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동안 국내 산림정책은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복원하려는 녹화사업이나 자원화사업 등 가시적이거나 물질경제적인 1차원적인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 일상에는 숲, 생태, 둘레길, 올레길, 등반, 산악이벤트, 가족캠핑, 주말농장, 전원생활, 귀농 등 산림이 주는 무형의 가치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산림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향유하고자 하는 것이 산림복지 개념이다. 그런데 복지하면 비용 문제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산림복지는 최소비용으로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최상의 복지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도시숲을 비롯해 산림복지 서비스를 체계화하려는 움직임이 산림청 주도로 시작됐지만, 아직 초기단계다. 이에 따라 산림복지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참고할 산림복지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기획은 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 기획취재 지원을 받아 가깝게는 일본, 멀리는 유럽의 프랑스, 스위스, 영국, 독일 등 해외 5개국과 국내 산림복지 현장 취재로 이뤄졌다. 총 7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일본에서 취재팀이 택한 지역은 간사이(관서) 지방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모가모 신사 경내에 위치한 교토의 '타다스노모리', 그리고 아홉 곳의 국립 공원으로 구성된 대단지 공원 '오사카 부민의 숲' 등 유명한 도시숲이 밀집한 지역이다.
오사카와 교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도시다. 2010년 기준으로 오사카 인구는 2700만 명, 교토 인구는 1500만 명으로, 순위로 따져도 일본 안에서 각각 3위, 7위를 기록한다.
타다스노모리와 오사카 부민의 숲은 이 같은 대도시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다. 두 도시숲 모두 도심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내 거리에 있어 도시민들의 생활권 안에 있다. 일을 마친 저녁이나 한가로운 주말에, 큰 부담 없이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신의 숲' 교토 타다스노모리
교토의 타다스노모리는 번화가에서 버스로 고작 15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취재진이 이곳을 찾은 때는 지난달 16일 오전. 교토 가와라마치 역에서 버스를 타고 시모가모진자마에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도 못 뜰 만큼 따가운 9월의 태양이 내리쬐었다. 저 앞에 그늘이 보인다 싶어 뛰어갔더니 이곳이 바로 '시모가모 신사'의 입구였다. 바깥 날씨와 다르게 신사 입구에서부터 시원하고 상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모가모 신사는 교토에 있는 2000여 개 신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사다. 이끼 낀 건물의 지붕, 빛 바랜 나무 기둥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신사 부지를 지나 하늘천(天) 모양의 대문 '토리이(鳥居)' 쪽으로 향하자 뒤로 울창한 숲길이 보였다. 가운데 보행길을 사이에 두고 하늘을 향해 쭉쭉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취재팀을 맞은 신사 홍보 담당자 히가시라 마사후미 씨는 "2000년 전의 원시림을 최대한 보존해 나무들 대다수도 600년 이상되었다"며 "걷다 보면 이 숲이 가진 오랜 세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원시림'이지만, 원시 상태 그대로 방치를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방문객들이 보기 좋고, 걷기 좋게 숲길이 널찍하게 나 있었다.
히가시라 씨는 타다스노모리 숲을 시모가모 신사가 재단을 만들어 관리한다고 했다. 운영비는 재단이 직접 산림보존회나 시모가모신을 숭배하는 단체들, 그리고 일반 개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마련한다. 타다스노모리 씨 역시 '신직'에 있는 이다.
지자체나 국가가 아니라 신사가 숲을 직접 관리·운영하는 것이 힘에 부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히가시라 씨는 '씨익' 웃음을 보였다.
"일본의 신도는 일본의 역사와 함께하는 고유의 신앙입니다. 숲이나 산, 나무, 강, 바람에 신이 있다는 자연숭배가 신도 사상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러니 신사와 신사 주변 숲은 하나로 여겨 신사에서 관리하게 된 것이지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신사가 주변 숲까지 직접 관리하게 됐단 설명이다. 일본에서는 타다스노모리뿐 아니라, 여타 신사 주변 숲도 신사가 직접 관리·운영하는 게 일반적이라고도 그는 설명했다.
그들의 '도시 숲' 관리 철학 "최대한 손 대지 않는다"
이처럼 숲 역시 신의 영역이므로, 신사에서는 도시 개발 등의 이유로 숲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단지 한 세대의 인간만을 위한 자연이 아닌 만큼, 최대한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하는 게 타다스노모리 운영의 철학이다. 숲 어디에도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나 조형물이 없다. 서울 도시숲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아스팔트 길이나 반짝이는 조명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훼손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 과거엔 약 495만 제곱킬로미터 면적의 원시림이었던 타다스노모리는, 중세 한 때엔 '전란'으로 크게 훼손된 적이 있다. 이어 메이지 시대 정부 정책으로 도쿄돔 3개 수준인 약 12만4100제곱킬로미터 규모로 그 면적이 크게 감소한 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신사를 나라가 관리했어요. 그러다 보니 정책 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신사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관리가 힘들어진 정부가 관리 권한을 각 신사에 넘겼죠. 지금은 모든 신사 주변 숲이 종교 법인으로 됐기 때문에 정부가 개발 압력을 넣을 수 없습니다."
히가시라 씨는 되도록 숲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해 죽은 나무까지도 웬만하면 그대로 쓰러진 자리에 둔다고 했다. 그가 이 얘길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지난해 불어닥친 큰 태풍 때문에 허리가 꺾인 나무들이 놓여져 있었다. 마침 쓰러진 나무들 주변에 터전을 만들어 사는 너구리 무리들이 지나갔다. 타다스노모리 숲엔 이처럼 너구리가 많아, 너구리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졌다.
"비장한 마음 먹고 숲에 갈 필요 없어…숲은 일상"
울창한 숲길을 걷는 내내 새 지저귀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도 상쾌하지만 오랜만에 도시 소음이 아닌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여기저기서 경쾌한 웃음소리와 조잘대는 소리도 들렸다. 신이 깃든 신성한 곳에서 떠들어도 되는건지 히가시라 씨에게 물어봤더니, 그가 작게 웃었다. 그는 "이곳은 엄숙한 곳이 아니"라고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그렇다고 비장한 마음을 먹고 와야하는 곳이 아닙니다. 타다스노모리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도심 속에 이정도 규모의 숲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그림도 그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있는 마음 편히 방문할 곳이지요."
그의 말대로 연못가엔 노인 10여 명이 타다스노모리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고 있었다. 간사이 지방에서 사는 이들로 꾸려진 그림 동호회 회원들이다. 한 회원은 "그림을 그리러 종종 이곳에 온다"며 "올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고 상쾌해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특히 주목됐던 것은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방문객이 꽤 많았단 점이다. 아울러 신사의 방문객 대부분이 노년층일 거란 예상과 달리, 히가시라 씨는 이곳 방문객의 70~80%가 20대 여성이라고 했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산책하러 잠깐 들르는 식이지요. 일본에서는 영적인 기운이 많은 곳을 '파워 스팟(power spot)'이라고 부르는데, 시모가모 신사도 그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업이나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젊은 여성들이 마음의 위로를 받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곳에 많이 옵니다. 신사 입구에 '아이오이노 야시로(相生社)' 라는 아주 조그만 사당이 있는데, 짝궁을 찾아주는 걸로 유명해 많은 젊은이들이 좋아합니다."
타다스노모리는 원시림으로 보존 가치가 크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삶에서 유리돼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일상 한 가운데 자리하며 그들에게 산림 복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 어떤 곳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사람들이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도심숲의 전형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오사카 부민의 숲…"평등한 숲을 지향합니다"
교토가 타다스노모리 덕분에 도심숲으로 유명하다고 한다면, 오사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자연 관광 단지로 알려져있다. 오사카만에 펼쳐진 자연 습지와 같이 자연 자원을 활용한 단지가 잘 조성돼있어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그중 '오사카 부민의 숲'은 오사카에서 손에 꼽는 자연 관광지로, 특히 도시 근교에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오사카 부민의 숲은 한 군데가 아니라 도시 곳곳에 퍼져 있다. 오사카 부(일본에서 '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가리키는 행정구역 단위를 뜻한다. 오사카 부와 쿄토 부 두 곳이 있다. 편집자)가 기존 아홉 개의 국정 공원(우리나라 국립 공원 개념. 편집자)을 부 차원에서 정비한 것이다.
현재 오사카 부민의 숲은 부가 선정한 산림관리회사인 '녹색공사'가 2006년부터 총괄 관리하고 있다. 취재진은 지난달 17일, 숲 방문에 앞서 녹색공사의 임원들인 쓰치야 케이스케 씨와 이와미 미야코 씨를 만나 숲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녹색공사는 오사카 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청소, 안내, 시설 유지 등 숲과 관련된 모든 관리를 맡고 있다. 이들이 숲 운영 시 가장 우선시하는 원칙은 '평등'과 '안전'이다. 쓰치야 팀장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노약자와 장애인들도 숲 이용에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또한 개발이 아닌 보존에 방점을 맞춰 운영한다고 했다. 이들은 "지금이나 예나 개발을 하자는 사람은 많지만, 지키자는 차원에서 국정 공원으로 된 것이니만큼 최대한 보존하는 입장"이라고 했다.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도시 숲
오사카 부민의 숲은 아홉 곳 모두 각기 특색이 다르다. 전통 문화 체험 공간으로 유명한 곳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생태 학습장으로 유명한 곳도 있다. 숲을 인위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서도 이용객을 늘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모은 결과다.
각 숲의 프로그램, 이벤트 등은 대개 자원봉사자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숲을 좋아하고 자주 찾는 이들이 프로그램을 제안하면, 녹색공사와 함께 또는 자율적으로 모임 및 회의를 거쳐 기획안을 만든다. 이후 기획안이 공사 등의 허가를 통과하면 실제로 운영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쓰치야 팀장과 이와미 씨는 자원 봉사자들이 숲 운영에 적극 참여하는 점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봉사자들은 이벤트 기획뿐 아니라 직접 숲 해설을 하거나, 환경 관리에도 나선다. 쓰치야 팀장은 부 차원의 보존 노력 덕분에 부민들도 스스로 숲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활 수준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복지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커지는 거 같습니다. 한국이 지금 그렇듯, 일본도 1970년대 오사카 산을 다 깎은 후에야 그것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사카 부에서는 '녹화 구상'이라고 해서 도시 내 녹지 구역을 3배 이상 늘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책이 홍보가 되면서 조금씩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는 의식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바쁜 일상 속 '깜짝' 등산 가능한 호시다원지
녹색 공사의 추천을 받아 취재진은 암벽 등반 코스와 '별의 그네'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는 '호시다원지(星田)'를 직접 찾아가 봤다. 오사카 중심지인 난바 역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곳으로 키사이치 역에서 내리면 된다.
지하철 열에서 나와 주택가 바로 옆 산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금세 관리사무소가 나온다. 쉼터와 어린이를 위한 암벽 등반 시설이 잘 갖춰진 사무소에서 '별의 그네'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다만 공원보다는 등산로에 가까우니 운동화를 꼭 신길 권한다. 정상까지는 줄곧 오르막을 타야 하며, 경사가 심하지는 않아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국의 산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있다면, 일본 전체가 화산지대인 만큼 고사리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한참 숲을 즐기던 즈음, 10여 명의 노인이 인사를 해왔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왔다는 이들 중 한 명은 이날이 무려 101번째 부민의 숲 방문이라고 했다. 오사카에 산다는 그는 "오사카 부민의 숲의 다른 코스도 많이 갔지만, 이곳(호시다원지)은 특히 걷기가 좋아 많이 왔다"고 했다.
호시다원지의 트레이드마크, 길이 280미터, 높이 50미터의 '별의 그네'에 다다르자 듬성듬성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노인뿐 아니라 젊은 남녀 커플, 어린 아이들과 함께온 가족들도 보였다. 외부에 녹이 슬게 해 내부 재료가 녹이 스는 것을 방지하도록 철과 크롬을 섞어 만든 터라 다리 색깔은 예쁘게 붉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아래로 푸른 녹지가 한눈에 보이니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호시다원지가 오사카에서 교토 가는 길에 위치한 덕에 다리 옆 전망대에 오르니 두 도시의 시내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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