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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가로 치닫는 일본, 그 내밀한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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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가로 치닫는 일본, 그 내밀한 속살

[프레시안 books] 시마조노 스스무 외 <역사와 주체를 묻다>

일본 이와나미강좌(岩波講座)의 '근대 일본의 문화사' 시리즈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문화'라는 틀에서 근대 일본을 재검토한 연구 작업이다. 패전 후 일본은 미군 점령(1945∼1952,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까지) 그리고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된 전후(戰後) 부흥기(1950∼1954)를 거쳐서 고도성장기(1955∼1973, 오일 쇼크까지)를 거치면서 급격한 사회 구조적 변동을 겪어왔다. 따라서 근대 일본 문화 역시 끝없는 항쟁과 조정, 전략과 전술의 충돌과 교차 속에서 경계가 계속 변화하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루려는 <역사와 주체를 묻다 : 1955년 이후 2>(소명출판, 2014년 6월 펴냄)는 이 시리즈의 완결편으로서, 총 7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 : 전후 일본의 종교

ⓒ소명출판
먼저 살펴볼 건 시마조노 스스무(1948∼)가 쓴 「일본 종교의 전후 체제: 전진하는 주체, 화합에 따른 평화」이다. 전전(戰前) 일본 종교 체제의 전체 틀은 '국가 신도', 즉 국가 법령(재정적 뒷받침과 특수 지위 부여)에 따라 관리되던 신사 신도(神社神道)에 의해 규정되었다. 전전 메이지(明治) 헌법 체제에서는 '국가 신도(国家神道: 교육칙어나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등의 형태)'였으나, 패전 이후 GHQ(연합군 총사령부)가 '신도지령(神道指令, 1945년 12월 15일 발포한 일종의 각서)'을 내린다. 기존의 '국가 신도'를 개혁하기 위해 천황의 '인간 선언' 등을 거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다.

또한 1951년 제정된 '종교법인법(신고제에 기반을 둔 '국가 인증제')'에 따라 '종교의 자유'의 제도적 장치와 함께 다양한 종교들의 '종교 연합 체제'의 틀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조인된 직후인 1951년 10월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처음으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등 다수의 각료가 참가한 '예대제'(例大祭, 신사의 제사)가 거행되고, 다음 해인 1952년 10월에 열린 예대제에는 쇼와(昭和) 천황 부부가 참배했다. 천황가의 조상신을 모시는 국가 신도의 총본산 이세신궁(伊勢神宮) 내궁의 연도별 참배객 수 역시 가파르게 급증했음도 흥미로운 점이다.

흔히 미군 점령기는 종교적 주체성이 불명확한 일종의 '정신적 공백기'라 평가되나, 오히려 종교적 '주체'를 형성한 활발한 정신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1920∼1970년대까지 일본의 종교는 '불교'에서 '신흥 종교'로 장기간에 걸친 변동이 진행되었다. 전후 일본의 신흥 종교들(대표적으로 창가학회(創価学会) 등)에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종교 근대화와, 종교 자 체가 갖는 배타성이 공존하게 된다. 말하자면 다원적 시민사회의 질서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도 세력 확충을 도모하는 여러 종교 세력들 간의 각축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 종교의 전후 체제'를 넘어서는 조짐들('옴진리교' 등)도 표면화되고 있다.

제1부 일상으로의 소급 : 고도성장의 빛과 그림자

사회학자 우치다 류조(内田隆三, 1949∼)의 「가파른 성장의 미스터리」는 패전 후 고도성장기의 성공과 그 이면의 불안을 당시 인기 있던 일본 문학의 미스터리 장르(추리소설)를 통해 살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자릿수 대의 가파른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에, 정작 추리소설에서 그리는 성공 스토리는 가정의 유대를 끊고 피로 물든 가족의 비극사를 즐겨 다루고 있었다.

우치다 류조는 소설 형식뿐만 아니라 영화나 TV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어 큰 인기를 모았던 세 작품인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의 <모래그릇(砂の器)>(1961), 미즈카미 쓰토무(水上勉)의 <기아해협(飢餓海峡)>(1963), 그리고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의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1970)을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전후 일본 사회에서 성공 스토리는 '고향을 떠나'서 새 아이덴티티로 변모하는 과정이자 공간적 격차를 더욱 증폭시켰다. 인간성 상실과 가정 파괴를 연결하면서, 여러 사회 문제들을 비판하는 설화적·서사적 구조로 구성됐다. 이처럼 미스터리 장르는 성공 스토리에 담긴 침전된 불안감을 뒤흔들었다.

공적으로는 전국총합개발계획(全国総合開発計画, 흔히 젠소(全総)라 불림)은 '태평양 벨트'(4대 공업 벨트)로 급격한 인구 이동을 낳았다. 또한 선거-후원회-낙하산 인사-파벌 등으로 연동된 '토건국가 정치 공동체' 혹은 '이익 유도형 정치'를 통해 실현되었다. 사적으로는 가정이라는 생활 규범이 형성되어 성별 역할 분업의 체계를 통해 유지되는 '마이홈 메커니즘'이 창조되었다. 이처럼 고도성장기 일본의 변화는 단순한 산업 시스템이 아닌, 일종의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미스터리 장르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현실 속에 내포된 일종의 자기기만과 자의성을 조명하는 형식 중 하나였다.


제2부 역사의 장소

사상사 연구자 미야케 요시오(三宅芳夫, 1969∼)는 「'근대'에서 '현대'로 :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마쓰시타 게이이치(松下圭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를 대조하면서 일본의 전후 사상과 '현대' 담론의 변모를 살펴본다.

먼저 마루야마는 근대 일본 사상사의 과제로 제시했던 국민주권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국가의 이념은 '현대'의 독점자본과 결합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본다. 즉 이념(자유와 민주주의)이 현실(자본)에 강하게 구속되면서 민주주의가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고 봤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결책 역시 '근대 국가' 모델에서 배제된 개인-국가의 중간 매개들(조합 등)인 자발적 결사의 네트워크를 끌어온다. 이는 확실히 그의 작업이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Weber, M.)의 관점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 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마쓰시타는 '근대'라는 틀 자체가 계몽주의의 산물이라 보고,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변화를 재맥락화한다. 독점 자본과 복지국가와 내셔널리즘의 3자 결합, 즉 산업 자본에서 독점 자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증했던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하는 정책 요구가 강화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위험한 프롤레타리아에서 국가에 귀속 의식이 농후한 순화된 '대중'으로 그렇게 변모해갔다. 내셔널리즘에 노동자 계급이 통합되었기 때문에, 파시즘이란 '20세기 시스템' 그 자체에 내재된 가능성이 현재화한 것이라 봤다. 따라서 그는 노동 운동이 압력단체처럼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지역 내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주목하게 된다.

「쇼와(昭和)의 종언 : 천황제의 변용」에서 정치사회학자 구리하라 아키라(栗原彬, 1936∼)는 전전-전후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의 변용 과정을 추적한다. 전전 천황은 상상의 공동체의 중심이자, 사회 질서를 서열화하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신격화되었다. 전전 천황을 '성스러운 신체'로 신격화한 것은 일본인들이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었다. 본래 천황의 본체란 텅 비었으나, 성스러운 '자리(座)'이자 기축(機軸)이기에, 궁성(宮城) - 제도(帝都) 도쿄 - 신국(神国) 일본, 나아가 '대동아공영권'까지 일종의 환상의 공동체가 동심원 모양으로 확장해 갔다.

특히 나환자 박멸 과정에서 쇼와 천황의 순행에 앞서 시행된 예방적 구금(아버지)과 황태후에 의한 은혜로운 구제(어머니)라는 이중적 형태로 확립되었다. 말하자면 근대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의 영역인 교육, 의료, 복지 등이 모두 '보호/구류'라는 지배 구조로 전개되었다. 물론 일제 강점기 '소록도'의 형성 과정(메이지 천황의 하사금으로 건립된 자혜의원 등)도 그러하다. 이처럼 전전의 일본 사회는 천황제 하에서 '충량한 주체인 신민(臣民)'이자, 의료·건강·위생 영역의 '생산적 양민'이 일체화되었다.

전후 비록 신성함을 잃은 천황이지만, 생태주의자·문화인·과학자·가부장 등 다양한 천황상이 재구축되면서, 다시금 '일본의 자연', '일본 문화', (신성) 가족 등의 가치가 생산되었다. 1980년대 말 쇼와 천황의 병세 악화, 죽음, 장례, 새 천황의 즉위로 이어진 과정에서 중간 계층과 매스미디어는 일본 전체의 자숙 구조를 주도했고, 일종의 공동성의 대체물을 찾는 젊은이들의 표류 과정에서 마치 '화살표'처럼 유혹했다. 말하자면 천황제는 여전히 이중 장치(친화/폭력)로 작동되며, '종언' 후에도 새로운 국체로서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다카하시 테쓰야(高橋哲哉, 1956∼)의 「전쟁 주체로서의 국가·국민 : 야스쿠니 문제에 대하여」는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라는 현실 문제로부터 국가 신도와 천황제, 그리고 이곳이 전쟁의 상징적 공간임을 비판한다. 흔히 한국과 중국 정부 등이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으로, 'A급 전범(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수상을 포함한 14명)의 분사(分祀)론'이나 '제2의 (비종교) 국립 추도 시설(예컨대, 현재 야스쿠니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치도리가후치(千鳥が淵) 전몰자 묘원'의 재구축 혹은 신설 등)' 등을 대안으로 거론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 인식 차원에서 'A급 전범' 합사만을 과도하게 문제 삼는 관점을 비판한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불문에 붙이고, A급 전범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위험을 지적한다. 다음으로 정교분리의 차원에서 전쟁 수행 주체인 국가가 전몰자를 기념하는 '다른 대안'을 모색하자는 주장을 모두 비판한다. 그는 국가가 전쟁에서 국민의 충성과 희생적 헌신을 확보해서 인정하는 방식에 더 큰 위험이 있기에, 야스쿠니 문제와 관련해 전사자를 국가의 '존귀한 희생'으로 '현창(顯彰)'하는 수사-논리를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 오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 신사에 단체로 참배를 온 사람들이 '8·15 영령에 감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숭상하는 국민 행진'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제3부 경계를 다르게 읽다

아시아&중동학자 레오 칭(Leo T.S. Ching, 1962∼)은 「지역적인 것의 글로벌화, 글로벌한 것의 지역화 : 후기 자본 시대의 대중문화와 아시아주의」에서 오늘날 대중문화의 유통·소비 방식에 대해서 재고찰한다. 그는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의 전집 제1권에서 「동양의 이상(東洋の理想)」(1903)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 : 서구에 대한 방책>(1994)』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한 세기 가까이 차이 나는 두 저서이지만, 일본은 서양과 동등하게 자리매김하면서도 아시아 내부로도 서열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고 있다.

이는 19세기 후반 이래 일본이 굳건히 지켜온 일종의 관계성이었다면, 이제 그 차이 자체를 상품화해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 결과,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생산과 상징적 재생산인 문화는 모두 '지역주의적 사고'의 경향을 띠면서도 지역주의 연합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아시아 지역주의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효과 혹은 반응인가라는 논의보다는, 오히려 아시아 지역적 정체성을 어떻게 상상하게 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1948∼)는 「여성의 전후 문화사 :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넘어서」에서 전후 일본 여성이 '소비 주체'로서, '생산을 통한 자기실현'이 아닌 '소비를 통한 자기실현'을 추구해 왔다고 봤다. '소비 주체'로서 여성이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에 대해서 시대별(1∼5기)로 상세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따르면, 1기(1945∼1955) 전후 부흥기는 생존의 필요를 위해 생산·소비하던 소비 사회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 2기(1955∼1973) 고도성장기에는 '샐러리맨과 전업주부 체제'가 성립되면서 이른바 '생활 혁명'을 통해 여성은 '소비 대중'으로 등장한다. 사회학자 오치아이 에미코(落合恵美子)가 이른바 '가족의 55년 체제'라 명명한 '샐러리맨과 전업주부 체제'가 성립되면서, 여성이 본격적인 '소비 대중'으로 등장한 것이다. 3기(1973∼1985)는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장기간의 산업 구조 전환기이다. 소단위 취향 그룹이 형성되어 비교적 계층적 위계 없이 평등해 보였기에, 요코나라비(横並び, 옆으로 나란히 늘어선 모습) 소중기(小衆期)라 명명한다. 4기(1985∼1991)는 엔고와 버블 경제기로서, 자산 가치가 불로소득을 증가시켜 발생한 계층 분화로 '신(新) 신분 사회' 시기였다. 5기(1991∼)는 구조 전환기(소비 사회 후사(後史))로서, 버블 붕괴와 하시모토(橋本) 구조 개혁의 실패 속에서 장기간 불황에 돌입하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비 사회는 막을 내린다고 진단하고 있다.

전후 일본에서 여성의 소비는 '생산을 통한 자기실현'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극적인 선택이었으나, 소비문화는 세련과 퇴폐를 넘나드는 농익은 경지였다. 그러나 버블의 향수마저도 장기 불황으로 끝나버린, 전 방위로 확대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본 여성들 역시 비혼과 저출산은 심화되고 있다. 또한, 직장 여성의 노동 시장 참가와 관련해서도 여전히 '배우자 공제'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기도 했다. 어쩌면 전후 일본에서 엄격한 성별 분업에 기초한 '여성의 소비 주체'라는 틀은 이미 균열투성이이며, 생산-소비의 분리를 넘어 '젠더의 재배치'로 논의의 초점이 변화된 것이다.

21세기 변곡점에 선 일본 주체

현 시점에서 본다면 이 시리즈의 저자들이 주류학자라는 느낌도 들고, 이들의 '역사학'이 가진 지향점이 그리 새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의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 콜로니얼 이론들'을 통해서, 기성 일본 역사학의 안팎에서 새롭게 재구축해서 새로운 서사의 지평을 창출하려던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연구자 자신의 학문적 분야에 기반을 두면서도, '탈영역적인 연구 질문들'을 새롭게 제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란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며 동적인 매력을 가진 새로운 물음을 던지는 장이기에, 큰 연구 질문과 포괄적인 논쟁들의 독해에는 상당한 배경지식이 필요한 '난해한 텍스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 시리즈는 2002년 1월부터 2003년 4월 사이에 출간되었는데, 20세기 말 근대 역사와 문화를 재검토하는 세계적 연구 추세에 대한 일종의 일본적 대응이기도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21세기 변곡점에 선 일본의 사회 변동의 향방과 주체 변용을 예측하려는 독자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출발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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