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이재봉 교수의 '문학예술 속의 반미'를 연재합니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미 관계를 살펴보며, 구체적으로 그 반세기 동안 발표된 소설, 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문학예술 작품에 묘사된 미국의 부정적 모습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비뚤어진 관계를 살펴보는 취지입니다. 편집자
1989년 1월 다시 학교에 돌아갔지만, 1년 넘게 쉬다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강의조교에서 잘려 있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종합시험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미국정치를 전공하는 게 제 격이라는 생각으로 미국의 정당과 선거에 관한 논문을 구상했었지만, 반미주의에 관한 책을 번역하면서 공부한 김에 그에 관해 학위논문까지 쓰고 싶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의 반미주의"를 주제로 삼고 <뉴욕타임스> 1980년 1월 1일자부터 1989년 12월 31일자까지의 기사를 분석하기로 했다. 주중엔 50면 안팎, 일요일엔 약 100면으로 발행되는 일간신문 10년 치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읽었다. 그 무렵엔 정치학논문도 계량분석 (quantitative analysis) 방법을 사용해 쓰도록 권유받던 터라 통계학을 배워 사회과학 통계프로그램 (SPSS)을 돌렸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계기로 반미운동이 시작되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주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반미시위가 폭력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반미시위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이유가 정당하다며 이해한다는 편이 그렇지 않다는 편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론 틀은 심리학의 '좌절-공격 가설' (frustration-aggression hypothesis)을 이용했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아 전두환 군부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기대가 '좌절'되어, 오히려 군부에 도움을 준 미국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공격' 행위로 나타난 게 반미데모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형식적으로는 10년 치 신문을 자료로 삼고 통계 프로그램과 심리학 이론을 이용해 그럴싸하게 꾸몄지만 너무도 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10년 치를 읽으며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한국에서의 반미운동이 1980년대 이전에도 간혹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그 무렵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한국이 1980년대 이전까지 "반미의 무풍지대"였다거나, 세계에서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가 외쳐지지 않은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고 말했다.
1950-60년대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일하다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책을 펴내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그레고리 헨더슨 (Gregory Henderson)은 <워싱턴포스트> 1986년 7월 1일자에 "한국인들은 왜 미국에 대항하는가"라는 기고문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전까지 한국에서의 반미는 나무 속의 생선처럼 희귀했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아무튼 <뉴욕타임스>를 통해 얼핏 공부한 바로는 한국은 1980년 이전에도 "반미의 무풍지대"가 아니었다. 1945년부터 반미의 미풍이 일었는데 때로는 강풍이나 돌풍도 불다가 광주항쟁을 계기로 폭풍 혹은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이었다. 그래서 1945년 8월 해방 이후 한미 관계를 깊이 공부하며 한국에서의 반미주의를 제대로 밝혀보고 싶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삼아야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운 것이다.
여기서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1983년 8월 미국에 들어가 1990년 12월 석사학위를 받았으니 무려 7년 반 만이었다. 남들은 대개 2년 안팎에 받는 것을. 그 동안 다양한 일을 겪었다. 미국에 들어가자마자 뉴욕시립대학에 입학했는데 강의를 잘 알아듣지 못해 유학 포기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뉴욕시내 험한 동네에서 일하느라 차에 소총을 갖고 다니다 불법무기 소지죄로 유치장에 갇힌 적도 있다. 뉴욕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텍사스로 옮긴 뒤에는 벼룩시장에 장사판을 크게 벌여놓고 온갖 물건을 팔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학교 성적은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바닥을 기었다. 공부 마칠 때까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석사과정을 밟으며 결혼해 아들 둘을 얻었다. 그리고 어머님에 이어 아버님까지 잃었다.
뉴욕과 텍사스에서의 석사 과정이 가시밭길이었다면 하와이에서의 박사 과정은 낙원 생활이었다. 1991년 8월 하와이로 옮기기 직전까지 장사로 떼돈을 벌어놓은 데다 아내가 돈벌이를 하느라 난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아침 일찍 도시락 두 개 싸들고 학교 가면 밤늦게 귀가하느라 저녁밥을 같이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는 아내의 볼멘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쟁쟁한 교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장학금도 탔다. 전 과목 A학점을 기록하며 종합시험과 논문 모두 싱거울 정도로 쉽게 통과했는데, 모두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쓰는 과정이 특히 재미있었다. 주제를 반미주의로 이미 정해놓은 터라 첫 학기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하와이대학교 정치학과는 꽤 커서 교수가 35명이었고 대학원생이 100명 정도였는데, 거의 모든 교수와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책이나 신문 잡지 등에서 반미에 관한 글을 보면 알려주거나 복사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이라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모았다. 반미주의에 관해서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보다 많은 자료를 수집한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품을 정도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동아일보> 1945년 8월 15일자부터 45년 치 기사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읽기도 했다.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극우신문의 하나가 되었지만,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전까지는 가장 읽을 만한 신문이었다.
1992년 가을학기가 시작된 며칠 뒤, 여름방학 때 서울을 다녀온 경제학과의 한국인 친구가 나에게 큰일 났다며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김진웅 경북대학교 역사학교수가 1992년 6월 펴낸 <한국인의 반미감정>. 한국의 반미주의에 관해 이미 책이 출판되었는데 똑같은 주제로 논문을 쓸 수 있겠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 쭉 읽었다. 다행히 1980년대의 반미운동만 다루고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인들 사이에서 반미감정이 크게 고조된 사실을 목격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며, 1980년 '광주사태'를 계기로 반미감정이 대두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1980년대의 반미운동에 관해서는 이미 나도 석사논문을 썼고 적지 않은 논문과 책도 나온 터였다. 1945년부터의 반미운동에 관해 박사논문을 쓰겠다는 구상에 문제될 게 전혀 없었다.
1993년 가을 진짜 큰일이 터졌다. 필리핀 정치에 관해 연구하는 백인 친구가 내 연구실로 급히 찾아왔다. 시카고대학 정치학석사 출신으로 나에게 비밀 외교문서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등 학업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던 동료였다. 미국의 모든 대학에서 1992년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 목록을 살펴보다가 1945년부터 한국의 반미주의를 다룬 논문 제목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김덕환 (Duk-Hwan Kim)의 "한국에서의 반미주의 (Anti-Americanism in South Korea), 1945-1992."
이 논문은 아메리칸 대학교 (The American University)에서 1992년 7월 통과된 국제관계학박사 학위논문이었다. 나는 1994년 졸업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내가 구상하던 논문 제목 "한국에서의 반미주의, 1945-1994"와 마지막 숫자만 달랐을 뿐이다. 그 논문을 즉시 주문해 거의 400쪽에 이르는 글을 단숨에 읽었다. 내가 다루고자 했던 주제와 내용 그리고 연구범위와 방법 등이 너무 비슷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며칠을 궁리하다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그가 전혀 다루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문학예술 분야. 내 논문의 한 장(章, chapter)으로 다룰 내용을 논문 전체로 확대시키기로 했다. 덕분에 정치학도가 몇 달 동안 소설과 시,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 속에 푹 빠져 지내는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 반미주의의 문화적 표현, 1945-1994"라는 정치학박사 학위논문을 쓰게 된 배경이다.
1994년 8월 귀국해 9월부터 강의를 맡았다. 한 멋쟁이 여학생이 새내기 시간강사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종강하는 날 그녀가 면담을 신청했다. 몇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내 서명이 곁들여진 박사학위 논문을 선물로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미관계에 관한 300쪽 이상의 영어논문을 읽을 수 있겠느냐며 나중에 한글로 옮겨 책으로 출판하면 한 권 주겠노라고 했다. 게으름 때문에 20년이 흐르도록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난 8월,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중국 공부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다 얼마 전 헌책방에서 내 책 한 권이 눈이 띄어 샀다고 했다. 1988년 소위 편역서로 펴냈던 <반미주의>. 내 책꽂이에 아직 남아있는 두 권을 빼고는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하게 되길 바라는 책이다. 앞에서 얘기했듯, 석사과정을 밟다가 귀국해 난생 처음 처음 내본 책이라 그 무렵엔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여대생이던 조카가 서점에 갔다가 진열대 구석에 놓인 그 책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맨 앞에다 옮겨놓고 왔다는 얘기를 듣고 대견스러워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책을 인용하기도 하고 만화책 소재로 쓰기도 하는 것을 보고 흐뭇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쓴 뒤로는 그 책에 심한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다. 이문열의 <금시조>(金翅鳥)에 잘 묘사되어 있듯, 여기저기 도서관이나 책방 등을 뒤져 이 책을 수집해 모두 불살라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편, 지금은 신분을 공개하기 곤란한 분이 지난 8월 말 내가 '이재봉의 법정 증언' 연재를 끝내자 글을 잘 읽었다며 바로 다른 글을 이어 써달라고 강요하다시피 권했다. 그가 권유한 주제와는 좀 다르지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두 달 전 황대권 선생이 헌책방에서 구한 1988년의 <반미주의>를 대체하고, 20년 전 내 박사학위 논문을 선물로 원했던 여학생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 "한국 반미주의의 문화적 표현"이라는 20년 전의 논문을 번역하며 수정 보완해 풀어보련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