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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동학 농민의 길을 따라 걷다"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15>] "독재에 대한 저항은 '웃음'"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도보순례를 한다. 일차적으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독려하는 목적이다. 아울러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새겨진 분열의 역사를 되새기고, 역사적 진실을 마주할 내면의 용기를 회복하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순례단은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도보순례를 시작한다. 지난달 30일 팽목항을 떠나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들은 순례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글을 <프레시안>에 싣기로 했다. 도보순례단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10월 6일 고창으로 떠나다. 늦은 오후 고창에 도착했다. 어느덧 해가 읍내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도보순례단과 만나기 위해서는 두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터미널에서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모양성과 신채호 판소리 박물관으로 향했다. 월요일이라 휴관이다. 지난해 와서 보았던 신채호의 삶과 열정도 보고 멋진 고창 판소리 한 자락 들을 기회를 놓쳤다. 모양성 중턱에서 보니 해는 붉어지고 서해 쪽에서 부는 바람이 청량하다. 1980년 이곳에서 떨어져 반신불수의 몸으로 시를 쓰는 산골소녀 시인 옥진이와 팽목항 저 넘어 차가운 바다에서 우리 곁을 떠난 아이들을 생각한다. 생각은 따뜻한 햇살과 맑은 바람 속에서 밀려드는 죄책감과 슬픔으로 이어져 기도한다. “주님, 우리 곁을 떠난 아이들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아픈 몸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에게 사랑의 영감과 건강을 허락하소서.”

오후 늦게 도보 순례단 일행을 만났다. 춘천에서 서울을 거쳐 고창에서 그들을 만났으니 결코 가벼운 만남은 아니다. 형제들이 모여 한데 사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 즐거운 일이고, 생명과 평화의 길을 함께 걷기 위한 남녘땅에서의 만남도 그분 보시기에 즐겁고 기쁜 일이다. 인사를 나누는 순례단 모두의 모습과 목소리와 몸짓이 깨끗하고 소박하고 살갑다. 그들 안에서 평화와 생명의 기운이 전해져 온다. 조금 있으니 차 한 대가 멈추고 스님 한 분이 내린다. 미소사 도의 스님이다. 오늘 순례단의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무량보시하려고 달려오신 것이다. 그날 밤 순례단은 도의 스님이 우려내 따라 주는 차와 미소사의 중창에 얽힌 자비와 인연 이야기로 귀가 뚫리고 영혼이 열리는 희열을 맛보았다. 다음 날 아침 구수한 냄새에 눈을 떴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주방에서 여러 가지 곡식을 넣어 누룽지를 끊이고 있었다.

7일 정읍으로 떠나다. 갑오농민 혁명의 결전지 황토현으로 가는 길은 늘 무겁다. 오늘도 그렇다. 그곳으로 향하는 걸음은 늘 슬프다, 내면 깊은 곳에서 비장함이 올라온다. 이 무거움과 슬픔은 왜 이리 끝날 줄 모르는가…. 시간이 흘러도. 이 때 길옆에 심어진 분재처럼 생긴 예쁜 조경용 소나무들을 보고 동행한 신부가 한 마디 한다. “인간의 탐욕이 만든 병신 나무들이다. 나무는 나무답게 커야 한다.”

이 또한 슬픈 일이다.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이우원 선도사의 짧은 이야기를 들었다. 1894년 민초들이 겪는 아픔과 분노가 2014년 오늘 우리가 겪는 아픔과 분노와 다르지 않다는 선포였고 사자후였다. 크지 않은 체구와 간결한 말투, 강인한 눈빛, 그분이 입은 감물 들인 민복 등이 녹두 장군과 닮은 듯하다.

8일 김제로 떠나다. 순례단 목표는 6.25 전쟁참전 기념비다. 길에서 과수원 하는 분이 농장에서 방금 딴 단감 한 봉지를 주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농사꾼 한 분이 아이스크림을 주었다. 한 신부의 친구가 시원한 음료수를 사들고 외딴 시골길을 어렵게 찾아 왔다. 이 모든 기쁨과 치유의 만남이 세월호 희생자들이 준 선물이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그들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걷고 이었다. 김제의 최종 목적지는 4세기 축조된 저주지 유적지인 벽골제로 바뀌었다. 대나무로 만든 거대한 용 두 마리가 우리를 반긴다. 백성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청룡의 제물이 된 단야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다르지 않으리라. 김제는 내가 태어나 자라고 배운 곳이다. 내 감성과 언어와 꿈꾸는 세상의 큰 그림이 그려진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땅의 부드러움과 겸손, 베품과 품어 앉음을 삶으로 배웠다. 나는 오늘 그 땅에 감사하고 그 땅을 내신 주님을 찬미했다.
9일 전주로 떠났다. 출발지는 모악산 경계 자리에 있는 원평성당이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신학대학원생과 성북 나눔의집 가족들이 내려왔다. 이들도 내가 고창에서 순례단을 만날 때 받았던 그 느낌을 받았을까…. 오늘 순례단은 아이들을 포함 60여명이 되었다. 어른과 아이들이, 형제와 자매들이, 서울에서 내려 온 사람과 전주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어울려 걷는 모습은 참 아름답고 숭고하다. 1894년 갑오년 전주를 향해 걸었던 농민들의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고 숭고했을 것이다. 이날 저녁 식사와 잠자리는 전주성공회 신자인 김운주, 김정임 부부가 당신들 집에서 손수 준비했다.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홍어삼합을 처음 먹었으리라. 많은 손님들을 모시면서도 시종일관 웃음과 겸손, 자유와 절제를 잃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 자체이다. 이 부부는 집을 설계할 때부터 이웃과 손님이 함께 할 수 있게 1층을 설계했다고 한다. 식사 후에는 민요와 판소리와 장고를 하는 분들과 진도아리랑을 함께하며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독재와 억압에 대한 최대의 저항은 낭만과 웃음이다, 라는 말을 실감했다. 이분들은 후배 한의사를 초대해 순례자들에게 침과 뜯을 놓아 주었다. 다음날 순례단은 강경 금강 길에서 김정임 씨를 다시 만났다. 전날 순례단의 모든 빨래를 빨아 말려서 작은 차에 싣고 이곳 강경 금강 길까지 찾아 온 것이다. 그분이 웃으면서 하신 말씀의 울림이 크다. “올 때 길을 몰라 많이 헤맸는데 금강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았어요. 다음에 곡 다시 와봐야겠어요”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순례단의 길은 힘들고 때로는 헤맬 수 있다. 그러나 생명평화 도보순례단과 참여자와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지막 고백은 이와 같을 줄 믿는다.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의 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와봐야겠습니다”라고.

“희생자 그들이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우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걸으면서 이웃과 우리 서로 안에서 이를 눈으로 보고 온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


<1> "팽목항에 내려가며 느낀 흐린 날의 여운"

<2> "우리는 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미안했던 걸까?"

<3>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생명의 길을 걷고 또 걷는다"

<6> "강변 꽃길 대신 매연 가득한 길을 걷는 이유"

<7> "자식 잃은 부모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8> "세월호 희생자 이름 적은 공책을 품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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