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사랑을 지켜야 했던(하하!) 우리는 "내려가자"에 마음을 모으고, 살고 싶은 곳을 풀어보았다.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 산나물을 뜯을 만한 산이 있는 곳, 갯바위가 있어 물질하기 괜찮은 곳, 인적이 드문 외진 곳,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곳. 귀농을 생각하면서, 친구들이 내려가 있는 전라남도 쪽을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짝지가 "영덕 어때" 하는 게 아닌가. 영덕이 대게로 유명한 건 기본 교양쯤 되지만, 30년 살면서 한 번 다녀간 적 없고 영덕이 집인 벗 하나 만난 적 없는데, 위성 지도로 전국을 훑었더니 영덕이 괜찮을 것 같다는 거다. "어? 어…" 하며 전국귀농운동본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고,10년쯤 열매회원(매달 일정액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는 귀농본부 회원)이신 분의 연락처를 얻었다.
그분이 하나하나 손으로 고친 집은 사정이 생겨서 7년을 창고로 쓰이다가 우리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집을 보고 간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시골에 살고 싶어서 귀농본부 활동가로 일하고 귀농교육이란 교육은 거의 받으며 준비했지만 막상 내려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도 보고 찍어서 온 영덕, 내려오니 좋긴 좋다. 우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좋고(하하!!), 닦을수록 반질반질해지는 마루도 좋고, 새까만 밤도 좋고, 알람시계 대신 아침 햇빛만으로 일어나는 것도 좋고, 마당에 빨래 널어 말리는 것도 좋고, 나물도 하고 이것저것 많이 심어보는 것도 좋다.
첫 속앓이
그렇게 처음 구해서 들어간 집은 이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너른 들이 좋았지만 난방이 되지 않았다. 로켓스토브를 만들어서 밥도 짓고 씻을 물도 끓이고 벽돌을 쌓아 거실에 화덕도 만들고 혹시나 싶어 돌을 구워 방안에 두기도 했다. 그 집에서 마늘도 심고 곶감도 말리고 김장도 했지만 추운 겨울을 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전기장판에 꼭 붙어서 냉기에 움츠러드는 몸을 느끼며 함께 있으면, 어디든 괜찮다던 마음도 따뜻한 집을 원하고 있었다. 마을 이웃분이 빈집을 알아봐 주셨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집은 없었다. 읍내에 나가서 전셋집을 구할 수도 없고 기름보일러 집은 냉골집이나 마찬가지일 테고…. 우리가 바라는 집은 ‘불 때는 집’ 하나였다. 그런 집이 있어도 제사를 지내거나 휴가 때 식구들이 와서 지내야 한다든지, 창고로 쓰고 있으니 내줄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만 들었다. 불 때는 집이 많이 남아 있진 않았지만, 일 년에 몇 번 쓴다고, 당장 집을 구해야 하는 사정이 밀리게 되니깐 서러웠다.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먹고 자는 게 해결되는 일자리도 알아보며, 집 구하는 걸 포기할 때쯤 선배가 알려준 다른 마을에 사는 어르신을 뵈러 갔다. 그분은 우리 사정을 들으시고 “저기 불 때는 집 있는데” 하시며, 손님이 오면 쓰려고 빌려둔 집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일단 우리가 바라던 대로, 불 때는 집이고 가마솥에선 뜨거운 물을 넉넉히 쓸 수 있는 집이며, 보는 이들마다 ‘집 잘 지었다’는 말을 듣는 집이었다. 가장 친한 이웃집에 가려면 걸어서 40분쯤 걸리고, 골짜기에 늘어선 열일곱 가구 길게 자리잡은 동네여서 마을 방송도 없고 마을 회관도 없다. 뒷산 가서 땔나무를 하고 봄엔 앞산에서 고사리도 꺾고 나물도 많이 해뒀다. 요즘은 밭일하다가 더우면 집 앞 계곡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잊고 지낸다.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집, 단 한 가지만 빼면…. 지어진 지 60년 된 이 집은 주인 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켜지고 있다. 부산이 집인 주인할아버지는 이곳이 좋아서 농사철이 되면 들어와 계신다. 우리가 이 집에 온 지 8개월, 한 지붕 두 식구로 지낸 지 6개월, 300리터 냉장고를 함께 쓴지도 6개월째다. 집도 좋고 마을도 좋고 이웃도 좋지만 다른 집을 구하고 싶다.
귀농 교육받을 땐 시골 가면 빈집도 많고 농사지을 땅도 많다던데, 우리가 살 집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집을 구해 놓고 내려오면 좋겠다 싶다. 이왕이면 좀 큰 창고도 있으면 좋겠고, 마당에 푸성귀 심을 텃밭도 있고, 비 오는 날에도 일을 볼 수 있도록 처마가 길면 좋겠고, 해가 잘 드는 곳에 장독대도 놓으면 좋겠고, 마음 편하게 못 좀 박고 싶다. 하하, 짓고 말지!
농사도 조금 짓는다. 논 300평과 밭 100평 정도. 논은 이웃 마을에 있고 일 년에 쌀 한 가마 드리는 걸로 빌렸고 밭은 집이랑 딸려 있다. 배워온 것이 유기농밖에 없으니 아는 만큼 짓는다. 트랙터로 밭을 갈아준다는 걸 굳이 사양하고 삽과 괭이로 두둑을 만들고 ‘감자는 헛골에 자른 단면이 위로 가게’ 심었다. 농사 경험이 있던 나와는 달리 농사를 책으로만 배운 짝지 님은 궁금한 것이 많아 일하다가 '왜'가 생기면 언제나 풀어가며, 연구하며 일을 해야 했다.
씨를 받아둔 토종 씨앗은 '아나스타시아 방식'으로 심고 풀은 낫으로 베고 가끔 소변을 주었다. 논에는 복자 언니가 준 원자벼, 대관도, 북흑조와 이웃에서 얻은 대궐찰과 멧벼까지 해서 종자만 여섯 가지다. 한두 포기씩 손모내기를 할 때와 화학비료 21-1을 치지 않을 때까지만 해도 어르신들의 안타까움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뒤 '포기'가 많아진 뒤, 이삭을 패면 이제는 "나락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되네" 하신다. 밭은 우리 계획대로 해나가고 있지만 주인 할아버지의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소리를 여전히 듣고 있다.
감자는 삶아먹고 구워먹고 조려먹고 반찬 해먹기에 크기가 알맞게 다양하고, 씨앗으로 바로 심은 고추는 아직 여리고, 수박은 아기 머리 만하지만, 우린 우리가 얼마나 진짜를 먹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의 방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베어둔 풀이 쌓일수록 빛이 난다는 걸 알지만 이 밭과 논에서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차조를 심으려고 남겨둔 밭이 주인 할아버지의 콩밭이 되면서, 좀더 안정적인 우리 논과 밭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
갖고 싶다, 우리 집과 논과 밭
시골에 내려와서 소유욕이 불타고 있다. 우리 집과 논과 밭. 귀농해서 바로 집 사지 말고 땅 사지 말라는 말이 그럴듯했는데 시골에 내려오니 내 집이 없어서 서러운 일도 있지만, 한 집 한 집 떡 돌리며 인사드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보고 마을 사연들이 귀에 들어오고 이사 온 젊은 사람이 결혼한다고 다들 축하해주셨는데 그런 이웃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면, 내려올 때 아예 뿌리박을 집 사고 땅 사는 게 좋겠다 싶다.
20대 땐, 돈 좀 많이 주는 데서 일하면 안 되느냐는 엄마에게 "충분해, 돈은 필요한 만큼 벌면 되지, 난 돈 필요없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에 혼자 살 땐 돈이 안 들었다.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는데 이젠 바뀌었다.
감자 심어서 우리가 먹고 남으면 팔자, 산나물 뜯어서 팔자, 섭(자연산 홍합)을 말려 볼까 하며 돈 벌 궁리를 했다. 감자는 많이 심었지만 우리 먹기에도 부족하고, 뱀 만나며 꺾은 고사리는 시댁 제사용으로 갔고, 섭은 이웃들과 나누었다. 그러니 농사로 돈은 못 벌고 있다. 하지만 시골에선 젊은이들을 가만두지 않는 법. 과수원에서 애기과일도 솎고 콩밭도 매고 마을에 있는 죽염공장에서 품팔이도 하고 있다. 그렇게 번 돈이 생활비를 담당해주고 있다. 생활비만큼만 일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 집과 논, 밭을 위해서 여분의 일을 더 하려고 한다.
내가 사는 곳이 제일 좋지
'덕이 모인다'는 영덕. 열 달을 살면서 정이 들었는지 영덕이 마음에 든다. 바다로 더 알려졌지만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가 많은 영덕이기도 하다.
사실 짝지가 "영덕 어때?" 했을 땐 울진 원자력발전소와 가깝다는 게 걸렸다. 와서 있으니 위론 울진, 아래론 경주 방폐장 그리고 앞으로 영덕에도 발전소가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원전 반대 모임에 참여하면서 신규 부지 예정지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군청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어려움을 겪는 다른 지역에 응원 방문을 가기도 한다. 청정 지역으로 옮길까 잠깐 생각도 했지만 어디든 마찬가지일 테고, 지금 우린 이곳에 살고 있다.
달마다 보름날이 되면 마을 뒤에서 영양으로 이어진 임도로 달빛 산행을 떠나고, 두 달에 한 번씩 모여 단식하는 이웃이 있고, 확실히 몸이 좋아졌다. 도시에서 일할 때 훈장으로 생긴 염증은 약을 먹어야 진정이 됐지만 내려와서 단식과 뜸으로 다 나았고 그 뒤 시골살이에 자신이 붙었다. 이웃분이 중풍, 당뇨병과 고혈압, 아토피를 낫게 하는 걸 보면서, 돈 벌어서 학교와 병원에 다 갖다 준다는데 우선 병원에 갖다 줄 돈은 안 벌어도 되겠다 싶다.
얼마 전에 서울 사는 친구가 휴가를 맞아 놀러 왔다가 사흘 정도 잠을 잤다. 가는 날도 하품을 하며 더 잤으면 좋겠다는데 그러고 보니 집에 오는 손님들이 잠을 그렇게 잔다. 우리도 이 집에 와서 밤잠, 낮잠 많이도 잤다. 생각해보니 시골 친구네 놀러 가면 나도 그렇게 잤다. 늦잠을 자고 민망하게 일어나면 “도시 독 빼느라 그래.” 하는 소리에 고개 들고 점심밥을 먹었는데,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우리 집도 도시 독을 빼는 집이 되었다.
가방끈이 길다고 잘 살까?
짝지와 나는 2011년 귀농본부 캠핑농활 때 처음 만났다. 뭐, 그땐 서로 딴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첫 만남은 그때다. 시골에 살려는 두 사람의 만남이지만 준비 모습은 꽤 달랐다.
대학생 때 짓던 텃밭농사를 시작으로 꾸준히 농사를 지으며 도시농부학교(5기), 텃밭보급원(3기), 생태귀농학교(49기), 여성귀농학교(2, 3, 4기) 들을 다닌 나와 달리, 짝지는 쇼팽 연주를 들으며 카페에서 차를 즐기던 도시남으로 살다가 불현듯 이쪽 세상으로 뛰어들어 생애 첫 귀농 관련 교육으로 캠핑농활에 참여했다. 그것도 농활 기념품인 침낭에만 관심이 많았던, 처음이자 마지막 귀농교육이었다.
"수옥이는 가방끈이 길어서 질질 끌고 다녀요."
그러고 보니 난 가방끈이 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가방끈이 길다고 귀농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영덕에 살면서 가방끈이 긴 나보다 짝지가 더 빛을 낸다. 지도를 보고 영덕을 찍은 것도 짝지이고, 물을 끓이는 로켓스토브를 만든 것도 짝지다. 땔나무를 해 와서 도끼로 패는 것도 짝지이고, 예초기 한번 써보자고 할 때 묵묵히 낫질을 하던 것도 짝지이고, 마을에서 복숭아를 얻어오는 것도 짝지다. 나는 그동안 해오던 가락이 있어서 새로운 생각은 잘하지 못하는데 짝지는 잘도 받아들인다. 내년 벼농사는 논에 두둑을 만들어보겠다고 한다. 걱정된다.
찰떡같이 일을 했다가 쑥떡 같은 얘기도 하면서 짝지와 어울리는 팀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경우를 본다면, 준비가 길다고 귀농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하하!
수옥이 짝지, 맨발농부의 일기 나만 그럴까? 서른한 살, 내 나이쯤에 시골살이하는 젊은이들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어쩐지 나처럼 부모님 속 꽤 썩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귀농 첫걸음은, 5년 간 이어진 부모님과의 결사항쟁이었다. 취업을 바라셨던 부모님을, 자연에 내맡겨 살고 싶었던 내가 참 많이 속상하게 했다. 취업하면 아무리 금송아지를 준다 해도, 자연에 내맡겨 사는 것에 관심이 훨씬 많았기에 대쪽 같은 내 의지를 꺾지 못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흔들리다 못해 대쪽이 부러질 것만 같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비바람에 꼿꼿이 버티며 지금 이렇게 영덕 산골짜기에 살고 있다. 아마도 대쪽같이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 여기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귀농항쟁을 겪으며 첫걸음을 내디딘 시골살이가 열 달이 지나고 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시골살이를 하는 것이다. 눈을 어디나 두어도 나무가 서 있고 지천으로 발에 밟히는 게 풀이다. 그리고 늘 마음 설레게 하는 나무불도 우리 생활 가까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묶어뒀던 시골살이 마음을 어디서부터 풀어놔야 할지 모를 정도로 벅차고 기뻤다. 그러나 이런 기쁨을 뒤로 하고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시골살이 1호는 나의 꺾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 취업해서 돈을 벌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시골에 살면서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느낀 것이 취업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아무도 꺾지 못했던 나의 의지를 내가 꺾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성장통을 겪어서인지는 몰라도 취업을 한 것도 아니고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은 형편이 변한 것도 없지만, 이제 괴로웠던 마음은 사그라졌다. 괜찮았던 일자리인데 개인 사정이 생겨 면접에 가지 못하게 됐을 때도 다른 데가 있겠지 하며 흘려버리고, 돈 벌어 오라는 마누라 바가지에 실실 웃으며 뒤로 슬쩍 빠져 남은 음식물을 거름간에 버리러 나갈 정도는 이제 된다. 앞으로 나의 시골살이 2호는 그저 겨울나무와 같이 간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거다. 무성한 잎처럼 많고 복잡한 이론으로 무장한 농부에서 간소하고 단순한 농부가 되고 싶다. 이렇게 마무리를 하려고 하니 며칠 전 마누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맨발농부 님(나를 부르는 애칭)! 정신 차리세요! 이 주변에서 우리만큼 (돈)없는 사람도 없거든요!" 히히~ 그래요, 그래도 사랑해요, 별농부 님(짝지를 부르는 애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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