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7년 선조(1552~1608년)가 즉위했다. 문정왕후와 명종의 척신들 사이에서 억눌려 있던 선비들이 열망하였던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는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평가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인재가 수풀처럼 많은 조선 유학의 전성기였다. 이황(1501~1570년), 조식(1501~1572년), 이이(1536~1584년), 기대승(1527~1572년) 등 기라성 같은 유학의 대가들이 새로운 임금 선조를 직접 가르치거나 보좌하며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성리학은 사실 유학과 다르다. 유학이 생활 윤리를 강조하였다면 성리학은 글자 그대로 ‘태어난 바의 마음의 이치를 밝혀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불교적인 사유를 포함하는 이상적 철학 윤리다. 이 와중에 선조의 목표는 만백성의 어버이가 아니라 성리학의 성인이 되었다.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난 명종의 죽음은 꿈속에서조차 왕이 될 수 없었던 선조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루어진 방계승통, 왕비의 자식이 아닌 중종 빈의 손자인 선조의 즉위는 당연히 정통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벼락출세는 그만큼 많은 부채를 동반하는 것.
선조의 즉위에 기여한 신하들은 왕 노릇을 제대로 하라고 철인 정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통성 없는 왕에게 신하의 조언은 거부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왕은 주눅 들었다. 그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즉위 초반 선조의 목소리를 둘러싼 선조와 신하 사이의 설전이다.
'목소리가 맑지 않다'는 진단에 율곡 이이는 "젊어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생긴 질병이니 색을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선조가 "사람 목소리는 각자가 다르다"고 답하자, 이이는 "학문과 정사에만 힘쓰면 되지 (다른 것을) 경계하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면 되겠느냐"고 힐난한다. 한마디로 바늘방석이었다.
정통성은 취약하고 학문 연마로 신하들을 압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속마음을 숨기고 내면의 스트레스를 삭였다. 그 후유증은 바로 몸의 이상으로 이어졌다. 소화 불량이었다. 즉위 7년(1574년) 소화 불량이 계속되자 '평위산' '이공산' '웅신산' 등의 처방이 이어진다. 신하들은 유학에 근거해 "원기가 떨어지고 담음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유학자와 달리 선조의 심신 그 자체에 주목했던 내의원 의관들은 이 소화 불량이 심상치 않은 징조임을 알았던 듯하다. 처방에 '연자육'을 가미한 것이 그 증거다. '연(蓮)'의 약효는 한의학의 사유 속에 뿌리내린 불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것은 욕망의 불을 차가운 물로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예로부터, 연꽃의 씨방인 연자육은 욕심에 사로잡혀 오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크다 여겨졌다. 특히 얼굴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다리가 약해지는 상열하한의 증상을 치료한다. 처방에 마음을 안정시키는 연자육이 들어갔다는 것은 질병의 뿌리를 의관들이 눈치 채고 치료에 응용했다는 것이다.
"적을 만났더라도 반드시 선처함이 있어 질질 끌지 않아야 한다." "호령을 발하더라도 극진히 하지 않아서 일이 끝내는 유야무야로 돌아간다." "매양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찌하지 못한다." "우유부단하다." 이런 신하의 힐난에 선조는 동문서답으로 일관한다. "나도 주역의 이치를 깨닫고 싶다."
거꾸로 선조는 임진왜란 7년 동안 무려 열다섯 차례나 양위 파동을 일으킨다. 성군이 되라는 신하에게 왕 노릇 못하겠다며 지청구를 놓은 것이다.
"나는 원래 심장병이 있는데, 지금은 병 뿌리가 굳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머리가 아프며, 귀가 멍하다. 나이도 노쇠기에 접어들었는데, 이런 자에게 만기(萬機)를 책한다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귀가 멍한 것은 사실 돌발성 난청의 시작이었다. 선조의 귀울림, 즉 이명 증상은 실록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재위 28년(1595년) 8월 8일, 선조는 두통, 귀울림 증세를 처음으로 호소했다. 재위 29년(1596년) 5월 11일에도 또 한 번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선조는 이렇게 고통을 호소한다.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침을 맞지 않으면 낫지 않을 듯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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