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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이선의 죽음, 영조의 귀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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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이선의 죽음, 영조의 귀는 알았다!

[낮은 한의학] 영조의 이명 ②

(☞관련 기사 : 영조의 이명 ① 영조가 귀지 제거에 집착한 까닭은?)

영조는 이 이중탕 처방에 녹용과 우슬 등의 약재를 더해 '건공탕'이라고 부르며 평생을 가까이하면서 늘 복용하였다. 약 이름만 봐도 영조가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약 이름을 '나라를 건국한 공로가 있다'고 붙였겠는가? 아무튼 영조가 천수를 누렸으니, 이 약은 이름값은 한 셈이다.

천하의 보약으로도 다스릴 수 없던 병

다시 이명으로 돌아가자. 한의학의 사유 체계에서 이명은 위장과 관련이 깊다. 실제로 허기가 졌을 때, 귀에서 '삐삐' 소리가 나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 귀가 관장하는 평형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어지러움과 함께 얹힌 느낌이 들거나 속이 미식거리고 구토 증상을 수반한다. <황제내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귀의 청력은 모든 맥이 모여서 소리를 듣는다. 위장의 힘이 허해지면 기운이 아래로 쳐지게 되고 약해지므로 귀에서 소리가 난다."

영조의 이명 역시 지병인 위장병과 무관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내향적이고 자학적인 영조의 성품은 이명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영조가 처음 호소한 것은 영조 16년(1740년) 12월 26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이다. 당시 도제조였던 김재로가 문안하자 영조가 현기증, 체증, 이명을 함께 토로한다. 요즘에도 만성 위장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전형적인 이명 증상이다.

당시만 해도 이명 증상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도제조였던 김재로가 자신이 겪었던 이명 증상을 "바람과 불이 서로 다투는 듯 강한 소리가 들려 마음이 이상해질 정도였다"고 말하자 영조는 "쟁쟁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병의 원인을 반문한 대목이 그렇다.

도제조는 쇠약해서 발생한 증상으로 가슴에 담(痰)이 있으니 다음(茶飮)으로 기를 일깨우고 한약을 복용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때 처방된 약이 바로 '자음건비탕'이다. 이 처방은 오랫동안 신경을 과도하게 쓰면서 기혈이 탈진하여 어지럽고 가슴이 뛰는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다. 당시 영조의 처지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처방이다.

하지만 영조의 이명 증상은 더욱더 심해졌다. 영조 27년(1751년), 계속된 이명으로 고통이 심해지자 그는 "북소리와 같은 이명이 그치면 귀머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자신의 병은 자신이 고친다는 고집이 심했던 그는 위장의 힘인 위기가 심하게 떨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처방을 독려한다.

한 해 인삼 20근을 소비할 정도로 인삼이 체질에 맞았던 영조는 인삼이 든 '삼귤차'와 '익위승양탕'이라는 위장 기능을 개선시키고 기운을 돋우는 처방을 복용했다. 이렇게 체질에 맞는 처방이 효과를 본 탓인지, 재위 31년(1755년) 이명 증상이 일시적으로 좋아졌다. 영조는 "이게 다 약효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한다.

의관들은 여세를 몰아서 허약해진 기운을 보하는 전향적인 보약인 '보중익기탕'과 삼귤차, 속미음 등을 권한다. 의관들이 영조에게 "아주 좋다"며 '극호(極好)'로 추천한 보중익기탕은 금원((金元) 시대의 명의 이동원이 만든 처방으로 '보약의 왕자'라는 '의왕탕'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처방이다.

보중의 '중'은 소화기를 뜻하며 익기는 '기를 더한다'는 뜻으로 소화기 계통의 기능 저하를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즉, 쉽게 지치는 사람의 원기를 끌어올려 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중익기탕에도 불구하고, 잠시 호전됐던 영조의 이명 증상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한다. 영조 33년(1757년)부터 영조가 극도로 극찬했던 이중탕이 그 뒤를 잇는다.

약으로 보하는 것보다 평상시 밥상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다. 하지만 영조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두세 숟가락을 들고 나면 더 이상 먹기 힘들 정도로 도통 입맛이 없었다. 여름이 되어 입맛이 더 떨어지자 미숫가루로 곡기를 보충했지만 위장병을 비롯한 소화기 장애와 이명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그린 사극 <비밀의 문>. ⓒsbs.co.kr

이명,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

재위 45년(1769년)이 되면서 영조의 이명은 차츰 난청이 되어간다. <승정원일기>는 영조가 소리를 듣지 못하자 짜증이 늘면서 신하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모습까지 가감없이 기록했다. 의관인 허수가 "지난밤에 바람으로 인해 이명 증상의 변화가 있었는지" 묻자 영조는 "노인의 귀가 어두운 것이 무슨 문제냐"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재위 46년(1770년)이 되면서 영조의 이명과 난청은 더 심해졌다. 영조는 "극고(極苦)하다"는 말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의관들이 급히 건공탕을 연속으로 투여한 다음날 궁궐 내 집경당에서 그는 "증세가 완화되었다"고 말한다. "약간 체증은 있지만 소리는 작아졌다." 하지만 이런 이명과 난청은 1776년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조선 왕 누구보다도 장수했지만 그의 내면은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적통이 아니라는 열등감이 유발한 콤플렉스 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할지 모른다는 건강에 대한 걱정은 그 구체적인 싸움상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그는 사실상 자기 손으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겨 죽이기까지 했다(영조 38년).

평생 그를 괴롭힌 귀앓이, 이명은 이런 그의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면의 솔직한 목소리였다. 영조 44년(1768년) 그가 이렇게 고백했듯이 말이다.

"아, 나의 병은 첫째도 심기이고, 둘째도 심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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