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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롭다! 김제고을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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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허허롭다! 김제고을 지평선

10월 고을학교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3강으로,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곳으로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고도 부르는 김제·만경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진 전라북도 김제(金堤)고을을 찾아 갑니다. ‘징게맹게’는 전라도 사투리로 김제와 만경, ‘외배미들’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트인 땅을 의미합니다.

▲가을 가득한 김제평야의 지평선 ⓒ달랏
10월의 끄트머리라 비록 누런 황금 들녘은 볼 수 없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허허로운 벌판에서 늘 빼앗기기만 했던 농민들의 한숨소리와 아우성소리를 바람결에 흘깃 들어봅니다. 또 모악산(母岳山) 아래에서 후천개벽의 세상을 열고자 했던 강증산(姜甑山)의 자취와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영글어 있는 미륵신앙 성지인 금산사(金山寺)를 둘러봅니다. 아울러 동진강(東進江)과 만경강(萬頃江)이 서해와 만나는 하구(河口)에서 만추(晩秋)의 강 풍경도 감상하고 김제고을의 읍치구역(邑治區域) 유적들도 구석구석 찾아다닐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3강은 10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금산사IC(10:00)→금산사(미륵전/노주/석련대/오층석탑/혜덕왕사 진응탑비/당간지주/석종/육각다층석탑/석등 11:30)→금산사산성석문→강증산유적지(증산교 교당/영대/구리골약방/청도대향원 12:30)→점심식사 겸 뒤풀이(14:00)→김제읍치구역(동헌/내아 14:30)→김제향교(15:00)→벽골제(지평선 16:00)→망해사(17:00)→서김제IC→서울(20:00)의 순입니다.

▲김제고을 답사로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3강 답사지인 김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벼의 고을’ 김제
김제는 조선시대에 김제(金堤), 만경(萬頃), 금구(金溝)의 3개의 현(縣)이 합쳐진 고을입니다. 김제는 동진강 유역 쪽의 구릉지에 자리하였고 만경은 만경강 유역 쪽의 구릉지에 있으며 금구는 내륙 깊숙이 모악산 아래 위치하고 있습니다.

김제는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馬韓)의 영토로서 54개 부족국가 가운데 가장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벽비리국(辟卑離國)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이었는데 ‘벽비리국’이나 ‘벽골군’은 모두 ‘벼의 고을’ 또는 ‘볏고을’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김제가 일찍부터 논농사의 중심지였기에 나온 말입니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난 후 주류성(周留城, 지금의 부안)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을 펴던 부흥군이 662년 12월에 본거지를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가 두 달 후인 663년 2월에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는데 이 기간 약 60일은 김제가 백제 부흥군의 수도였던 셈입니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에 지방 조직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꿔 주(州), 군(郡), 현(縣) 체제를 강화하면서 지명도 한자(漢字)로 고쳤는데, 이에 따라 ‘벽골’은 김제로 바뀌었고 만경, 금구 등의 이름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김제는 ‘금의 언덕’ 또는 ‘황금의 벌판’이란 뜻입니다.

이 시대에 특기할 것은 851년(문성왕 13)에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근거지인 청해진(淸海鎭)이 폐지되면서 그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백제부흥군이 이곳으로 왔던 것과, 청해진 주민을 이곳으로 옮긴 사실은 김제고을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에 김제지역이 부윤(富潤)과 거야(巨野)로 개칭되었으며 1143년(인종 21)에는 김제현과 금구현으로 나뉘었고, 예종 때 다시 만경현, 김제현, 금구현이 차례로 현령관(縣令官)으로서 독립 행정구역이 되고 전주목 관할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 3)에 김제현이 다시 김제군으로 승격되었고 1620년(광해군 12)에는 만경현이 한때 김제군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며 1637년(인조 15)에는 만경향교, 1676년(숙종 2)에는 금구향교가 세워져 교육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하하는 왜적을 무찌른 금구대첩(金溝大捷)의 현장이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김제지역에서는 왜구들의 ‘코베기’가 극성을 부렸습니다.

조선 후기 철종 때는 전국적으로 민란(民亂)이 발생하여 금구지역에서도 수백 명의 농민들이 삼정(三政)의 문란과 지방관리의 행패를 이유로 민란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농민봉기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이어졌는데 김제 지역에서는 김봉년(金奉年), 김덕명(金德明) 등 2천여 명이 백산(白山)에 진을 치고 관군에 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제는 동쪽의 산줄기, 남쪽과 북쪽의 물줄기, 그리고 서쪽으로는 서해에 둘러 싸여있는 지형적 특성을 지니며 남쪽의 동진강을 경계로 정읍, 부안과 이웃하고 북쪽의 만경강을 경계로 군산, 익산과 이웃하며 동쪽으로 모악산을 경계로 전주, 완주와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진봉반도(進鳳半島)가 서해로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김제의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모악산(母岳山)을 중심으로 국사봉(國師峰), 상두산(象頭山) 등 해발 고도 500~700m의 산지가 북북동 및 남남동 방향으로 발달하였고 금구면과 금산면의 경계에는 구성산(九城山)이 동서 방향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동북동 방향으로 봉화산(烽火山), 진봉산(進鳳山), 국사봉, 니성산으로 이어지면서 서해로 빠져들고 중앙의 평야 지대에는 황산(凰山)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발 고도 5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들이 부분적으로 발달하였는데, 그래서 김제지역에서는 주변보다 고도가 높으면서 약간 비탈진 언덕에 해당하는 곳도 ‘산’이라고 부르는 곳이 많습니다.

북쪽엔 만경강, 남쪽엔 동진강
김제의 물줄기는 중부 구릉지의 낮은 분수계(分水界)를 중심으로 북부의 만경강 수계와 남부의 동진강 수계로 크게 나뉘며 만경강은 북쪽의 시 경계를 따라 서해로 흘러들고, 동진강은 남서쪽의 경계를 따라 서해로 흘러들며, 원평천(院坪川), 신평천(新坪川), 두월천(斗月川)은 김제의 중앙을 관통하고 서해로 흘러듭니다.

평야는 크게 하천이 실어온 토사가 쌓인 충적평야와 오랫동안 산지가 깎여 나가 평탄해진 침식평야로 나뉘는데 김제, 만경평야는 충적평야와 침식평야가 함께 발달한 곳으로,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든 충적평야 이외에 곳곳에 해발 고도 10∼30m의 작은 구릉성 산지가 산재한 침식평야가 발달해 있습니다. 김제 지역에서는 충적평야를 ‘뜰’이라 하고 침식평야를 ‘야산’이나 ‘고라실’ 이라고 부릅니다.

김제고을의 읍치구역(邑治區域)은 성산(城山) 아래에 있었는데 김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시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군현(郡縣)으로서 읍치구역의 격이 높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관아(官衙)와 향교(鄕校)의 건물은 그에 따른 위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관아와 향교가 인접한 거리에 함께 보존되고 있어서 조선시대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당시 읍치구역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데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함께 있는 드문 예로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정무를 보던 중심 건물로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667년(현종 8)에 김제군수 민도(閔燾)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事七軒)’으로 고쳤고 다시 1881년(고종 18)에 중건하였는데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동헌이 공무를 수행하는 곳으로서 외아(外衙)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내아는 지방관의 가족이 살림하는 곳으로 내동헌(內東軒)이라고도 합니다. 김제내아는 1667년(현종 8) 김제동헌이 지어질 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뒤 동헌이 수리되거나 중건될 때 함께 개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는 1981년에 복원, 보수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있는 내아로서 관아의 건축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김제향교(金堤鄕校)는 1790년경에 작성된 <김제군읍지(金堤郡邑誌)>에 의하면 당시 임원으로 장의(掌議) 1명, 제임(齋任) 2명, 유사 2명이 있었으며 교생(校生)의 정원이 50명인 소설위(小設位)였습니다. 대성전(大成殿)은 1404년(태종 4) 창건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향교 건물 전체가 소실될 때 함께 불탔다가 1635년(인조 13) 현재의 위치에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중건한 뒤 5성, 4현과 동국 18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김제향교에는 대성전 외에 명륜당, 만화루, 동무와 서무, 동재 등의 건물이 비교적 양호한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금구향교(金溝鄕校)는 원래 위치는 금구동헌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서혈산 아래에 중건하였으나 지세가 좋지 못하여 1675년(숙종 1)에 현 위치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성전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김제금구만경 향교지(金堤金溝萬頃鄕校誌)>(1996)와 금구향교 앞뜰에 서 있는 전교 송방섭이 쓴 중수 비문(碑文)에는 1390년(공양왕 2)으로 적고 있으며, <문화재지(文化財誌)>(1990)와 <금구읍지(金溝邑誌)>(1981) 및 전북대학교 박물관이 펴낸 <김제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1985)에는 1405년(태종 5)으로 밝히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대(宋代)의 6현(賢), 동국18현을 배향하고 있고 명륜당, 만화루, 동재, 서재도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만경향교(萬頃鄕校)는 1407년(태종 7) 창건되었으며, 1790년경 편찬된 <만경읍지(萬頃邑誌)>에 의하면 장의(掌議) 1인, 유사(有司) 2인이 있었고 교생(校生)은 50명이었습니다. 대성전은 1407년에 만경동헌 서편에 있는 송전리에 창건되었으나 1620년(광해군 12)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현재의 위치에 이전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송대 6현, 동국18현이 배향되어 있고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남아 있습니다.

▲미륵신앙 성지 금산사 ⓒ전라북도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김제는 해안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백제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와 군현의 치소(治所)에 군사적 방어를 위하여 테뫼식 산성을 많이 쌓았는데, 성산성(城山城), 월성토성(月城土城), 난산성(卵山城), 사창산성(社倉山城), 만경읍성(萬頃邑城), 성덕산토성(聖德山土城), 동지산리토성(東之山里土城), 금구산성(金溝山城), 상두산성(象頭山城), 명금산토성(鳴琴山土城), 금산사성(金山寺城)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제의 주성(主城)인 성산성과 크고 작은 전초호(前哨濠), 그리고 황산(凰山)을 중심으로 한 난산성 및 월성 등은 서해안 일대의 해적들을 방어하여 내륙 지방의 안전을 지킨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들입니다.

성산성은 김제의 주성으로 백제 때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곽은 원래는 토성과 석성의 이중성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담장의 원형은 상실되고 성터만 남아있습니다. 성채는 옹성이 넷, 샘이 여섯이 있었다고 하며 산성에서 동쪽인 시내 쪽은 성곽이 보이지 않고 남쪽, 서쪽, 북쪽은 지금도 성곽의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성산성이 피지산(避支山) 또는 피성(避城)으로 기록되고 있어 이 피성이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며 또한 백제 풍장왕(豊璋王)이 한때 주류성(周留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던 곳이라는 견해도 있어 이곳 성산성은 백제 주류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월성토성은 원평천과 금구천이 합류되는 동쪽의 월성평야, 즉 옛 금구천 유역 가운데에 있는 구릉지대의 해발 약 20m 정도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는데, 월성평야를 수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진지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성토성 터에서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토성은 원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축조 경위는 밝혀진 것이 없으며 토성은 논으로 개간되면서 구릉을 모두 깎아버려 그 원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난산성은 난봉동에 있는 황산(121m)을 중심으로 백제가 쌓은 원형의 석성으로 그 둘레가 2㎞나 되었다고 합니다. 김제의 주성인 성산성을 보호하는 호익역(護翼域)이 월성(月城)과 난산성이었는데 월성은 거의 사라져 마을이 되었고 난산성도 터만 남아 있으며 달리 도리봉성터로도 불립니다.

사창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용지면사무소 뒷산(55.7m)의 산 정상을 테뫼식으로 둘렀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으며, 사창이 있었다고 사창산이라 합니다. 사창(社倉)은 조선시대 지방의 각 촌락에 설치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으로 의창(義倉)과 같은 성격이나 의창은 국영이고 사창은 사(社, 행정단위로 지금의 면)에서 경영하는 것입니다. 고곡(古穀)을 대출하고 무이자로 신곡(新穀)을 받기도 하고,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기도 하며,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사창산 등성이에선 썩은 쌀알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만경읍성은 삼국시대의 읍성으로 북서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남쪽으로는 호수가, 동쪽으로는 멀리 모악산 기슭에서 잔잔히 뻗어 내려온 평원지대가 두산(杜山)과 연결되어 있는 후록산(後麓山)에 자리잡고 있는데 후록산은 백제시대에 두내산(豆內山), 두릉(杜陵)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870년대 편찬된 <읍지(邑誌)>에는 “성첩은 삼리에 걸쳐 둘러 있고, 높이 5척, 옹성은 네 곳, 성문세 곳이다”라고 했으며 만경읍성의 성곽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것은 만경읍이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만 일제강점기 초에 허물어져 이제는 그 원형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금구산성은 봉두산(130m)의 정상을 둘러친 테뫼식 토성으로, 산의 동쪽 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한 석축이 100m 이상 남아 있으며 이같은 석축의 흔적이 200m 가량 추가로 확인되었고 서, 북, 남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였는데 이러한 자연 성벽을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900m에 이릅니다. 봉두산의 정상에는 기와 조각이 도처에 보일뿐만 아니라 제법 큰 초석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석재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묻혀 있으며 <금구읍지(金溝邑誌)>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백제시대의 산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산사성지(金山寺城址)는 삼국시대에 금산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절 입구에 쌓은 석성으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아치형의 석조물인 성문 주변에 남북 방향으로 성벽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습니다. 이 석성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예부터 금산사를 수호하는 성문이었으며 달리 ‘견훤성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문의 북쪽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개천 건너에는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일대에 축대를 쌓으면서 성벽을 쌓았던 석재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성문 주변에는 아직 성벽의 기단석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제의 봉수대는 심포리와 선암리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에도 이 두 곳에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심포리 길곶봉수대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사이로 서해에 고개를 내민 진봉면의 끝자락 봉화산(84m) 정상에 있는데 지금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지만 봉수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연 석재들이 직경 10m에 걸쳐 무덤처럼 쌓여 있으며 그 중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돌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전기부터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암리 봉두산봉수대는 금구면 선암리 봉두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로 <금구읍지>에는 단지 “남산에 불을 피웠다”고만 전해지고 있는데, 금구현이었을 때 현의 중심이 당월마을이었고 당월마을의 남쪽에 봉두산이 있기 때문에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이 지금의 봉두산일 가능성이 높아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 봉수’가 선암리 봉두산봉수대일 개연성이 무척 높습니다.

최초의 인공저수지 벽골제
김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벼농사 중심의 농업지대를 형성하게 된 것은 동진강 유역의 김제평야와 만경강 유역의 만경평야의 개간과 간척사업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김제군, 만경현, 금구현에 각각 수십 개에 달하는 제언(堤堰, 수리용 둑)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벽골제(碧骨堤)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저수지입니다.

백제는 3세기 말에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아우르고 노령(蘆嶺) 이북까지 진출하였으며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노령 이남의 잔존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오늘날의 전라남도 해안지방까지 판도를 넓혔습니다. 이 시기는 고이왕으로부터 근초고왕에 이르는 80여 년으로 고대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다진 시기인데 기후가 온난하고 넓은 평야를 가진 서남지방이 지배 아래 들어오자 수전도작(水田稻作)을 장려하고 관개시설을 확충해 경제적 기반을 다져 나갔습니다.

벽골제의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로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김제에 벽골제를 쌓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369년 남방경략(南方經略)을 도모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790년(신라 원성왕 6)과 고려 현종 때와 1143년(인종 21)에 고쳐 쌓은 후 1415년(태종 15)에 다시 쌓았는데 현재는 길이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 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치면서 원형에서 많이 변형되었습니다.

벽골제의 수문(水門)은 원래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둘로 갈라졌고 수문도 사라졌는데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의 돌기둥과 중심거의 바닥돌이 남아 있습니다. 제방을 따라 차례로 장생거, 주민 김귀남 집 마당에 있는 중심거, 그곳에서 800m가량 떨어진 지점에 경장거가 있으며 유통거와 수여거는 흔적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벽골제비(碧骨堤碑)는 1415년(태종 15)에 벽골제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비문이 마멸되어 1684년(숙종 10)에 신털미산[草鞋山] 정상에 중건되었다가 비석의 보호를 위해 제방 북쪽에 옮겨 놓았는데 닳아서 명문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고대국가에서 백성들이 세금을 내는 방식은 토지를 경작하면 내는 전세(田稅),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부역(負役), 그리고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하는 공납(貢納)의 세 종류인데, 공려(貢礪)란 국가에서 지역에 부과하였던 숫돌을 공납하는 것으로 김제의 고사리 공려터는 고려시대에 공납품이었던 숫돌을 제작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진봉면 고사리 지역에서는 매년 숫돌 6,000편을 다듬어 나라에 바쳐야 했는데, 여기에는 인력 동원과 막대한 재정이 소요됨으로써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이에 봉호당 강원기(姜元紀)가 자신의 제자로서 당시 전라도 감사로 와 있던 이지로(李芝老)에게 부탁하여 숫돌 제작소를 태인(泰仁)으로 옮기게 했다고 합니다.

금산사 입구의 금평저수지 주변에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데 증산법종교 교당과 강일순 부부의 묘각인 영대(靈臺),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 등 1950년대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남아있습니다. 또 저수지 건너편에는 강증산이 도통한 후 9년 동안 머물며 도를 폈던, 외손자가 지은 구리골[銅谷]약방이 있으며 약방 앞 건물은 증산의 영정을 모신 청도대향원입니다. 증산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앞으로 올 세상을 조화롭게 설계하는 천지공사를 하고는 1909년 3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약방 앞의 기둥에는 그가 썼다는 부적 같은 글씨가 붙어있는데, 원래 것이 매우 낡아서 유리로 덮어놓고 따로 복사한 것을 달아놓았습니다.

강일순은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고 유(儒), 불(佛), 선(仙)의 교리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복서(卜書),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 미래를 알 수 있는 공부를 하고는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보다 널리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인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당시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전국 유람을 마친 강일순은 1901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그 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심, 음란, 성냄, 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함으로써 성도(成道)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귀한 자는 빈천함을 알지 못하며 강한 자는 병약함을 알지 못하고 유식한 자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빈천하고 병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겠노라. 그들이 곧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깨달음의 일성(一聲)을 외치며 증산교 교주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팽나무가 있는 망해사 낙조 ⓒ가을로
미륵신앙의 성지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왕실의 원찰로 창건된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셨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이후 금산사는 미륵신앙(彌勒信仰), 즉 신라 오교의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견훤(甄萱, 867~936)이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해 양검, 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유폐되었습니다.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는데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금성(金城, 지금의 나주)으로 도망쳐 왕건(王建)에게 투항하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견훤은 착잡한 번민과 울화에 싸여 등창이 나서 논산시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습니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노주, 석련대, 오층석탑, 혜덕왕사 진응탑비, 당간지주, 석종, 육각다층석탑, 석등 등 많은 보물과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 등 건물이 전해지고 있으며 심원암, 용천암, 청련암 등 부속 암자가 남아 있습니다.

동진강 하구의 망해사(望海寺)는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한 사찰로서 낙서전(樂西殿) 전면에 서 있는 팽나무는 조선 선조 22년(1589) 진묵대사(震黙大師)가 낙서전을 창건하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유서깊은 노거수로서 문화재인 낙서전,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와 더불어 망해사의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모자,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3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문화유적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고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 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 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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