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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무기지대 건설은 동아시아 공동체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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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무기지대 건설은 동아시아 공동체의 출발점

[프레시안 books]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비핵무기지대>

필자는 프레시안 북스로부터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박사가 2011년에 저술한 역저의 한국어판 <비핵무기지대>(서해문집, 2014년 9월 펴냄)에 대한 서평을 요청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도 이 책의 출판을 지극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현재도 '비핵무기지대'의 의의와 개념, 그리고 그 실천적 의의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아주 익숙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1990년 <창비>에 '핵의 위기'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강대국과 약소국 모두 핵무기 혹은 핵우산에 의존하는 안보 전략의 문제를 비판하고, 1990년대 중엽 이래 '동북아 비핵지대 구축'의 필요성을 거론해온 필자로서는 그래서 아쉬움을 많이 느껴왔습니다. 마침 우메바야시 박사의 새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우리 사회의 평화운동에서 이 문제를 되새기고 우리 자신의 맥락에서 새삼 성찰할 좋은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저서에 대한 일반적인 서평의 형식보다는, 이 주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넓히고 그것이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과 연관해 어떻게 사유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함께 밝히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이 점, 편집자 선생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1. 핵무기의 시대에 '핵무기 없는 세계'의 이상, 그 꿈과 현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1년 9월 25일 유엔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지구의 모든 거주민은 이 지구가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도 가장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 실은 우발적 사고, 혹은 오판, 혹은 광기에 의해서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전쟁 무기는 그들이 우리를 폐기하기 전에 먼저 폐기되어야 합니다."

핵무기가 폐기된 세계에 대한 케네디의 열망은 진정이었을 수 있지만, 그의 지휘 아래 미국의 핵군비 증강은 사상 최고 수준을 향해 치달았다. 1960년 2만 기 남짓이던 미국의 핵탄두 숫자는 그가 암살되는 1963년 말이 되면 약 3만 기로 팽창해 있었다. 1960년 1600기에 그쳤던 러시아를 따돌리기 위한 미국의 핵무기 증강은 러시아의 대응을 초래해 1963년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는 4200여 기로 증가한다. 미국의 핵탄두 숫자가 가장 많았을 때는 1964∼1967년 시기의 3만~3만1000기 수준일 때였다. 케네디 정부 때 강조된 '미사일 갭' 논쟁의 여파 속에 추진된 핵무기와 각종 미사일 증강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의 선제적인 핵군비 증강을 추격하며 1980년 3만 기를 넘게 되고, 1986년에는 드디어 사상 최대 숫자인 4만 기에 이르게 된다. 그해에 세계 핵 보유 국가들이 가진 핵탄두의 총수는 역시 사상 최고인 6만5000여 기에 달했다.

탈냉전 이후 미국과 러시아의 전술핵무기 폐기와 단계적인 전략핵무기 감축 협상에 힘입어 2000년대에 들어 세계 전체의 핵탄두 숫자는 많이 줄었지만 2002년 그 숫자는 2만 기를 기록했다. <아토믹 사이언티스트 불리틴>에 따르면, 2014년 현재에도 전 세계엔 아직 1만6300기의 핵탄두가 14개국의 98개 기지에 배치되어 있다. 이 중 6000여 기는 퇴역했거나 해체를 기다리고 있지만, 약 1만 기의 핵탄두는 군 무기고에 배치되어 있다. 이 중 4000기가 작전 투입 가능한 상태이며, 특히 1800기는 상시 고도경계 상태로 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발사될 수 있다. 이들 핵무기의 93퍼센트는 물론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것이다. 현재 미국은 미국 안의 11개 주에 12개의 핵기지, 그리고 유럽의 5개 국가에 6개의 핵무기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2. 미러 핵무기 감축 협상의 현재

2009년 4월 1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런던에서 회담을 갖고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감축을 선도하여 '양국은 핵무기 없는 세계를 달성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4월 5일 오바마 대통령은 프라하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는 핵무기 없는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분명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천명합니다. 저는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목표는 단기간 내에 달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룰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내와 끈기가 요구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통념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확고하게 말해야 합니다.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의 '핵무기가 폐기된 안전한 세상'의 비전은 그의 정부에 의해 주도된 핵 군비 증강 최고조에 의해 백일몽에 불과했듯이, 오바마의 '핵무기 없는 세상'의 천명도 적어도 두 가지 '현실과의 타협'에 둘러싸여 있다. 첫째, 오바마가 같은 프라하 연설에서 분명히 했듯이, "지구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미국은 적성국을 억지하는 데 필요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며, 체코를 포함한 동맹국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그는 아울러 역시 같은 연설에서 "이란의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효과와 경제성이 입증된 미사일 방어 체제 건설"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핵 보유국들이 견지하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이라 하겠다.

둘째, 미국은 러시아와 함께 2010년 4월 프라하에서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에 조인했다. 2011년 2월에 발효되어 2021년까지 유효한 이 조약에 따라, 미러는 실전 배치되는 핵탄두 숫자를 1550기로 제한하고, 실전 배치되는 전략미사일과 전략폭격기의 숫자를 700기로, 그리고 비배치(non-depoyed)된 것을 합해서는 800기로 제한했다. 이로써 핵미사일 숫자는 이전의 절반, 그리고 실전 배치 핵탄두의 숫자는 1991년 서명되고 1994년 발효된 원 전략무기감축조약(original START)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감축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것이 '핵 없는 세계'를 향한 미국의 견고한 행보인지는 여전히 의문을 남겼다. 왜냐면 오바마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이 조약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이 가진 핵무기의 '현대화'를 위한 사상 최고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세 가지 방면의 노력과 그 현주소

ⓒ서해문집
핵 없는 세계라는 지난한 목표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핵무기 초강대국 사이의 양자 간 핵군비 감축 협상이다. 주로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 탈냉전기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감축에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들 핵무기 강대국들의 노력이 폐기에까지 실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 방면에서는 핵의 군사적 이용을 통제하기 위한 다자 간 제도들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다. 1963년 미국, 소련, 영국에 의해 서명되고 비준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artial Test Ban Treaty, PTBT) 혹은 '제한적핵실험금지조약'(Limited Test Ban Treaty, LTBT)이 그 최초라고 하겠는데, 이 조약의 공식 명칭(treaty banning nuclear weapon tests in the atmosphere, in outer space and under water)이 말해주듯이, 지하핵실험(underground nuclear weapon test)을 제외한 모든 핵실험을 금지한 것이었다. 현재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로서 서명하지 않은 나라는 중국, 프랑스, 북한이며, 대부분의 나라는 이 조약에 가입한 상태이다. 1968년 서명을 받기 시작하여 1970년에 발효된 핵무기비확산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은 핵군비 확산을 막기 위한 대표적인 다자 간 제도이다. 현재 190개국이 가입해 있는데,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수단은 가입한 일이 없으며, 북한은 2003년 탈퇴한 이후 복귀하지 않은 상태로 있다.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1996년 유엔 총회가 채택한 다자 간 제도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Nuclear-Test-Ban Treaty, CTBT)이다. 이 조약은 군사용이든 민간용이든 모든 핵폭발(nuclear explosions)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 조약은 '부속조항 제2항'(Annex 2)에서 채택 당시 핵발전 원자로 내지 연구용 원자로를 보유한 나라들을 포함한 44개국이 모두 비준을 완료할 때 발효한다고 규정했다. 2014년 현재 163개국이 비준했으나, 다른 20개국은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이 서명도 하지 않은 나라에 속하고, 중국과 미국은 이란, 이집트, 이스라엘과 함께 서명은 했으나 비준은 하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미국이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핵심 이유는 미국의 핵 억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핵무기 체계들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유지해야 하고, 또한 핵무기 체계의 현대화가 지속적으로 필요한데, CTBT는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핵실험도 불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1992년 이래 핵실험을 중단한 상태인데, 기존의 핵무기들이 노후화되면서 그 신뢰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미국은 우려한다.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과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핵무기 체계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 에너지부는 '핵무기 관리 프로그램'(Stockpile Stewardship and Management Program)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가 실제 핵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 정부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1999년 상원에 CTBT 비준안을 상정한 바 있으나, 위의 이유를 내세운 반대에 부딪쳐 거부된 바 있고, 이러한 미국 군산정 복합체의 반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또한 미국을 포함한 핵 강대국들은 국지적인 지역전쟁에 활용할 수 있는 제3세대 핵무기로 불리는 '저용량탄두'(low-yield warheads) 개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노력을 CTBT가 방해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이삼성, 『세계와 미국: 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한길사, 2001, p.454).

우메바야시 박사가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우메바야시, 2014, 50∼51),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이 조약 비준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이며, 중국은 미국의 거부를 이유로 들어 비준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핵폭발 실험 없이 핵무기의 신뢰성을 유지하고 핵무기 체계 현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당 정도 축적했지만, 그런 능력에서 중국은 한참 뒤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CTBT가 발효되면 그러한 능력에서 다른 나라들과 자신의 격차를 유지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은 어떤 의미에서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이삼성, 2001, 455∼456). 또한 핵실험금지조약은 더 이상의 핵감축 노력을 회피하는 구실로도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한편 핵실험뿐만 아니라, 군사용으로 악용될 수 있는 모든 핵분열물질의 생산 자체를 금지한다는 더 본질적인 목표를 담은 국제적 제도인 '무기용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Fissile Material Cutoff Treaty, FMCT)이 1995년 미국과 러시아 등에 의해 제안되었지만, 미래의 핵물질 생산뿐 아니라 핵무기 강대국들과 일본 등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양의 핵물질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정리되어 있지 않고, 각국이 제시한 버전이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이 조약은 협상조차 시작해보지 않은 상태로 있다.

결국 핵무기를 이미 보유한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핵군비 통제와 감축은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국제정치의 현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이 각종 핵실험과 핵무기의 위협에 직면한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였다. 이들 비핵 국가들이 핵무기의 횡포로부터 자신들의 영토와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지역 내 국가들 내부에서 야기될 수 있는 핵무기 개발 경쟁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목적으로, 스스로 추구한 대안이 '비핵무기지대' 건설이었다. 이것은 절을 바꾸어 그 과거와 현재를 일별한다.

4.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위한 노력과 그 현주소

우메바야시 박사가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비핵무기지대라는 발상은 냉전시대에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다. 1956년 소련이 중유럽에 비핵무기지대를 설치할 것을 유엔군축위원회에 제안했다. 서방 국가들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은 1957년에는 '태평양 비핵무기지대'를 주장했으며, 1959년에는 북유럽, 발칸, 중동 비핵무기지대 구상을 발표한 바 있었다(우메바야시, 2014, 211). 1950년대 핵군비 경쟁에서는 미국이 단연 앞서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60년 현재 핵탄두 보유 숫자에서 미국은 2만 기를 넘었으나, 소련은 그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600기에 불과했다.

소련은 주로 미국과의 냉전적 대결이 첨예한 지역들에서 핵무기 대결을 완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비핵무기지대를 제안했다고 할 수 있으나,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이 자신이 주도하는 군사동맹네트워크가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소련의 재래식 전력에 의한 위협에도 핵무기 선제공격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군사독트린인 '대량 보복'(massive retaliation)의 원칙을 한국전쟁 이래 확립한 상태였다. 소련의 비핵무기지대 구상에 근거한 평화 공세에 미국이 대응한 방식은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 대한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미국의 주도와 소련의 동의에 의해 사상 최초로 탄생한 것이 1959년 서명되고 1961년 발효한 '남극조약'이었다. 현재 9개 핵무기 보유국(미, 러, 중, 영, 불 등 5대 핵보유국과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중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를 모두 포함해 총 50개국이 가입해 있다. 남극조약은 "군사기지 및 방어시설의 설치, 군사연습 시행 및 모든 형태의 무기실험과 같은 군사적 성질의 조치"를 금지했는데, 이는 당연히 핵무기 관련 활동도 금지한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제5조에서 "남극 지역에서의 모든 핵폭발 및 방사성 폐기물의 처분을 금지한다"고 명기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핵실험을 금지했다.

남극조약에 이어 "달과 기타 천체를 포함한 우주 공간의 탐사 및 이용에 관한 국가 활동을 규제"하는 원칙을 담은 '우주조약'이 1967년 성립했다. 이것은 우주에서 핵실험을 금지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TBT, 1963년 발효)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서,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지구 회전 궤도나 천체에 설치하는 것을 금지한 데 의미가 있었다. 우주조약에는 핵보유 9개국을 포함한 105개국이 가입해 있다. 1972년에는 '해저 비핵화 조약'이 발효되었는데, "해저와 해상 및 그 하층토에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의 설치를 금지"한 것이었다. 현재 가입국은 94개국이고, 핵보유국 중에선 프랑스와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이 미가입 상태이다(우메바야시 히로미치, 2014, 69∼70).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비핵무기지대 건설은 중남미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 핵실험을 시작하고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면서 중남미 국가들 스스로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추구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은 1967년 틀라텔롤코조약의 성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조약의 완전 발효는 쿠바까지도 비준하여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전체와 카리브해 지역 국가들 33개국 가입이 실현된 2002년에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두 개의 의정서로 구성되었다. 제1의정서는 지대 내의 국가들의 비핵화를 규정한다. 제2의정서는 핵보유국들이 지대 내 비핵국가들에 이 조약을 존중하고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 핵무기로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제공하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이 조약상 이 지역 국가들에게 소극적 안전보장의 의무를 가진 5대 핵보유국의 제2의정서 비준이 완료된 것은 쿠바와의 관계로 가장 지체되었던 소련까지 비준을 마친 1979년이었다(우메바야시, 2014, 83).

1975년에는 남태평양 지역에서 '비핵 태평양 운동'이 탄생했다. 이 지역의 미국 및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두 나라에 의한 핵실험이 계속되면서 발전한 운동이었다. 뉴질랜드와 호주의 풀뿌리 반핵평화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실적으로는 남태평양에 압도적 영향력을 가진 호주 정부의 리더십이 긴요했다. 1983년에 등장한 호주 노동당 정권의 밥 호크(Bob Hawke) 총리가 남태평양 비핵지대 설립을 공식 제안했고 1986년 12월 발효했다. 이것이 라로통가조약이다.

이 조약은 핵실험에 대한 강렬한 반대운동에서 기원한 것이었던 만큼, 앞선 틀라텔롤코조약에서는 허용되었던 '평화적 핵폭발'(PNE, Peaceful Nuclear Explosions: 운하 건설 등의 비군사적인 경제적 목적으로 핵폭발을 이용하는 행위)까지도 허용하지 않은 점에서 더 철저해진 비핵무기지대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또한 핵무기를 탑재한 선박이나 항공기의 기항과 영역 통과 문제를 처음으로 명확히 다루었는데, 그것을 허용하는 문제는 각국의 자주적 판단에 맡긴다고 규정했다. 이것은 우메바야시 박사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 호주, 뉴질랜드 3국간의 안보조약인 'ANZUS'에 따라 호주는, 동맹국의 항구에 기항하는 자국 함정의 핵무기 탑재 여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당시 미국의 이른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정책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독자적인 국내법 제정을 통해서 자국 해역에 대한 핵무기의 반입과 기항을 금지한다(우메바야시, 2014, 91).

라로통가조약과 관련해 유의할 점은 해당 지역 안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핵보유 국가들이 영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 조약의 제1의정서에 따라 지역 내의 다른 비핵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소재한 자신의 영토에서 핵무기를 제조, 배치, 실험하지 않을 의무를 진다. 또한 제2의정서에 따라 지대 내 비핵 국가들에게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해야 한다. 프랑스는 1996년에, 영국은 1997년에 이 조약의 제1의정서와 제2의정서를 모두 비준했다. 반면에 미국은 1996년 서명은 했지만, 2014년 현재까지도 제1의정서와 제2의정서에 모두 비준하지 않은 상태이다. 5대 핵보유국 중 중국과 러시아는 1988년에 제2의정서에 비준했다(우메바야시, 2014, 93).

냉전 종식 후에 처음 성립한 비핵무기지대 조약은 1995년에 방콕에서 아세안(ASEAN)의 10개 회원국 모두에 의해서 서명되고 1997년에 발효한 '동남아시아 비핵무기지대 조약'(방콕조약)이다. 이 조약의 뿌리는 1971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5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타일랜드)이 참여해 발표한 '좁판'(ZOPFAN: Zone of Peace, Freedom and Neutrality, 동남아 평화・자유・중립지대 선언)이다. 이 선언은 비핵무기지대 설립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의 문제는 5대 핵보유국이 그들에게 이 조약의 존중과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할 의무를 규정한 부속의정서에 비준은 고사하고 서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일하게 찬성을 표시한 중국도 실제 서명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방콕조약은 다른 비핵무기지대 조약들과 달리 조약 적용 지대를 일반적인 해양법에 따른 영해에 한정하지 않고 대륙붕과 배타적 경제수역까지 포함시키고 있어서, 핵보유국들은 1994년에 발효된 유엔해양법조약으로 보장되는 자신들의 '무해 통항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고 경계하는 반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특히 원칙 수호에 완강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메바야시, 2014, 99∼101).

'아프리카 비핵무기지대 조약'(펠린다바조약)은 방콕조약보다 1년 늦은 1996년 4월 서명되고 2009년 발효했다. 이 조약의 기원은 1960년대에 시작된 프랑스의 사하라 사막 핵실험, 그리고 1977년에 드러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 개발이 촉발시킨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핵 평화에 대한 욕구였다. 그러나 이후 남아공이 1989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이어서 1993년에는 핵무기 포기를 선언하고, 리비아도 2003년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면서 핵무기 문제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다른 산적한 문제들에 비해 긴박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프리카 비핵무기지대화의 불씨를 유지시키며 비준활동을 지속한 것은 '핵감축을 위한 의원 네트워크'(PNND) 등의 NGO들과 몬트레이국제문제연구소 비확산연구센터(CNS) 등의 민간 싱크탱크들의 다양한 노력이었다(우메바야시, 2014, 109).

펠린다바조약의 특징은 먼저 핵에너지를 "아프리카 대륙의 지속적인 사회 및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촉진한다"는 취지를 담은 가운데, "IAEA의 원조"에 대한 적극적인 요망을 담은 점이다. 우메바야시 박사는 이 부분에 대해 2011년 3월 후쿠시마 사태를 교훈 삼아서 아프리카 국가들도 핵에너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핵무기 탑재 선박이나 항공기의 기항과 영역 통과에 대해서는 라로통가조약 이후의 방식, 즉 허가 여부를 이 조약은 해당 조약 체결국의 결정에 맡기고 있다. 펠린다바조약을 구성하는 제1의정서는 핵보유국의 소극적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고, 제2의정서는 이 지대 안에서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5대 핵보유국은 1996년 모두 이 조약의 제1 및 제2의정서에 서명했다. 아직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1년 상원에 비준 승인을 요청한 바 있으나, 상원은 아직까지 심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상의 비핵무기지대 조약들은 남반구에 집중되어 있다. 핵보유국들 사이의 직접적인 지정학적 경쟁이 비교적 첨예하지 않은 지역들이다. 2006년 구소련의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서명식을 가진 '중앙아시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5개국이 이 조약상의 비핵무기지대를 구성한다. 모두 구소련 연방에 속했다가 소련 붕괴 후에 '독립국가연합'(CIS)에 들어 있던 나라들이다. 아프리카 비핵무기지대의 성립에서도 유엔은 2002년 '아프리카 연합'(AU, African Union)으로 개편된 아프리카통일기구(OAU, 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중앙아시아 비핵무기지대의 탄생에서도 유엔, 특히 유엔 아태평화군축센터의 노력이 긴요했다. 1992년 이래 이 센터의 소장을 맡은 이시구리 쓰토무의 노력을 우메바야시 박사는 특기하고 있다. 이 센터는 이 조약의 기초에 관여하고, 유엔의 기술 및 재정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구성된 5개국 전문가 그룹이 조약의 협상과 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2월 카자흐스탄의 당시 수도였던 알마아타에서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이 모여 중앙아시아 비핵무기지대의 설립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한 '알마티선언'은 이 조약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5대 핵보유국 중에서 미국은 이 조약에 대해 가장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앙아시아가 비핵무기지대화 될 경우 벨라루스 등이 주장하는 '중유럽 비핵무기지대 구상'이 더욱 구체화되어 핵무기에 기초한 미국의 대유럽 군사동맹 전략이 제한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1998년 5대 핵보유국을 대표하는 전문가도 참여하여 조약의 구체적 내용을 협의한 비슈케크회의가 열리면서 이 조약은 탄력을 받았고, 이후 전문가회의가 열리기 시작한다. 2002년 9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서 개최된 제6차 전문가회의에서 조약 초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조약의 성립이 지체되었는데, 이런 문제들은 장차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성립 여부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이 있기에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핵무기 탑재 선박 및 항공기의 영역 통과에 대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타지키스탄은 러시아와의 안보협력관계를 고려해서 그 문제를 각국의 판단에 맡기자고 제안한 반면,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엄격한 금지를 주장하여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라로통가조약 이후의 방식을 채택하여 각국의 판단에 맡기는 것으로 최종 타결된다.

둘째 문제는 기존 안보조약과의 관계였다. 1992년 5월 '독립국가연합(CIS) 집단안보조약'(타슈켄트조약)이 성립했는데, 이 조약은 "가입국이 다른 국가 또는 국가 그룹으로부터 침략당할 경우 조약 가입국 전체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고 당장 군사 지원을 포함한 필요한 지원을 한다"고 규정했다. 중앙아시아 5개국 중 투르크메니스탄을 제외한 네 나라가 이 집단안보조약에 가입한 상태(우즈베키스탄은 1999년 탈퇴했다가 2006년에 복귀)였다. 이 안보조약의 가입국이 침략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러시아가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배치할 필요가 있으면 비핵무기지대는 무력해질 것이었다.

2002년 10월 뉴욕에서 5대 핵보유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이 공식 협상을 벌였는데, 특히 안보조약 문제를 둘러싸고 5대 핵보유국들 사이에 입장이 갈렸다. 중국과 러시아는 찬성한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는 반대했다.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6년 2월 타슈켄트에서 열린 제7차 전문가회의는 IAEA와 유엔 법무국의 조언을 받아 조약의 최종 문안을 확정했다. 5대 핵보유국 전문가도 참여했으나, 이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2006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조약 서명식이 열렸으나 미국, 영국, 프랑스는 예상대로 참석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지대 내 국가들인 중앙아시아 5개국이 조약에 대한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2009년 2월 중앙아시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은 발효되었다(우메바야시, 2014, 122).

미국이 이 조약에 반대한 명분은 "비핵무기지대는 기존의 지역적 안보를 위해 국제적 합의를 흩트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유엔헌장에 규정된 개별 또는 집단적 자위권을 제한하고 만다"는 주장에 나타나 있다. 우메바야시 박사의 지적대로 비핵무기지대 조약과 기존 안보조약과의 상충 문제는 지대 내 국가로서 그리고 핵보유국으로서 이 조약에 참여하는 국가들 사이의 협상과 절충에 의해서 조율될 수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은 미국 등과의 그 같은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미국은 응하지 않고 있다. 핵무기 혹은 핵물질이 테러조직에 유출될 가능성을 가장 우려해온 나라가 미국인만큼 중앙아시아 비핵무기지대는 그런 점에서도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이 가장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중유럽 비핵무기지대 구상 등에 미칠 미국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핵보유국은 결국 2014년 5월 NPT 재검토 회의 준비위원회에서 서명을 마쳤으며, 이후 각국은 비준 절차에 들어가 있다(우메바야시, 2014, 125).

중앙아시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특징은 무엇보다 핵보유 국가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지대 내 국가들과 주변 핵보유 강대국들 사이에 맺어져 있는 기존 안보조약이 착종하는 북반구의 한가운데에서 비핵무기지대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조약이 미래의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성에 특별한 의의를 갖는 이유이다. 핵보유국에게 제1의정서를 통해서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할 의무를 부과한 것은 여느 조약들과 마찬가지지만, 모든 가입국에게 'IAEA 추가 의정서'에 가입하도록 최초로 규정함으로써 조약 이행 수단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이 조약은 이정표적 의미를 갖는다. IAEA를 활용해서 조약의 준수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세계에서 현재까지 성립하여 발효된 비핵무기지대들은 이상과 같다. 현재 구상되고 있는 비핵무기지대들 중 대표적인 것은 아랍연맹 22개국과 이란 및 이스라엘이 관련되어 있는 '중동 비핵무기지대'이다. 역시 이란 문제와 이스라엘 문제로 인해 답보 상태에 있다. 이 외에도 '북극 비핵무기지대' 구상이 있고, '남아시아 비핵무기지대,' 그리고 '동유럽 및 중유럽 비핵무기지대' 구상도 있다. 이 중에서도 미국과 러시아 등 핵보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착종하는 동유럽 및 중유럽 비핵무기지대 구상은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에 특히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지역의 비핵무기지대 구상이 서로 지혜를 나누는 상호 교류와 협력 또한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4. 우메바야시 박사의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안과 그 내용

그간 비핵무기지대의 이상을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적용하는 방안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어왔다. 최초의 구체적 제안은 1995년 존 엔디콧(John E. Endicott) 교수가 이끈 미국 조지아 공과대학(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의 국제전략기술정책센터 연구팀이 제시한 '제한적 비핵무기지대' 안이었다. 이것은 판문점을 중심으로 한 반경 2000킬로미터의 원형 지역에서 전술핵무기의 제거와 사용 금지를 핵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반경 안에는 남북한과 일본 전역은 물론이고 중국 영토의 동쪽 절반과 러시아의 극동지역 주요 부분이 포함된 것이었다.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영구히 배제한다는 차원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일부 매력이 있을지 모르나, 전략핵무기에 의한 미국의 대일본 핵우산 제공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고, 중국 영토 주요 부분과 러시아 영토의 가장 민감한 극동지역을 포함시킴으로써 지극히 미국 중심적인 발상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엔디콧의 미국 연구팀은 나중에는 자신들의 방안을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주의 일부를 포함한 타원형 안으로 수정했으나 그 본질은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미국의 영토는 포함되지 않은 채,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 주요 부분만을 제한적이나마 비핵지대화하는 방안을 중국과 러시아가 수용할 리는 애당초 없는 비현실적인 논의였다. 기존의 비핵무기지대 구상들은 모두 비핵국가들의 영역을 비핵지대로 할 뿐, 특정 핵보유국들의 본토 영토를 일부라도 비핵지대에 포함시키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엔디콧 식의 구상은 전례 없는 미국 중심의 탁상공론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메바야시 박사는 이러한 미국 싱크탱크 중심의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방안의 심각한 한계를 인식하고, 동아시아인의 주체적 시각에서 이 지역 비핵무기지대 방안에 대해 고심했다. 그 결과가 1996년 5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그가 "동북아의 역사와 조건을 고려한 보다 현실적인 비핵무기지대안"으로서 제시한 3+3안이었다. 이 안은 "동북아의 비핵국가인 한국, 북한, 일본의 3개국이 지리적인 의미의 비핵무기지대를 구성하고 주변의 3개 핵보유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이 소극적 안전보장 등을 포함한 비핵무기지대 존중 의무를 진다" 것이었다(우메바야시, 2014, 211). 미국의 핵우산에 의지하고 있으나 적어도 원칙적으로 비핵 3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일본과 1992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한 바 있는 남북한이 비핵화 준수 약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조약을 맺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3개 핵보유국들은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한 일정한 지대 안에서 핵무기의 사용과 배치 등을 배제하는 약속을 같은 조약 안에 포함시키거나 또는 별도의 의정서로 그 노력에 동의하고 참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이삼성/우메바야시 히로미치 외,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살림, 2005). 이 방안이 타당한 것은 그것이 세계에서 이미 성립한 비핵무기지대의 기본 구성, 즉 지역 내 비핵 국가의 영역을 비핵무기지대로 만들고 주변 핵보유국들은 그 지대의 존중과 소극적 안전보장 의무 부과라는 양대 조건을 동북아의 실정에 비추어 적절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에 이르러 우메바야시 박사는 비핵 3개국 조약과 3개 핵보유국의 소극적 안전보장 의무를 하나의 조약 안에 통합하는 6개국 조약 형태로 수정했다. 2001년 필자가 가톨릭대 국제학부 재임 시 평화네트워크 및 일본의 피스데포와 함께 주최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추구하는 한일 간 국제대회 등에서 지적한 내용을 수용했기 때문으로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이 방안이 성립하면 미국이 일본과 남한에 대해 약속해온 핵우산은 당연히 무효화된다. 이 개념에 바탕을 두고 우메바야시 박사는 자신이 이끄는 일본의 피스데포와 한국의 평화네트워크 등 한일 NGO 사이의 협력을 주관하면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 모델조약'을 다듬어왔다. 이 모델조약에 따른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안은 한국, 일본, 북한 세 나라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의 '지대 내 국가'로 규정하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세 나라는 '주변 핵 보유국'으로 상정된다. 지대 내 국가에는 비핵 국가로서의 의무가 부과되고, 주변 핵보유국에는 핵보유국으로서의 의무를 지도록 한다. 그래서 이 모델조약은 6개국 조약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된다.

우메바야시 박사가 다듬어낸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모델조약은 첫째, 지대 내 국가들인 비핵 국가들이 핵보유 강대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에 의존하지 않을 의무를 명확히 했다. 대신 주변 핵보유 국가들로부터 '핵무기로 위협이나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받도록 한다.

이 소극적 안전보장은 모든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핵심적 요소이지만, 이 3+3안의 모델조약에서는 핵무기에 의한 위협뿐만이 아니라 재래식 무기에 의한 위협이나 공격도 배제할 의무를 주변 핵보유 국가들에게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관해 우메바야시 박사는 2005년 6자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9.19 공동성명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의 의무를 언급하고 있는 점에 착안했다고 밝히고 있다(우메바야시, 2014, 215). 이 성명은 "미합중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것이 우메바야시 박사의 3+3안의 두 번째 핵심적인 요소이다. 다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재래식 무기에 의한 미국과 남한의 대북한 군사 위협을 해소하는 문제를 비핵무기지대 조약에서 다루어야 할 것인지 또 그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 문제는 비핵무기지대 조약이 아닌 한반도 평화협정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우메바야시 모델조약의 세 번째 특징적인 요소는 핵무기를 탑재한 선박이나 항공기의 지대 내 국가들에서 기항과 영해 통과를 금지한다고 한 점이다. 최근의 다른 비핵무기지대 조약에서는 핵무기 탑재가 의심되는 선박이나 항공기의 기항이나 영해 통과 문제는 개별 국가의 판단에 위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와 달리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안은 기존 조약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기항이나 영해 통과까지도 명확히 금지하는 것으로 했다(우메바야시, 2014, 216).

▲ 1953년 미국에서 실시된 핵 실험(Operation Upshot-Knothole)의 한 장면. ⓒ위키미디어커먼스


5. 한반도 평화협정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를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

필자는 1990년대 중엽부터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동아시아 공동안보를 연결하는 핵심적 고리로서 '동북아 비핵지대'의 문제를 거론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이 지역 비핵무기지대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수렴된다. 첫째는 물론 이 지역 내 비핵 국가들의 비핵화 의지를 조약으로 명문화하고, 이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해 있는 핵보유국들에게 비핵 국가들 영역 안의 비핵화 의지와 조치들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한다는 '비핵무기지대'의 기본 원리를 동북아의 맥락에서는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즉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구체적 형식과 내용에 관한 논의이다.

둘째는 비핵무기지대의 기본 원칙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해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별개인 것 같지만, 사실은 긴밀히 연관된 것이다. 첫째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필자가 판단하기에 우메바야시 박사가 다듬어온 3+3안으로 대체적인 가닥이 잡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동북아에서 1990년대 초 이래 비핵 국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의 초점이 되어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이며, 북한에 대한 미국과 한국의 안전보장 문제였다.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이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역적 조건의 특수성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 문제는 결국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로 연결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가 비핵무기지대의 형식과 내용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판단해왔다. 그래서 필자는 1990년대 중엽부터 이 두 번째 문제의 각도에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에서 동아시아를 비핵지대화하자는 발상을 거론한 것은 1983년 표문태가 편저한 『아시아를 비핵지대로』라는 저서가 그 첫 사례로 보인다(표문태 편저, 『아시아를 비핵지대로』, 일월서각, 1983). 필자는 1995년의 글들에서부터 동북아 비핵지대화를 거론하고 주창해왔다(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당대, 1995, p.318; 이삼성, 「총론: 한반도의 평화에서 동아시아 공동안보로: 미국 미사일방어 추진의 문제점과 동북아 비핵지대화의 시대적 요청」, 『한반도의 선택』, 삼인, 2001; 이삼성·우메마야시 히로미치 외,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살림, 2005). 필자가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안의 구체적 내용 못지않게,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축 문제를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1996년의 논문에서 필자는 그 문제에 관한 3단계 평화구축과정을 논의했다(Samsung Lee, "Building a Peace Regime on the Korean Peninsula: A Three-Step Concept for Peace Process," Asian Perspective, Vol.20, No.2(Fall-Winter, 1996), pp.117-164). 첫 단계는 4국 평화회담(Four-Party Peace Talks) 단계라고 했다.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조약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네 나라가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물론 북미 외교정상화와 함께 남북 간의 일정한 군비통제 체제 구축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단계는 6자회담에 의한 동북아 비핵지대 구성 단계였다. 남북한과 일본, 그리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6개국 사이의 6자회담(Six-Party Talks)을 통해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포함한 더 광범한 군비통제체제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Samsung Lee, 1996, 133). 마지막 3단계로는 5자간 평화포럼의 체제(Five-Way Peace Talks Regime)를 상정했다. 앞서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한 남북한이 외교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서 행동함으로써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주변 4개국과 함께 동북아 공동안보 포럼에 참여하는 국면인 것이었다.

필자의 이 같은 문제의식은 2005년 10월 한국의 대표적인 평화군축 시민운동기구인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평화통일연구소가 주최한 한반도 평화협정 관련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성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에 대한 논의에서 재확인했다(이삼성, 「한반도 평화협정: 북한 핵문제 근본해결로서의 평화협정의 틀과 윤곽」, 평화통일연구소 주최 학술세미나, 서울, 기독교회관, 2005년 10월 7일. 이 논문은 『평화누리 통일누리』 통권 제57호[2005, 9-10월호, pp.40-86에 같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북한이 핵무기 실험을 하기 전이었던 시점에 행한 이 발표문에서 필자는 한반도 평화협정의 위상과 성격을 "북한 핵 폐기의 실질적 진전을 전제로 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 또는 선물로서 제공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평화과정의 포괄적 헌장" 또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로드맵"으로서 규정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북한의 핵폐기의 진행과 함께 남북한 군축과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책수정 등 구체적인 행위들을 상호주의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뜻했다. "북한의 핵 폐기와 미국과 한국 등에 의한 대북한 안전보장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상호주의적으로 구축하는 행동들에 관한 청사진으로서의 의미와 내용"을 평화협정이 갖게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유혹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체제의 핵심적 목표라면 평화협정은 그 목표를 위해 관련 4개국이 취해야 할 행동과 방법에 관한 가급적 구체적인 합의를 담는 것이 옳다"(이삼성, 2005, p.80)고 보았던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남북한 및 일본과 미·중·러 등 주변 핵보유 3국으로 구성된 6자회담과 한반도 평화협정체제 구축 사이의 상관성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6자회담은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이 "핵무기 관련 시설 및 활동의 완전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을 긴밀히 연결시키는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정하는 것이 그 첫 임무라고 했다. 평화협정 이전의 6자회담은 북한으로 하여금 "제네바합의 수준의 핵동결과 사찰 수용, 그리고 핵무기 관련 활동의 동결"을 약속하게 하고, 이에 상응하여 미국과 한국은 "연락사무소 수준의 북미관계 개선, 미국의 대북한 무력 불사용의 명문화된 약속"을 제공하도록 하는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한반도 평화협정 이전에 6자회담의 임무이며, 북한의 핵활동 동결을 넘어서서, 그것을 공개하고 해체하는 과정, 그리고 그에 상응해 북미관계 정상화와 미국과 한국의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에 의한 대북한 위협 해소를 규정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협정의 내용에 담는다는 것이었다.

둘째,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후의 6자회담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긴밀한 상호의존성을 갖는 동아시아 안전보장 문제들을 논의하는 포럼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동북아 비핵무기지대(Northeast Asian NWFZ)를 한반도 비핵화 일정에 적절하게 조응하여 구축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이삼성, 2005, 81).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 사태를 배경으로 필자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의 연결 방식을 다소 조정할 필요를 느꼈다. 마침 2007년 5월 9일 평통사의 평화통일연구소가 주최한 한반도 평화협정 관련 심포지엄에서 행한 기조발제를 통해서 필자는 한반도 평화협정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의 비전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논의할 수 있었다(이삼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서 평화조약(평화협정)의 역할과 숙제」, 평화통일연구소‧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주최 제2차 한반도 평화체제 토론회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전망과 과제>, 서울, 기독교회관, 2007년 5월 9일). 필자는 이 발표에서 그것을 "동북아 비핵지대화에의 규범을 전제하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은 물론 북한 핵무기의 해체를 내포한다. 그런데 북한 핵무기 해체와 비핵화는 '비핵화' 문제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포괄적인 평화구축 문제와 불가분하다. 한반도의 포괄적인 평화체제 구축 문제는 '한반도 평화협정'의 실현으로서만 성립한다. 평통사가 2008년 초에 공표한 '한반도 평화협정(안)'은 한반도 비핵화를 당연히 포함하고 그것은 곧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실천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한반도 비핵화는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에 대한 주변 핵보유 국가들의 노력 의무가 전제되어야 한다. 남북한과 함께 미국과 중국이 정식 협정당사자로 참여할 것을 전제하는 이 한반도 평화협정안은 그 내용에 주변 핵보유 국가들이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 구축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명시했다. 평통사는 2007년 발표문에서 필자가 밝힌 "동북아 비핵지대화의 규범을 전제하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명제를 진지하게 수용해서 평화협정안에 반영했던 것이다.

앞서서 필자는 미국과 한국의 재래식 첨단전쟁능력에 의한 대북한 위협을 해소하는 문제는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해당 사항이라기보다는 한반도 평화협정이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전제로 한 미국의 대북한 핵위협 해소와 함께 담아야 할 내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이유는 사실 자명한 것이다. 북한의 핵폐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폐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위협이 제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보유한 재래식 첨단 전쟁무기체계에 대한 북한의 불안감 또한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북한에 대한 핵무기 및 재래식 전쟁무기에 의한 위협을 해소하는 '포괄적 안전보장'(comprehensive security assurance)이 필수적인 것이며, 따라서 단순히 핵무기 위협 배제라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애당초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게 된 결정적 이유의 하나가 미국의 핵무기 위협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남한과의 사이에 명백해진 재래식 무기체계에서 점증하는 현격한 열세와 미국이 탈냉전체제에서 세계 곳곳에서 입증한 첨단 재래식 전쟁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비대칭 군사전략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의 전제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실천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핵무기 관련 소극적 안전보장을 포함하되 그것보다 더 포괄적인 대북한 안전보장을 내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건설을 한반도 평화협정과 동시에 타결해내는 것이 현실성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폐기 약속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한반도 평화협정에 담겨야 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도 미국의 첨단 재래식 무기에 의한 대북한 위협 해소는 평화협정 안에 미국의 대북한 핵무기 사용 관련 소극적 안전보장과 함께 명기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의 규범을 전제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북한의 핵폐기 약속을 담고 그 일정을 밝히며, 그에 상응해 미국의 대북한 핵무기 및 재래식 공격 위협을 해소하고 완전한 관계정상화를 실행하는 일정을 이 협정이 담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하되, 이 평화협정의 협정 당사자들인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 등 4개국으로 하여금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를 위한 6개국 협상을 추구하도록 의무화하고,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체결과 북한의 핵폐기 일정의 완성을 일치시키도록 한다는 내용을 한반도 평화협정 안에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처럼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 추진을 의무화하는 대신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벽한 사찰체제의 적용을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발효의 전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로서 미국의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 위협과 함께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장이야말로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북한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북한의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신속하게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영구적으로 원천 차단하는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 추진 의무를 한반도 평화협정에 담을 필요가 있다. 둘째,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건설은 그것 자체로서 바람직한 것이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동북아 비핵지대화는 동아시아 공동 안보 구축의 시금석이라고 필자는 생각해왔다. 이러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를 한반도 평화협정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동아시아 공동 안보를 구축하기 위한 이 지역 6개국의 공동 노력으로 직결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이 성립하면 이 지역 안에서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에 대한 압력 또한 크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는 미국, 중국, 러시아 간에 이 지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핵무기 체계 현대화를 비롯한 군비경쟁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의 경우 이 지역 안에서 미사일 방어 체제로 연결될 수 있는 모든 군사무기 개발과 배치를 금지하는 내용을 명시할 것인지 여부도 논의할 만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2001년의 글에서 분명히 밝혔던 것처럼, 동북아에서 비핵지대화 운동은 특히 미사일 방어 체제에 대한 반대를 본질적 요소로 포함하는 정치적 실천이어야 한다(이삼성, 「한반도의 평화에서 동아시아 공동안보로: 미국 미사일방어 추진의 문제점과 동북아 비핵지대화의 시대적 요청」, 이삼성/정욱식 외, 『한반도의 선택』, 삼인, 2001, p.54).

2000년 스웨덴 웁살라 국제회의에서 채택된 '웁살라 선언'(Uppsala Declaration)은 필자를 포함한 한일 양국 참가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미사일 방어 체제 건설에 대한 반대를 비핵지대화 운동의 불가결한 요소로 포함시킨 바 있다.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 미사일 방어 체제 건설은 냉전시기에 비교적 자제되어 왔던 우주의 군사화를 본격화하고,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주요 지역에 우주적 규모의 철의 장막을 설치하는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첨단 군비경쟁은 반핵 평화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왜냐면 미사일 방어는 핵무기가 인류에게 제기하는 위기를 핵무기의 제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첨단과학무기체계 개발 경쟁에 천문학적 자원을 낭비하여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는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6. 맺는 말: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의 궁극적 의의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밝힌 한반도비핵화의 공약을 9.19공동성명과 2.13합의에 이어 '한반도 평화협정'에서 재차 확인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필자는 한반도의 긴장과 전쟁의 위험성까지도 지속시키고 있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재차 명문화는 정당하다고 본다.

첫째, 핵무기가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핵무기주의의 미망(迷妄)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옳다. 핵보유 국가들을 제외한 인류의 보편적인 국제적 규범은 핵무기의 궁극적 폐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 원칙을 동북아에서 한반도는 견지해야 한다.

둘째, 한반도의 남북한이 또는 통일 이후의 한반도 국가가 개발하여 보유할 수 있는 규모의 핵무기고로는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를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더 위태로운 안보 딜레마의 구조 속에 우리 자신을 몰아넣게 될 것이다. 특히 세계 3대 핵보유 국가들이 밀집한 동북아에서 핵무장한 한반도는 강대국 간의 갈등이 폭력화하는 유사시 일차적인 공격목표가 되는 위험성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위험한 선택이라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셋째, 한반도 안보와 평화의 백년대계의 원초적인 기초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합에 있다. 그 통합을 이루는 데 남북한 어느 한쪽이나 또는 남북한 모두의 핵무기 추구는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 핵무장을 추구하거나 그 의혹을 받는 한반도 국가들의 통일을 주변 국가들은 더욱 경계할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것은 평화적 통일에 대단히 불리하다.

넷째, 동북아 안보질서의 최악의 상황은 한반도의 국가(들)와 일본 사이의 핵무장경쟁이 본격화하는 시나리오다. 한반도에서 핵무장의 추구는 일본에 우리보다 더 빠르고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규모의 본격적인 핵무장의 명분을 주게 된다. 우리에게 그것은 안보의 플러스가 아니라 심오한 안보 상실의 시작이 될 것이다.

다섯째, 21세기 동북아 군비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 건설 경쟁과 그것에 대항하는 핵무기체계 첨단화의 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가 조속히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으로서 또는 그것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명분으로 하는 미일동맹의 미사일방어구축과 이로 인한 중국과 러시아의 군비증강이 현재 동북아질서의 주요한 측면으로 되었다. 한반도의 비핵화 여부는 일본의 핵무장 명분 여부를 결정할 뿐 아니라 향후 동북아의 군비증강 추세의 바로미터가 될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의 속도와 규모 그리고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핵화의 원칙을 고수하고 이행하는 것은 일본의 비핵화를 유지시키면서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초석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핵보유 국가들의 군사안보전략이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한 비핵국가들이 관련된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핵보유국가들 상호간에서도 핵무기의 역할을 축소해가도록 하는 과정의 첫 출발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에 공동안보가 가능해지려면 그 가장 원초적인 조건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현재의 비핵국가들이 상호간에 핵무장의 유혹을 확고하게 떨쳐내고 이것을 해당 지역에서의 핵보유 강대국들의 핵 선제사용 배제에 대한 명확한 공약으로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본다. 이를 위한 남북한과 일본 사이의 공동노력 여부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동아시아의 공동안보체제로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의 시금석이라고 믿는다(이삼성, 2001, pp.46-49).

그간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은 지나치게 경제공동체 중심의 기능주의적 논의로 흘러왔다. 공동안보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뒷전에 있었고, 그만큼 공동 안보를 위한 구체적인 어젠다 역시 사실상 부재하다시피 하다는 지적을 필자는 2006년에 쓴 글에서 제기한 바 있는데(이삼성,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공동체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제6권 제2호, 2006, pp.33-38),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경제공동체 중심의 논의는 경제협력과 교류의 확대가 곧 안보영역의 공동체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 가정을 전제한다. 그러나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확대가 안보영역에서의 협력 확대로 직결되는 것이 아님은 멀게는 1차 세계대전, 그리고 가깝게는 2010년 이후 동북아 국제관계가 웅변해주고 있다. 공동체 형성의 핵심은 결국은 경제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안보의 문제이다. 공동안보의 문제는 경제영역에서의 협력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안보 영역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노력에 달려 있으며, 그 노력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동아시아에 비핵무기지대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바로 한반도 평화를 동아시아 공동안보로 연결하는 핵심 고리일 수 있다고 본다.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의 구상은 본질적으로 한반도 평화협정이라는 장치와 마찬가지로 국제평화에 대한 법적-제도적 접근의 한 방식이다. 이것은 또한 국제정치이론에서 본다면 자유주의적 인식의 테두리에 속한다. 철저한 현실주의적 인식은 이에 대해 다분히 냉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역사에서는 국내정치에서도 국제정치에서도 예측 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대안은 종종 새로운 게임의 룰을 수립하고 구현하기 위한 여러 사회들과 구체적 인간들의 치열한 고뇌와 노력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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