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의 11월, 열두 번째 강의는 경북 경주와 울산광역시 울주 일대에서 이뤄집니다. 늦가을 기운이 가득한 11월 15(토)∼16(일)일, 1박2일로 진행됩니다.
울주에는 지리산 쌍계사 앞을 흐르는 화개동천과 가야산 해인사 앞을 흐르는 홍류동천과 함께 영남의 삼대동천이라 불렸던 운흥동천(雲興洞天)이 있습니다. 그 동천의 끝에는 조선시대 경전을 발행하는 간경소로 이름을 떨쳤던 운흥사 옛터가 가을 정취에 뒤덮여 있을 것입니다. 첫날, 그곳을 자늑자늑 걸어서 찾아갑니다. 둘째 날에는 경주 일대의 폐사지 다섯 곳을 들릅니다. 지난 해 가을 찾았던 곳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한 곳으로 선별하였으며, 남산 기슭의 신인사지라 일컫는 곳에 있는 탑곡마애조상군과 소금강산 기슭의 굴불사지 사면석불 앞에 서면 그 아름다움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할 것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다음은 이지누 교장선생님의 폐사지 답사기인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과 2007년 <불교신문>에 연재한 마애불 이야기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울주 간월사터
간월사터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에 있다. 간월사는 관월사(觀月寺)로도 쓰는데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관월사기(觀月寺記)>에 따르면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또한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지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636년에 당나라로 가서 7년 동안 정진을 한 후 643년에 돌아왔다. 그러니 간월사를 창건하고 자장이 당나라로 향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폐사는 임진왜란 즈음이며 인조 12년인 1635년에 다시 중창했으며 1836년, 모진 흉년을 견디지 못한 채 다시 폐사되고 말았다.
절터에는 보물 제370호인 간월사지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 2기 그리고 금당자리의 초석이 남아있다. 항마촉지인을 한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지닌 불상은 법의를 통견으로 걸쳤으며 절터 아래 새로 지은 법당 안에 모셔져 있으나 광배는 사라지고 없다. 대좌는 앙련의 상대석과 팔각 복련에 안상을 새긴 하대석으로, 그리고 맨 아래에는 다시 안상을 새긴 팔각대석이 놓여있다. 즉 중대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대석이 또 하나 놓인 셈이다.
그 하대석은 간월사에 있었던 또 다른 불상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 어디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법당 앞 오른쪽에는 팔각 대좌인 듯한 석물이 있는데 안상 안에 서수가 새겨진 듯하나 마멸이 심해 뚜렷하게 알아볼 수는 없다. 또 그 위에 석종형 부도가 올려져 있으나 제 짝은 아닌 듯하다.
금당자리는 동쪽으로 앉았으며 탑은 삼층석탑이 남북으로 놓여있어 전형적인 쌍탑1금당의 가람구조를 보여준다. 탑은 남북의 것이 모두 같은 삼층석탑이며 1층 몸돌에 각 8구의 인왕상과 문비를 새겨 통일신라 하대에 유행된 장식적인 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인왕상은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하며 대개 사찰의 문이나 부처님이 계신 가장 바깥쪽을 지키는 화엄신장이다. 왼쪽의 밀적금강(密迹金剛)은 금강저를 든 채 입을 벌리고 있으므로 <아>, 코끼리보다 힘이 백만 배나 더 세다는 오른쪽의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입을 다물고 있으므로 <훔>이라고도 한다.
울주 운흥사터
운흥사터는 울산광역시 울주구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 뒤편에 있다. 절터로 가기 위해서 오르는 계곡인 운흥동천(雲興洞天)은 해인사의 홍류동천(紅流洞天)과 함께 경남 지방에서는 손꼽히는 풍치를 자랑한다. 홍류동천은 발조차 담그지 못하지만 이곳 운흥동천은 마음껏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한적한 곳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의 끝닿은 곳이 운흥사 옛터이다. 흐르는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금당자리이며, 계류를 건너 산길로 5분 남짓이면 부도골에 닿을 수 있다.
운흥사터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해 2003년에 보고서를 냈다. 그에 따르면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에 따른 암자가 13, 스님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말에 지공(指空)선사가 중창했으나 임진왜란에 불탔다. 다시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대휘(大希)선사가 중창하였으며 1864년에 간행된 <대동지지>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무슨 연유로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른 절터와는 달리 수습된 유구들에게서 석탑이나 석불 그리고 철불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이하다. 물론 작은 불상편들은 발견되었지만 여느 다른 절집에 모신 정도의 불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다른 곳보다 물을 담을 수 있는 석조가 많아 넷이나 된다. 또 한지를 만들 때 닥을 잘게 부수는데 사용하던 ‘딱돌’ 그리고 16종에 달하는 목판이 673장이나 남아있으며 절 앞으로는 닥을 불릴 수 있는 맑은 계류가 흘렀다.
이것은 매우 주목해야 할 일이다. 산골의 사찰에서 목판을 새기고 또 그것을 찍을 수 있는 종이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은 이 절의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불법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니 폐문하고 선정에 들어 불법을 닦는 절집과는 달리 봐야 할 것이다.
목판은 지금 통도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절터에는 부도와 석조 그리고 딱돌과 같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시적사에도 이곳에서 나온 부도 2기가 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것이 없을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조차 보려고 애쓰는 것이 절터 답사의 백미라면 운흥사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곳이다.
경주 남산 신인사터(탑곡마애조상군)
경주 남산 기슭의 탑곡마애조상군은 보물 제201호이다. 거대한 자연 암석의 사면(四面)에 빼곡하게 불계가 표현되었으며 나라 안에 있는 사방불 중 가장 숭엄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또한 불보살만을 새기는 여느 마애조상군과는 달리 승상과 나무, 비천, 탑, 신장상과 같은 것들이 함께 새겨져 있어 부처님 세계를 표현하는 불화와도 같은 회화적 구성이 돋보인다. 이는 이 사방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며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북면에는 9층목탑과 7층목탑 사이에 천개를 쓰고 계신 여래좌상이 있으며 9층목탑 위로는 여래에게로 향하는 비천상 2구, 양쪽 탑 아래는 인왕상을 상징하는 사자가 각각 한 마리씩 새겨져 있다. 서면에는 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양쪽 곁에 보리수로 보이는 나무가 있다. 또 여래의 머리 위와 왼쪽 허리쯤에도 비천이 새겨져 있다.
동면은 이 사방불 중 가장 화려한 곳으로 여래좌상과 양쪽 협시보살이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은 모두 6구가 새겨져 있다. 흔적이 가뭇없는 좌협시 머리 위에는 가릉빈가로 짐작되는 조각이 있다. 동면의 오른쪽 끝 아랫부분의 스님 한 분은 무릎을 꿇은 채 여래에게 차 공양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염불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면의 왼쪽 끝부분을보면 보리수를 양쪽에 두고 그 사이에 선정에 든 스님상이 있으며 그 왼쪽 옆 독립된 바위에는 앉아계신 스님이 새겨져 있다.
동면에서 남면으로 에돌아가는 길의 바위에는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으며 불전함이 놓인 바로 앞 바위에는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린 스님과 나무 한 그루가 새겨져 있다. 남면에는 삼존불이 오롯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오른쪽 끝에 보리수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우협시불 아래, 곧 석조여래입상 뒤로 감실처럼 움푹 파인 곳의 나한 1구까지 모두 제대로 보려면 오전 7시경부터 오후 4시 가까이는 머물러야 한다.
신라의 사면석불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경 사불산의 사불바위는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3권 탑상편에 이르기를 “죽령 동쪽 백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진평왕 9년 정미(丁未)에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일대석(一大石)이 붉은 비단에 싸인 채 하늘로터 산정(山頂)으로 떨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원문에는 진평왕 9년, 갑신(甲申)이라고 되어 있지만 진평왕 9년은 587년으로 정미년이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이 그곳으로 찾아가 돌에 예배를 올리고 바위 곁에 절을 창건했으니 그 절이 문경 대승사(大乘寺)다.
<삼국유사>에는 이렇듯 하늘에서 내려온 사불바위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땅에서 솟아나온 사불바위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그것은 경주 동천동 소금강산 기슭의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불바위이다. 절 이름 그대로 땅에서 부처를 파냈다는 뜻이니 이곳과는 전혀 반대인 셈이다. 굴불사의 사불바위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의 35대 왕인 경덕왕이 백률사로 나들이를 갔는데 산 아래에 닿으니 땅 속에서 염불 외는 소리가 났다. 그리하여 그곳을 파보게 했더니 지금의 사불바위가 있어 그 곁에 굴불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솟은 부처바위들이 하필이면 사불바위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굴불사의 사불바위를 캐내게 한 경덕왕의 재위 기간은 742~764년이므로 진평왕 재위보다 160여 년 뒤이긴 하지만 말이다. 더구나 예산 화전리의 사불바위 같은 경우는 백제의 것으로 이곳의 사불바위보다 그 조성시기가 수십 년 정도 앞선다는 조사보고가 있다. 그러고 보면 대개 이렇듯 독립적인 사불바위의 조성 시기는 비교적 마애불의 조성이 시작된 초기에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인 셈이다.
하지만 뚜렷하게 사면에 부처님을 새긴 까닭이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신라에서 조성된 사불바위는 신라 자체가 불국토(佛國土)라는 개념이 전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있다. 원시시대의 산악숭배신앙에 이어지는 오대신앙은 방위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이며 사불바위 또한 방위개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대신앙은 산봉우리 네 곳에 모신 부처님에 더해 가운데에도 부처님을 모셨지만 사불바위는 그곳이 놓이는 그 땅 자체를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보는 것이다. 곧, 불국토이므로 그 곳에는 언제나 부처님이 상주하고 계시다는 전제 아래 바위의 네 면에 부처님을 새겼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는 것이다.
이는 그 이후 나타나는 석탑의 몸돌에 조성되는 사방불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속초 진전사지의 3층석탑을 예로 보라. 탑의 몸돌에는 각각 눈에 보이는 네 면에만 여래를 조성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언제나 또 다른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던가. 그는 곧 불사리인 셈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은 흔히 말하는 사방불(四方佛)이지만 되짚어 보면 모두 다섯 분의 부처님을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곧, 탑심(塔心)에 존재하는 부처님과 함께 불국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사불바위는 이미 이 땅에 상주하고 계신 부처님과 함께 화엄적인 불국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5(토)∼16(일)일 폐사지학교 제12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15일(토)>
서울 출발(아침 7시, 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울주 간월사지→점심식사(언양불고기)→은하마을회관→운흥동천 걷기(약 3.5km)→울주 운흥사지→운흥동천 걷기(약 3.5km)→은하마을회관→경주 저녁식사 겸 뒤풀이(돼지고기쌈밥)→숙소(펜션남산) 도착 후 자유시간, 취침(다인실)
<11월 16일(일)>
아침식사(7시, 순두부백반)→경주 숭복사지→경주 괘릉→경주 남간사지→경주 창림사지→ 경주 신인사지(탑곡마애조상군)→점심식사(물비빔냉면)→경주 굴불사지→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12강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비, 강의비,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바로가기). 아울러 폐사지학교 카페(http://cafe.naver.com/pyesajischool)에도 많이 놀러 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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