 개연성은 높다. 북한은 2009년 6월에 우라늄 농축 개시를 선언했고, 2010년 11월에는 미국 전문가들에게 그 시설을 공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불과 17개월 사이에 대규모의 현대식 우라늄 농축 공장을 짓고 가동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건 '있다, 없다'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2년 당시에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면,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느냐를 따져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네오콘은 주장처럼, 핵무기 제조 단계에 접어들었을 만큼 북한의 우라늄 농축이 진전되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미국이 포착한 정보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 가동 중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알루미늄관 등 관련 부품과 장비를 수입하고 있었다는 수준이었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2002년 8월 말 한국과 일본에게 이 문제를 브리핑했지만, 그 내용은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이즈미가 평양행을 취소하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같이 밥도 먹지 말라

또 하나는 북미 양측의 '의도의 불일치'였다. 우라늄 농축 문제가 불거졌을 때, 북한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했었다. 후술하겠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부시 대통령에게 메모를 전달하면서까지 말이다. 10년 전에 플루토늄 문제로 북미 직접대화를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라늄 문제를 카드화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우라늄 농축 의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관되고도 가능한 조치들이 있다고 제안했다"는 켈리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켈리를 평양에 보낸 목적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라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회고를 보자.

"통상 연륜이 있는 협상가에게는 충분한 신뢰가 부여된 만큼 정부의 지침은 협상의 대본이 아닌 참고할 요점으로 활용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제임스 켈리가 평양에 갔을 때 주어진 미국 정부의 지침은 가서 그대로 읽으라는 것이었다. 켈리에게는 그야말로 무대에서 이렇게 하라는 지침만 주어진 것이다. 그는 북한측과 지침에 담겨 있지 않은 어떠한 대화도 나눠서는 안됐다. 이로 인해 그는 북한 관리들을 피해 협상 테이블의 구석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켈리는 평양에서 북한측과 협상만 하지 못할 처지가 아니었다. 북한 사람과 밥도 같이 먹지 말라는 게 부시 행정부의 분위기였다. 네오콘의 핵심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켈리 방북 이틀째인 10월 4일 라이스에게 보낸 메모에서 이렇게 따졌다. "저는 당신이 대통령에게 켈리 일행이 북한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켈리 일행이 한두 차례 북한인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당시 대북정책과 관련해 부시 행정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도 있다. 켈리 일행이 평양을 다녀간 지 4주 후에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다. 이들 역시 김계관, 강석주 등 켈리가 만났던 북한 외무성 고위 관리들을 연이어 만났다. 강석주는 그레그에게 김정일 위원장이 부시 대통령에게 전하길 희망하는 메모를 건넸다. 방북단은 워싱턴으로 돌아가 백악관의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만나 메모를 전달했다. "우리는 이 메모에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악행에 대한 보상이거든요" 해들리의 짧고도 싸늘한 답변이었다. 그레그와 동행했던 돈 오버도퍼가 <두 개의 코리아>에서 밝힌 김정일 메모의 내용은 이랬다.

"만약 미국이 우리의 주권을 인정하고 확고한 불가침 보장을 해준다면, 저는 핵문제를 새로운 세기의 요구에 맞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부시 대통령께서는 미국은 우리나라를 침공할 어떠한 의도도 없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핵심적인 문제는 미국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불가침 확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만약 미국이 이 문제와 관련해 전향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 역시 호응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부시 대통령께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이후 부시 행정부는 김정일의 메시지에 아무런 답변을 전달하지 않았다. '최고 존엄'을 최고로 여기는 북한으로서는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북한이 취한 방식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 능력을 강화해야만 미국도 북한 자신의 요구를 경청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더더욱 강하게 갖게 된 것이다.

기실 앞선 두 편의 글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북한의 플루토늄 문제는 1990년대 초반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사안이다. 마찬가지로 2002년에 불거진 우라늄 문제 역시 미국이 초기부터 능동적인 협상을 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미로도 막을 수 있었던 이들 핵물질은 이제는 불도저로도 막기 힘들 정도로 커져버렸다. 1990년대 초 플루토늄 문제가 주한미군 감축을 막을 카드였던 것처럼, 2002년 우라늄 문제는 "제네바 합의를 깨부술 해머"로 간주된 것이다. 적어도 네오콘에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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