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역사란 엉터리다"라고 했다. 볼테르는 "역사는 죽은 자들의 위에서 갖고 노는 거짓말들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편리와 이익에 따라 역사를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유포하는 것에 대한 냉소적인 일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현재의 선택의 지침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 나온 것일 게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지 어느덧 20년이 지나가고 있다. 1994년 10월 21일 체결된 이 합의를 둘러싼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긍정론자들은 한반도 전쟁 위기와 핵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합의였다고 평가한다. 반면 부정론자들은 "악행에 대한 보상"이자 "북한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라고 혹평한다. 오늘날 북한이 10개 안팎의 핵무기를 갖고 있고 협상무용론이 득세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평가의 추'는 후자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1기 오바마 행정부 때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으로 재직했던 제프리 베이더는 북핵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북한의 도발→강요→(다른 나라들과의) 합의→보상의 반복이었다.(중략) 수십년간 북한의 지도자들은 오로지 핵무기 프로그램만 추구해왔다. 그들의 전술은 변하기도 했지만,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이걸 한미 양국은 '북한식 패턴'이라고 부른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이고 박근혜 대통령도 "대화는 북핵 고도화의 시간만 벌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20여 년간의 한반도 문제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북한식 패턴’이라며 퉁치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번 특별기획을 통해 지금까지 당연하게 간주되었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핵심 관계자들의 회고록과 비밀 해제된 외교 문서,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 전문 등은 북핵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북핵 역사의 재구성을 통해 기여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피로감과 무관심이 팽배해지고 있는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관심의 환기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올바른 정책 선택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
그러자 IAEA는 이듬해 2월과 3월 북한에게 특별사찰 수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북한은 이에 반발하면서 3월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은 한미 양국이 대규모 군사훈련인 ‘팀 스피릿’을 재개키로 발표한 것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주목할 점은 IAEA가 특별사찰을 결의한 것도,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것도 NPT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IAEA가 사상 최초로 특별사찰을 결의한 데에는 북핵 사찰 결과 의심스러운 부분이 발견되었다는 점 못지않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었다. 1년 전에 벌어진 걸프전이 끝난 이후 미국 주도의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강도 높은 사찰과 대량살상무기 해체 작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후세인 정권의 핵개발이 많이 진전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IAEA 사찰의 허점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IAEA는 이라크에서의 결함을 북한에서의 고강도 사찰을 통해 만회하려 했다. IAEA 관계자가 "북핵 특별사찰은 IAEA의 힘을 가늠할 리트머스 시험과 같다"며 "IAEA는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강하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줬다.
북한의 '기만 계획'?
IAEA가 이처럼 회원국의 핵 사찰을 두고 전례 없이 강경한 태도를 선택한 데에는 미국의 힘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미국은 북한의 비밀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이었던 로버트 게이츠의 의회 증언을 들 수 있다. 그는 1992년 2월 25일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의 '기만 계획'(A Deception Plan)을 제기하고 나섰다. "우리는 북한이 핵 능력을 감추기 위한 기만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이츠는 또한 "북한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무엇이든 판매하려고 한다"며 핵확산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그런데 1992년 초는 북한이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었던 국면이었다. 1991년 12월에는 남북한 기본합의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됐고, 92년 1월에는 IAEA와 안전조치협정도 체결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미 양국이 대규모 군사훈련인 '팀 스피릿'을 중단하기로 한 방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CIA는 북한의 비밀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 근거의 빈약함이었다. 게이츠는 북한이 흑연감속로와 재처리 시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일한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핵 시설 신고는 IAEA 안전조치협정 체결 이후에 이뤄지는 것이고, 당시 IAEA와 북한은 이를 위한 대화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은 5월에 이들 시설을 포함한 핵 신고서를 IAEA에 제출했다.
그러자 미국은 북한의 신고하지 않은 시설 가운데 핵폐기물 처리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위성 사진을 IAEA에 제공했다. 동시에 북한이 1989, 1990, 1991년 3차례에 걸쳐 10킬로그램 안팎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이는 핵무기 1~2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으로 북한이 신고한 90그램과는 천양지차였다. 이게 바로 북핵 문제 발단이었던 '플루토늄 불일치'였다. IAEA는 이를 근거로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IAEA가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공정성을 잃었다며 강경한 맞대응을 선택했다. IAEA에 대한 북한의 뿌리깊은 불신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로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CIA 국장을 지낸 게이츠는 아들 부시 행정부 말기에 국방장관으로 발탁됐고 오바마 행정부 1기 때까지 국방장관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는 오바마 행정부 초기에 "같은 말(horse)을 세 번 사지 말아야 한다"며 북한과의 협상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이어 또 다시 북한과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1993년 들어 핵 사찰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IAEA는 같은 해 4월 "북한이 IAEA의 안전조치협정에 불응하고 있다"며 북한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다행히 그 해 6월부터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리면서 사태는 수습되는 듯 했다. 북한은 NPT 탈퇴를 유보키로 하고는 IAEA와의 협조를 약속했고, 미국은 불가침 약속을 비롯해 북미관계 개선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후 한반도 정세는 대화와 위기를 반복하다가 1994년 10월 21일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가 체결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살얼음판을 걷던 제네바 합의는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위기에 봉착했고 결국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15년 만에 컴백한 플루토늄 불일치
1차 핵위기 발발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8년, '플루토늄 불일치'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2007년 6자회담의 10.3 합의에 따라 북한은 "완전하고 정확한 핵 신고서"를 제출키로 했다. 그리고 북한은 2008년 5월 평양을 방문한 성김 6자회담 차석대표에게 문서 다발을 전달했다. 1986년부터 5메가와트(MWe)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가동한 일지를 세세하게 기록한 자료였다. 그런데 이들 자료에는 북한이 1992년 이전에 다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국무부가 전담팀을 구성해 북한이 제출한 1만 8822쪽에 달하는 문서를 검토한 결과 내린 평가였다.
1990년대 초반 당시 플루토늄 불일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 것이 바로 북한의 5MWe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운전 기록 검토였다. 당시 북한이 가동하던 유일한 원자로가 5MWe 원자로였고, 여기서 나온 사용후 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재처리 시설을 가동해야 했기 때문에, 두 가지 시설의 운전기록을 분석하면 플루토늄 추출량을 파악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데 15년이 지나서 북한이 제공한 문서를 검토한 결과 당시 북한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북한이 조작한 문서를 미국에 넘겨주기라도 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미국 국무부는 북한이 제출한 문서는 조작된 것은 아니라고 확인했다. 이는 이 문서들이 북한의 과거 핵 시설 운영 당시의 기록을 담은 것이지, 미국에 제출하기 위해 최근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도 최근 펴낸 회고록 <전초기지(Outpost) : 미국 외교 최전방의 삶>에서 이러한 사실을 거듭 확인해주었다.
그러자 미국의 몇몇 언론은 이를 주목했다. <맥클래치(McClatchy)>는 2008년 5월 28일자 보도를 통해 "북한의 문서가 CIA의 주장에 도전하고 있다"며 CIA가 과거에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을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북한이 제출한 문서는 북한이 주장해온 것과 일치한다"며,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이걸 위조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말했다고 맥클래치는 전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북한이 미국에 전달한 문서가 미국 정보기관이 이전에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위해 생산한 플루토늄의 양을 과대평가한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고 전했다. 당황한 미국 정부 한 관리는 "북한의 문서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며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30여 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신고했고 미국 정보기관은 40~50킬로그램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 수치의 차이는 북한이 IAEA의 사찰을 받기 전인 1992년에 얼마만큼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느냐에서 비롯된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의 '결정적 회고'
이와 관련해 2기 부시 행정부의 대북 협상 컨트롤 타워였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결정적 회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2011년 11월에 출간한 회고록 <더 이상의 영광은 없다>(No Higher Honour)에서 "북한은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한 신고를 (우리가) 매우 수용할 만한 수준으로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고 적었다. 핵 신고서를 분석할 결과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해 매우 포괄적인 기록이 있었고", "북한이 생산한 플루토늄 양의 기록”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플루토늄 문제는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라이스는 특히 "북한이 제출한 약 1800쪽 분량의 문서는 1986년부터의 운전 기록이 담겨 있었다"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은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더구나 그는 이를 근거로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를 주저하는 부시 대통령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크리스토퍼 힐 역시 회고록에서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에는 "핵실험에서 사용한 플루토늄의 정확한 양을 포함해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었다"고 밝혔다.
딕 체니를 비롯한 강경파들 역시 북한의 핵 신고서에 우라늄 농축 및 핵확산 기록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지만, 플루토늄 문제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1992년 북한의 플루토늄 최초 신고가 정확했다는 것을 부시 행정부가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2008년 북한의 핵 신고가 완벽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90년을 전후해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 양을 정확히 산출하기 위해서는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에 대한 시료 채취 등 과학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2차 핵위기의 발단이 되었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 및 시리아 핵시설 건설 지원 등 다른 의혹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북핵 문제의 최초 발단이 되었던 '플루토늄 불일치'는 완전히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만약 '북한이 1990년을 전후해 핵무기 1~2개를 만들 수 있는 10킬로그램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미국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면, 북핵 문제 및 이에 대한 역사 인식의 출발은 '엉터리'에서 비롯되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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