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근대적 영화와 탈근대적 영화
이 시대의 걸출한 배우, 최민식이 출연했다는 이야기만 듣지 않았어도 뤽 베송 감독의 <루시(Lucy)>는 아마 내가 보고자 하는 영화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최민식의 <루시> 출연처럼 한국 영화의 세계적 역량이 커지면서 한국 배우들의 세계적 진출 또한 많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 배우들의 세계적 진출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의 세계적 진출이 기존 영화와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아이.조>에 출연한 이병헌이나 최민식 등 한국 배우들은 여전히 서구-백인-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한 오리엔탈리즘의 근대적 삶과 사유방식의 환상에 기여하는 동양인이나 한국인의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루시>에 등장하는 대만이나 홍콩과 같은 중국어 문화권의 도시에서 오직 한국어만을 사용하는 미스터 장과 코리안 갱들의 비현실적 이야기는 중국어와 한국어 그리고 일본어 문화권의 차이가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나 이태리어 문화권의 차이만큼 클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서로 다른 언어 문화권들이 동북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다는 문화적 지식마저도 갖추지 못한 서구 유럽인과 미국인의 근대적 오만함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하다.
<루시>에 대한 불편함과 분노는 영화 속에 내재해 있는 서구 유럽과 미국인의 오리엔탈리즘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미스터 장이나 코리안 갱을 이용한 코리아(코리안), 은밀하게 중국과 중국인들의 세계적 등장에 대한 비난 때문만은 아니다. <루시>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건'을 통한 변형과 생성이라는 영화적 형식에서는 근대적 과거의 영화들과 다른 탈근대적 영화의 형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SF 공상과학영화라는 근대적 장르 도식에 머물러 근대적 서구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근대적 영화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뤽 베송 감독의 철학적 한계일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시장이 지니고 있는 근대적 제국주의의 구조적 한계이기도 하다. 서구 유럽에서 근대적 영화로부터 탈근대적 영화로 이행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나 프랑스의 누벨 바그 영화, 그리고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이탈리아, 허울 좋은 승전국이라는 명명 속에서 이름만 남아있는 제국 프랑스, 그리고 분단된 독일 관객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이탈하는 거대한 감수성의 변화를 보이자, 뛰어난 감독들이 영화적으로 반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그리고 독일 관객처럼 미국 관객들도 서국-백인-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성에서 벗어난 탈근대성의 감수성에 도달한 시대가 있었다. 서구-남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불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와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1991) 뿐만 아니라, 백인 중심주의의 근대적 서부영화에서 탈피한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1990) 등은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Truman Show)>(1998)나 샘 샌더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1999)등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관객의 새로운 탈근대적 감수성에 대응한 뛰어난 감독들이 영화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탈근대적 영화의 등장을 가로막는 할리우드 영화시장이 지니고 있는 거대 자본과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근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007 시리즈'를 비롯해 황당한 SF를 통해 영화적 감수성의 퇴행을 조장하고 있다. <루시>도 이런 감수성 퇴행에 한 몫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 서구 유럽의 서구-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정신 철학을 뛰어 넘어 서구와 비서구 뿐만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 그리고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을 평등하게 사유하는 몸 철학의 생명성을 뤽 베송이 두뇌 철학으로 퇴행시켰기 때문이다.
II. 몸 철학인가, 두뇌 철학인가?
영화는 스크린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몸을 보여주고 몸을 사유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는 몸의 일부이지 인간의 몸과 동떨어져서 몸에게 명령을 하는 또 다른 기관이 아니다. 인간의 눈은 몸의 작용이 없었다면 사물을 식별하지 못했을 것이며, 인간의 두뇌는 몸의 작용이 없었다면 옳고 그름을 사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정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몸의 작용에 길들여진 성인 남녀를 포함한 인간 대부분은 새로운 몸의 작용 없이 관습적인 인간의 눈을 통해 기계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인간의 두뇌를 통해 상식적인 논리로 세상을 사유한다. 그러한 기계적인 사물인식과 상식적인 논리의 사유가 바로 일정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작동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몸의 생명성을 파괴하고 몸을 이데올로기적 주인의 노예로 만든다. 서구 유럽의 암흑기라고 알려진 중세의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데카르트는 기독교 이데올로기에서 과학 이데올로기로 전환하는 근대 초기 정신을 고상한 것이라고 명명하고, 몸을 저열한 것이라고 판단해 정신과 몸의 이분법을 통해 몸이 정신적인 것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다. 논리철학을 매개로,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과학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것이다.
훌륭한 시와 소설, 혹은 회화와 음악처럼 영화는 몸의 새로운 감각적 반응을 통하여 우리가 익숙하게 길들여진 이데올로기적 시선과 상식적인 논리를 다시 인식하고 사유하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그런 변화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온다. 영화를 보는 사건!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 따라서 영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사건을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시>도 마찬가지이다.
<루시>는 기계적인 사물인식과 상식적인 논리 속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루시'(스칼렛 요한슨 분)가 사건을 통한 몸의 감각적 변화에 의해 그녀만의 독특한 사물인식과 창조적인 사유의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루시>에서 사건(불의의 사고)을 통해 루시 몸에 합성 약물이 퍼지면서 일어나는 변화와 생성이 근본적으로 두뇌를 포함한 몸의 감각적 변화이지, 두뇌 사용량의 변화에 따른 몸의 초자연적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속적으로 '노만 박사'(모건 프리먼 분)의 두뇌사용량의 변화에 따른 인간 생체의 변화에 대한 연구발표와 루시의 변화를 교차 편집해 몸의 변화와 더불어 몸의 일부인 두뇌가 변화하는 것임에도 마치 두뇌 사용량의 변화에 따라 두뇌와 별개로 작동하는 몸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처럼 관객을 몰아가고 있다.
물론 몸의 느낌과 감각을 100퍼센트(%)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두뇌의 작용을 100%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10%의 두뇌 사용을 15~20%의 두뇌 사용으로 향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향상된 두뇌 사용을 통해 몸의 변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의 변화는 마치 영화 <루시>에 등장하는 '미스터 장'(최민식 분)이나 코리안 갱들처럼 두뇌와 이성을 통해 일시적으로 몸을 기관화한 후 기관화 된 몸을 파괴하는 것이지, 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통해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루시'의 사건을 통한 몸의 변화와 생성은 몸을 정신과 대립하는 물질로 취급하는 처방의학의 서양의학과는 달리, 한의학이나 동양의학이 두뇌와 정신을 모두 포용하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종합으로 몸을 다루는 예방의학처럼 '루시'가 그녀의 몸이 새롭게 생성시킨 느낌과 감각으로 하여금 미스터 장과 코리안 갱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과 정신적 사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파리에 있는 '루시'의 친구가 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간이나 폐가 어떻게 나쁜가를 감지하도록 만든다. 몸의 정서적 느낌과 감각의 변화가 만든 두뇌의 작용과 지식의 능력이 새로운 몸의 작용을 통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루시>는 두뇌가 몸의 일부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탈근대의 몸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데카르트의 정신/몸의 이분법처럼 두뇌/몸의 근대적 이분법을 가정하는 두뇌(정신)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몸이 지니는 이중성, 즉 몸의 감각과 느낌이 만드는 생산과 소비의 상호순환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닌 생산/소비의 이분법 속에서 몸의 생산성은 경시하고 오직 몸의 소비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루시'는 새로운 몸의 감각과 느낌으로 새로운 두뇌의 지식을 생성시킴에도 불구하고, 두뇌의 지식은 다시 몸의 감각과 느낌을 새롭게 생성시키는 순환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 마치 귀신처럼 몸 없는 두뇌만이 작동해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런 '루시'의 몸 없는 두뇌는 비록 서구-백인-남성을 서구-백인-여성으로 대체한 사이비 페미니즘의 너울을 쓰는 쾌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적인 정신 철학의 논리체계, 즉 '루시'의 몸 없는 두뇌가 '루시'라는 한 개인의 소문자 두뇌(brain)가 아니다. 너무나도 다른 인간 모두를 대표하는 대문자 두뇌(Brain)가 되어 마치 수많은 책 중의 책(Book of books)을 기독교의 성서(Bible)로 간주하는 기독교주의의 근대 이데올로기나 몸 없는 정신을 가정하여 대문자 정신(Mind)을 기독교의 하나님(God)과 동일시하는 데카르트의 근대 철학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Ⅲ. 서구 유럽 근대인들의 상상력과 공포
영화 끝 부분에서 몸의 변화와 생성으로 초인간적 능력을 발휘하는 '루시'의 몸은 사라지고 그녀의 '말씀'만 남는다. 그리고 그녀의 '말씀'은 거대 용량의 컴퓨터 지식으로 응집된 하나의 USB에 저장되어 두뇌지식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만 박사에게 전달된다. 노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이 '루시'가 남겨놓은 USB 메모리만 해독하면,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구원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영화적 상상력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은 근대 초기의 기독교적 상상력과 너무나도 닮았다. 마치 전지전능한 기독교적 신이 오늘날의 USB와 유사한 성서에 그 '말씀'을 남겨놓고, 그 '말씀'만 해독하면 인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마침내 구원될 수 있다는 기독교적 상상력! 그러나 그런 기독교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서구 유럽의 기독교 제국들은 지난 50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거나 세계 각지에 팔아 자본을 축적했으며, 그런 폭력의 결과로 세계 모든 지역을 서구 유럽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질서체계는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유럽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미국 제국주의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서구 유럽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은 17~18세기에 기독교적 상상력을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가 선봉에 섰으며 19~20세기에는 산업혁명을 통해 기독교적 상상력을 과학적 상상력으로 전환한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 세력을 대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구(舊) 소련에 의해 서구 유럽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은 지속됐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는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된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화 과정을 포기했으며, 문화적으로 서구 유럽과 근본적으로 다른 중국이 새롭게 세계무대에 등장해 서구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동일한 동아시아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유럽의 일원이라고 자부하는 일본인이나 일본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채 영화의 주된 줄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합성약물)개발이 중국어권 문화 지역이며 이를 위한 과학 개발이 한국어만을 사용하는 미스터 장의 갱단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는 가정은 지난 500년 동안 이어진 서구 유럽 중심주의의 세계질서에 익숙한 제국주의자들의 두려움의 표현임과 동시에 중국과 코리아를 서구 유럽 중심주의의 근대성에 도전하는 새로운 적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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