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도보순례를 한다. 일차적으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독려하는 목적이다. 아울러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새겨진 분열의 역사를 되새기고, 역사적 진실을 마주할 내면의 용기를 회복하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순례단은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도보순례를 시작한다. 지난달 30일 팽목항을 떠나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들은 순례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글을 <프레시안>에 싣기로 했다. 도보순례단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도보순례를 시작하는 아침기도 때마다 희생된 영혼의 이름을 부르고, 그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 후 걷기를 시작합니다. 어제는 2학년 6반, 오늘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 후, 그 이름들을 위한 기도를 마친 후 길을 걷습니다.
미안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변하겠습니다…. 함께 걷는 이들의 가슴과 등 뒤에 새겨진 글귀들 가운데 남은 5일의 순례기간 동안에 묵상할 주제는 ‘변화’라는 기도 인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걷는 동안 어떻게, 무엇이 변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침몰하는 배를 방치하였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미안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고, 우리 사회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세월호의 단면들을 보며 절망하기도 하였고, 그 배에 함께 있는 나의 모습에서 승객들을 버려둔 채 배를 떠난 선원의 모습을 보며 자책하여 보기도 하였지만 그래서 나도, 우리도, 세상도 변해야한다고 거리로 나가 보기도 했지만 그동안 무엇이 변했나, 무엇이 변하고 있나 돌아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때는 함께 슬퍼하던 온 국민들의 관심에서 세월호의 아픔은 점점 잊혀져가고, 원인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와 변화를 위한 정치적인 노력들은 정파들의 정치공학에 의해 오염되어 버렸고, 다시는 자녀와 가족을 잃은 유족들처럼 어처구니없는 슬픈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규명과 대책수립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요구와 뜻은 피로감에 지친 국민들로 인하여 힘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그랬듯이 이 슬픔도 이렇게 잊히는 것이 아닐까 불안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지금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변하고 있는 걸까? 길을 걸으며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변화는 무엇일까"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에서 들려오는 첫 소리는 '잘 들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죄 된 구조와 마음들에 이끌려 살아온 결과가 빚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과 불의로 인하여 아파하는 이웃들과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고, 나 스스로 잘 들으며 살아가야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른 두 번째 생각은 어쩌면 우리들 모두 침몰하는 배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자각하고, 그 책임과 사명을 진실하게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그것이 능력의 문제이든, 의지의 문제이든, 아니면 조건과 환경의 문제이든…. 그들 역시 침몰하는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어야 하지만, 훌륭한 정치인들이 있어야 하지만, 훌륭한 관료들이 있어야 하지만 만일 지금 여기에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침몰하는 배의 몰락을 멈출 수 없습니다.
조선후기 열강들의 식민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난 것은 지도자들이 아니라 농민들이었습니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3.1독립만세 운동을 시작하였던 것도 지도자들이 아니라 백성들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의 혹독한 독재정치에 맞서 나라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것도 지도자들이 아니라 국민들이었습니다.
좋은 지도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아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하는 국민'들이 되는 운동, '생각하는 국민'들이 함께하는 모임, '생각하는 국민'들이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고, 뜻과 의지를 모으고, 함께 하는 실천들이 많아질 수 있다면 '좋은 지도자'는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내일은 순례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 광화문에 도착하는 것으로써 발로 하는 이번 순례는 끝이 나겠지만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하는 순례는 계속될 것입니다.
-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 <2> "우리는 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미안했던 걸까?" <3>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생명의 길을 걷고 또 걷는다" <4> "걸으면 생명이 보인다" <6> "강변 꽃길 대신 매연 가득한 길을 걷는 이유" <8> "세월호 희생자 이름 적은 공책을 품고 갑니다" <14> "한국판 킬링필드를 걷다" <18> "나는 이 나라가 무섭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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