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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온 혈서, "개양구,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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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온 혈서, "개양구, 너는…"

<제보자>가 말하지 않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 ②

<제보자>가 말하지 않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

<제보자> 윤민철 PD는 사실 외롭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온 혈서, "개양구, 너는…"

"고래 싸움이 끝나고, 새우 혼자서 칼을 들었다"

황우석, 대통령, 회장님 다함께 "과학기술 독립 만세!"


광풍은 김선종 연구원이 재직 중이던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시작됐다.

2005년 11월 12일, 피츠버그 대학의 제럴드 섀튼 교수가 난자 채취 과정의 윤리 문제 등을 거론하며 황우석 박사와 결별을 선언했다. 불과 며칠 전(11월 7일), 제보자-김병수-한학수 트리오가 몇 개월간의 노력 끝에 진위 여부를 가릴 줄기세포 다섯 개를 황 박사로부터 넘겨받은 시점이었다.

(사실 이조차도 순조롭지 못했다. 처음 황우석 박사는 <피디수첩(PD수첩)> 팀에 임의의 줄기세포를 넘겨주고자 했다. 만약 이 정체불명의 줄기세포를 덥석 받았다면, <피디수첩>과 한학수 PD는 줄기세포 조작 의혹을 제기조차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현장에 있던 김병수 박사가 이를 거부하고, 제대로 된 줄기세포를 요구하면서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갑작스런 섀튼 교수의 결별 선언에 온 국민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황우석 박사의 메시지가 <경향신문>(2005년 11월 15일)을 통해서 전해졌다. <피디수첩>이 "실험실 내부 인물"의 제보로 황 박사의 연구를 취재하고 있으며, 섀튼 교수의 결별 선언이 "제보 내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황 박사 측의 전언도 덧붙여졌다.

누가 봐도 '제보자를 색출해서 응징하라'는 선동용 메시지였다. (과학 '전문' 기자를 자처했던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황우석 사태 이후에 <경향신문>에서 한 공중파 방송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 언론의 현실이 이렇다!) 여론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곧바로 누리꾼의 제보자 신상 털기가 시작되었고, <피디수첩>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고백하자면, 이 시점까지도 나는 <피디수첩>의 취재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점에 한재각-김병수-강양구 트리오는 (김병수 박사의 침묵과 다른 멤버의 불신으로) 사실상 와해 상태였다. 그저 <피디수첩>이 제보자를 통해서 난자 출처 문제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섀튼 교수의 결별 선언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애초 황우석 박사의 인간 복제 배아 줄기세포 연구의 윤리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쳐온 나로서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간 여러 경로로 취재한 아이템이 총동원되었다. 황우석 박사가 불법 매매된 난자를 실험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연구원의 난자까지 실험에 활용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사이언스>에서도 "적절한 조치"를 언급하기 시작했다(2005년 11월 18일). 이런 상황에서 11월 22일 드디어 제보자-김병수-한학수 트리오의 첫 작품이 <피디수첩>을 통해서 공중파로 방송됐다. 예상대로 난자를 둘러싼 윤리 문제가 초점이었다. 황우석 박사는 24일 <피디수첩>이 제기한 의혹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황우석 박사가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여론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제보자-김병수-한학수 트리오 중에서 전면에 나섰던 한학수 PD와 <피디수첩>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피디수첩> 방송 전부터 사실상 논란이 되었던 거의 모든 의혹을 먼저 짚고 기사화했던 <프레시안>과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개양구'의 씁쓸한 추억

▲ 2005년 11월 24일 난자 출처를 둘러싼 윤리 문제를 놓고서 대국민 사과에 나선 황우석 박사. 황 박사가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여론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연합뉴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평생 가족을 비롯한 친지들의 전화를 가장 많이 받던 때였다. "이제 그만하라"는 충고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편집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프레시안>의 한 선배 기자마저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불러서 "이만하면 됐다"며 "출구 전략을 고민해 보라"고 조언했다.

가끔씩 생각을 정리하던 용도로 활용하던 블로그는 이미 초토화되었다. (그 광풍의 흔적은 지금도 이 블로그에 가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몇몇 게시판에서는 대학교 새내기 때 사적인 게시판에 썼었던 글들이 옮겨져서 10대 후반부터 '멘탈이 이상한 아이였다'는 어쩌면 근거 있는(?) 얘기가 나돌았다.

가장 황당한 의혹은 내가 "미국 시민권을 가진 강남에 거주하는 대형 교회 집사"라는 의혹이었다. 전라도 목포 출신에 강북 달동네의 한 연립주택에서 자취를 하던 나로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말들의 향연이었다. 급기야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에서 일하는 지인이 '개양구'가 검색 순위 수위에 올라서 '블라인드' 처리를 했다고 전했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평생 제대로 된 별명 하나 가지지 못했던 나에게 누리꾼이 선물해준 '개양구'에 얽힌 일화 하나. 11월의 어느 날, 서대문의 한 작은 식당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먹던 중에 바로 옆 테이블의 대화 내용이 들렸다. "그 기사 봤어?" "어디 나왔는데?" "<프레시안>" "<프레시안>이 어디더라? 아, 그 '개양구' 있는 데?"

한 누리꾼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내가 "사랑이 없는 냉혈한"이어서인지 이렇게 온라인에서 찢어발겨지는데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러다 아직도 공포의 감정이 생생한 사건이 닥쳤다. 11월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 우편이 한 장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종종 정체불명의 편지가 배달되곤 하던 때라서, 궁금증 반 긴장감 반에 편지를 열었다.

하얀 종이에 핏빛 글씨가 가득했다. 성분 분석은 해보지 않았으나 검붉은 색이 피처럼 보였다. "개양구, 너와 네 가족은 교통사고로……뇌수가……." 유치한 '행운의 편지' 수준의 내용이었지만, 순간 모골이 섬뜩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까지 흘러넘친 나를 향한 증오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다. 나는 달동네 연립주택으로 가는 지름길인 골목길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았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 때, 해코지를 당할까봐 무서웠다. 그 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해코지는 염산 테러였다. 화학 약품 관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국내에서 염산 몇 병을 구해, 해코지로 끼얹는 게 얼마나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다행히 나는 그 광풍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온라인에서는 오장육부가 찢어발겨져 수백 번 죽었지만, 다행히 염산을 가지고 골목길에서 나를 기다리던 이는 없었다. 하지만 습관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골목길을 웬만해서는 이용하지 않는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온 혈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쥐구멍에 숨은 과학자-전문가-지식인

나만 그렇게 고생한 게 아니었다. 2005년의 당시를 돌이켜보면, 각별한 연대의 감정이 샘솟는 이들이 몇몇 있다. 한학수 PD?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오해하곤 하는데, 그 시점에 한학수 PD와 나는 일면식도 없었다. 한 PD를 처음 본 것은 2005년 12월 2일, 비우호적인 여론의 압박에 <피디수첩>이 취재 과정을 공개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을 때였다.

나중에 한학수 PD와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인 것은, 황우석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 국면에 접어들던 시점이었다. <피디수첩> 팀이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써줬던 몇몇 기자들을 불러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그 때 나도 초대를 받았다. 한 PD와는 그 때 처음으로 말을 텄다.

한 가지 여담. 그 때 <피디수첩> 팀에서 "PD수첩"이 새겨진 저용량 USB 메모리를 선물로 줬다. 그 메모리는 한동안 이용하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피디수첩> 팀이 그 국면에서 고마운 몇몇에게 "PD수첩"이 새겨진 고급(?) 만년필을 선물로 줬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와 한학수 PD 또 <피디수첩>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그 국면에서 내가 진짜로 연대감을 느꼈던 이들은 따로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형기 당시 피츠버그 대학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글로벌전략기획실장)다. 그는 2005년 11월 17일 "과학엔 '한계' 없지만 과학자에겐 '규제' 있어"라는 첫 글을 시작으로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이 진행되는 내내 과학 연구에 있어서 윤리가 왜 중요한지 국면마다 조목조목 짚어줬다.

이형기 교수는 과학계, 의학계 전문가로서는 드물게 황우석 박사를 비판하는 공개 발언에 나섰다. 그의 시각은 처음에는 <프레시안>을 통해서 또 나중에는 <피디수첩>을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당연히 여론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미국 대학 교수였던 그의 이름 앞에는 "매국노"가 붙었고, 공공연한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나는 지난 9년간 많은 과학자-전문가-지식인으로부터 황우석 박사를 놓고 참으로 정확한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2005년의 그 때, 자기 이름을 걸고 공개 발언을 한 이들은 손으로 꼽는다. 그럼, 그 때 이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심하게 얘기하자면, 그나마 나았던 이들이 쥐구멍에 숨어서 익명으로 댓글을 달고 있었다. (그런 이를 몇몇 알고 있다.)

진실이 드러나고 나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나서 대세에 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자-전문가-지식인은 필요할 때, 설사 불이익이 예상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발언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형기 교수 같은 이들에게 각별한 연대감을 느낀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언급하자. 사실 이형기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주의자'다. 온갖 기준을 내세워 편부터 가르고 또 거기에 편승해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려는 지식인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형기 교수와 <프레시안>의 협업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3년차 기자의 '감'을 믿어준 <프레시안>

이렇게 광풍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프레시안>도 고민에 빠졌다. 2005년 11월의 마지막 날, 서대문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대표, 편집국장, 편집부국장,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상황은 심각했다. <프레시안>에 광고를 주던 몇 안 되는 기업들이 광고 중단을 통보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KT의 광고가 빠졌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뗀 만 4년의 신생 언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대표, 편집국장, 편집부국장 또 동료들 모두 내 입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손에 쥐고 있는 '사실(fact)'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한편,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은 더욱더 숨 가쁘게 진행 중이었다. 불을 확 지른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는 11월 27일 <청와대 국정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피디수첩>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도를 넘은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피디수첩>이 논문의 진위 여부를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스럽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모두가 '설마' 하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피디수첩>이 단순히 난자 출처를 둘러싼 윤리 문제가 아니라, 줄기세포 진위를 놓고서 취재를 진행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노 대통령의 선의와는 반대로 반발 여론은 더욱더 심해졌다. 유일하게 '사실'을 쥐고 있던 <피디수첩>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 제보자-김병수-한학수 트리오는 11월 7일 넘겨받은 줄기세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황우석 박사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동맹'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취재 결과는 <피디수첩>이 아니라 <프레시안>(2005년 12월 6일)을 통해서 보도되었다.)

고민이 되었다. 그날 점심을 겸한 회의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저 정도까지 말한 걸 염두에 두면 제보자-김병수-한학수 트리오가 분명히 뭔가 확실한 사실을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감입니다만,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 판단이 잘못이라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편집부국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양구 씨,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아무튼, 강 기자가 이렇다면, 한 번 끝까지 가봅시다." 대표, 편집국장도 잇따라 동의했다. 20년 이상 기자 생활을 했던 선배 기자 세 사람이 3년차 후배 기자의 '감'을 믿은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프레시안>과 나의 질긴 인연은 바로 이 순간에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 때 나의 감은 비교적 정확했다. 한 가지, 결정적으로 틀렸던 것은 제보자-김병수-한학수 트리오가 손에 쥐고 있는 사실이 결정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황은 더욱더 꼬였다. 12월 4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YTN이 미국의 김선종 연구원과 인터뷰를 해서 <피디수첩>의 취재 윤리 위반("나의 발언은 협박 등 강압에 의한 것이다")을 폭로했다.

나는 YTN 보도 소식을 부평역에서 김병수 박사의 전화로 들었다("YTN 봤어?"). 고생하는 조카가 안쓰러워 밥 한 끼 먹이겠다는 이모에게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오자마자, TV를 틀었다. YTN은 같은 기사를 계속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문화방송(MBC)은 곧바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피디수첩> 방영 유보를 선언했다.

아득했다. 잠이 오지 않아 늦게까지 뒤척였다. 바로 그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터넷의 한 게시판에서는 또 다른 반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계속)
이전의 글을 포함한 이 연재는 당시의 기사, <침묵과 열광>, 취재 메모, 이메일, 비공개 인터넷 게시판의 글 등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기록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다. 가능한 한 왜곡 없이 사실 관계를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나의 관점에 따른 구성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찾는 일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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