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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은 아무 곳에서나 벗지 않는다

[프레시안 books] 남재일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에세이'라는 말처럼 그 뜻의 폭이 넓은 말도 드물다.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논술에 해당하는 '토플 에세이'도 있고, 학문적 주제에 관해 논리성과 사실 근거를 탄탄하게 갖추어 쓴 글이지만 학위논문이나 본격 학술 논문에 비해 구성이나 문체가 자유로운, 학술 에세이도 있다. 그밖에 다양한 주제에 관한 평론 또는 비평도 에세이라는 말로 일컬을 때가 있다.

이렇게 뜻의 폭이 넓은 에세이지만 그 원조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가 남긴 <에세>, 즉 <수상록>(Les Essais, 1580)이 제목 자체와 내용 성격에서 에세이의 원조라는 것. 프랑스어 '에세'는 '시도, 시험'이라는 뜻이라 한다. 라틴어 엑사기움(exagium, 무게를 달아본다, 계량해본다)이 그 어원인 것. 몽테뉴의 <수상록>은 뜻 그대로 옮기면 <시도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뜻에서 에세 또는 에세이는 시론(試論)이다. 예컨대 존 로크의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은 <인간 이해력에 관한 시론>으로 옮길 수도 있다.

에세이에 관한 이런저런 정의(定義)들이 있지만 일본의 평론가 사카니시 시호(坂西志保)의 '에세이란 그것을 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면 못 쓰는 글'이라는 말이 촌철살인이다. 글 쓰는 이의 개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 사람과 글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인문일여지문(人文一如之文)이라고 보는 셈이다. 남재일의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천년의상상, 2014년 9월 펴냄)을 처음 펼쳐 읽는 순간부터 그리고 읽은 뒤로도 '에세이'라는 말, 정확히 말하면 '좋은 에세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일까?

한국의 집단주의는 내집단의 강한 연대와 외부에 대한 강한 경계심이 꼬리를 물고 서로를 강화한다. 이 구도에서는 집단으로부터의 단순한 일탈도 내부 고발 위협으로 과장되기 쉽다. 그러니 내부 결속은 다시 강화되어야 하고 과도한 결속은 쉬이 공적 영역의 준칙을 위반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리하여 '공범의식'만이 집단을 지켜주는 최고의 규범적 가치로 공유되며, '배신'은 최악의 일탈이 된다. (…) 한국사회는 하나의 반도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배타적 집단의 섬으로 구성된 군도 같다. 오늘 잠들기 전 내가 몇 개의 폭력 조직에 조직원으로 등록되어 있는지 헤아려봐야겠다. (103∼104쪽)

우리 사회의 배타적 집단주의를 향한 위의 일갈은 남재일이 신문사 기자 시절 방송국 드라마 홍보 담당자가 촌지를 돌렸지만 받지 않은 일, 자세히 말하면 언론노조회보 기자가 당시 상황에 관해 취재를 하자 실명 인용을 하지 말고 촌지 받은 기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남재일이 취재에 응한 경험에 바탕을 둔다. 자신의 이 경험을 두고 남재일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기자가 동료의 비리를 덮어주는 조폭적인 생존 전략을 의리로 생각하다니!"라고 말한다.

자기 경험을 놓고 일종의 문학적 감상주의에 휩싸여 '느낌 과잉'의 수사법으로 일관하는 이른바 에세이 또는 수필들이 적지 않다. 그런 글은 공적(公的), 사회적 주제를 지극히 사적인 감상의 틀 안으로 축소시켜버린다. 남재일의 글은 그런 류의 글과 거리가 아주 멀다. 사적인 자기 경험이 갖는 공적, 사회적 의미와 맥락을 충분히 풀어내고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자면 자기 성찰 또는 자기 자신과 거리두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 성찰적 거리두기야말로 '좋은 에세이'가 보여주는 중요한 미덕이다.

조선일보는 미확인 사실을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정보 수집 과정도 고급 정보 제공에 원하는 논조로 화답하는 정언(政言) 유착의 의심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과거에 여당 인사가 혼외자 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공직자의 사생활과 직무 수행은 별개"라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당시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이런 사정 때문에 정권이 의도한 정치적 책략에 동조해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돈다. 만약 문제가 단지 사실 확인의 부실뿐이라면, 직업적 태만일 수 있다. 하지만 세간의 풍문대로 정언 유착의 산물이라면, 시민의 발언권을 위임받아 권력을 견제하는 언론의 사명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다. 내막이 어찌됐건 조선일보의 추측보도는 친자 여부와 무관하게 자체로 이미 보도윤리의 경계를 한참 넘어갔다. (119쪽)


게으른 진영 논리와는 차원이 다른 남재일의 날카로운 시선

ⓒ천년의상상
남재일의 글에는 누군가에게는 뜨끔, 따끔하고 누군가에게는 시원, 상쾌한 예각(銳角)이 살아 있다. 그의 날카로운 각이 향하는 대상은 두루뭉술하지 않고 구체적이다. 그의 예각은 싸잡아 비판하는 저인망식 그물이 아니며 정확한 포인트에서 낚아 올리는 낚싯대에 견줄 수 있다. 전지적, 전(全)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라도 하는 양 '사회를 마냥 질타'하는 무책임한 언론 매체 칼럼에 진절머리 나는 사람이라면, 다분히 진영 논리에 따라 상대편을 비판 아니 비난하는 데 급급한 무슨 논객이니 정치 평론가니 하는 이들의 말이 지겨운 사람이라면, 남재일의 낚싯대가 반가울 것이다.

정치와 윤리를 동시에 상상하는 정치적 개인이 많아져야 승리한 도그마의 등 뒤에 숨어 가면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나운 노예근성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야 몸은 보수 입은 진보, 생산은 보수 소비는 진보, 광장에서는 진보 밀실에서는 보수로 분열돼 있는 정치적 분열증이 개선되지 않을까. (…) 입은 교육받은 자율적 민주 시민인데, 몸은 소비자본주의의 완벽한 소비자이거나 권위적 조직의 충성스러운 조직원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마도 역사적 상처에서 비롯된 의심의 깊이가 깊어 스스로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데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175쪽)

내가 남보다, 그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교수 필자들 중 흔한 유형), 더 높은 도덕적 입지나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이른바 사회 명망가 필자들 중 흔한 유형) 남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노라 자처하는 태도가 우리 시대의 많은 글에 그 얼마나 넘쳐나는지. 그런 글의 특징은 가르치려 들고 꾸짖으려 든다는 점이며, 도무지 생각하게 만들 줄 모른다는 점이다. 반면 남재일의 글은 '자, 우리 이거 한 번 함께 생각해봄이 어떠하신지'라는 메시지를 바탕에 깔고 있는 발제(發題)에 해당한다.

웹스터 인용사전에서 'happiness'를 검색해봤다. 작가와 철학자들이 던져놓은 행복에 관한 100여 개의 생각이 나열돼 있다. 이 중에서 우선 행복의 구성 요건에 관해 언급한 것부터 살펴보자. 돈을 행복의 최우선 조건으로 꼽은 사람은 아주 드물다.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믿을 만한 행복의 보증수표는 많은 수입이다"라는 말을 남겨놓았다. (…) 찰스 디킨스는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19.96파운드면 행복하고, 그 반대면 불행하다"고 했다. (…) 대체로 행복과 돈의 관계를 보는 다른 현인들의 시각도 디킨스와 비슷하다. 돈의 양 자체가 행복을 보증한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오스틴밖에 없다. (…) 100여 개의 명언 중 행복을 외부적인 조건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행복의 조건으로 돈을 직접 언급한 것은 10%도 안 된다.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든 양심과 도덕을 강조한다. (49∼50쪽)

나는 문학 장르를 제외한 모든 글과 책에 대하여 그것이 담은 지식 정보의 풍부함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재미는 책 읽는 보람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제인 오스틴이 그랬구나, 찰스 디킨스가 그렇게 말했구나! 물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글의 논지와 전개 속에서 지식 정보가 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가 좀 거시기 하지만 '벗기 위해 줄거리가 진행되는 것과 줄거리가 진행되기 위해 벗는 것'이 외설과 예술의 차이라고 한다면, 지식 정보가 맥락 없이 남발되는 글과 책은 전자(前者)에 해당한다. 남재일은 결코 아무 곳에서나 벗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보통 내공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지식 정보에 관한 한 나(표정훈)는 시도 때도 없이 벗고 싶어지기에 하는 말이다.

남재일의 글에서 화끈한 끝맺음이나 일도양단식 결론은 찾기 어렵다. 이 점을 아쉬워하는 독자도 있을 법하다. 솔직히 필자도 아주 약간은 그랬다. 칼을 쓰는 검객과 비슷한 맥락에서 필봉 아니 필검(筆劒)을 휘두르는 이른바 논객, 우리 시대에 부쩍 흔해진 것 같기도 한 논객의 모습을 남재일의 이 책에서 기대했다면 더욱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화려한 끝맺음은 지적(知的) 게으름의, 일도양단식 결론은 편 가르기 진영 논리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어떤 사태를 깊이 파고들어 숙고할수록 두 쪽으로 가르는 포폄은 무리(無理)라는 것, 글자 그대로 이치가 없다는 것이 흔히 드러나지 않던가. 삶과 세상의 진리 혹은 진실이란 분명한 결론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디테일과 노이즈에 있다는 것. 온갖 주의, 주장, 의견, 관점은 제 나름의 일리(一理, 하나의 이치)를 갖추었으니 그 일리를 무시하는 것도, 그 일리가 전적인 진리임을 주장하는 것도 당치 않다는 것. 바로 이러한 것들을 깨달은 '섬세의 정신(esprit de finesse)'이 쓸 수 있는 글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이 책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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