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남북이 각자의 방식으로 관계 개선의 신호를 보내지만 상대방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다. 북은 인천 아시안게임에 대규모 응원단을 보냄으로써 화해의 물꼬를 터보려고 했지만 정작 남측은 비용 문제와 인공기 응원 등을 거론해 실무회담을 결렬시키고 결국 응원단 파견은 무산되고 말았다. 북이 내민 화해의 손길을 남측이 걷어찬 셈이다. 응원단이 사라진 아시안게임 자리엔 인공기를 내리라고 요구하는 보수단체와 ‘북한’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치우라는 북측 선수단의 날카로운 신경전만 가득 차 있다.
북한 역시 박근혜 정부가 내민 대화의 손짓에 인색한 건 마찬가지다. 한 달 전 청와대가 큰 맘 먹고 제안한 ‘고위급 회담’에 아직도 북은 묵묵부답이다. 박근헤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환경·민생·문화 협력을 제안했지만 북은 마땅찮은 분위기다. 드레스덴 선언에 대해선 이미 비난과 거부의 입장을 밝힌 지 오래다. 박근혜 정부가 지속적으로 북에 내밀고 있는 대화의 손짓에 북은 화답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북한은 오히려 남북대화 대신에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일본과 협상을 진전시키는 한편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등으로 외교의 다변화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제쳐놓은 채 다른 나라들과 적극적인 대화와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급 회담 제의는 북으로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질 만하다. 북이 먼저 제안해서 이미 2월에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북한 국방위원회 사이에 고위급 접촉이 성사되었고 비방·중상 중단 등 합의사항도 도출한 바 있다. 그런데도 북이 회담 제의 한 달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명확한 화답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선 최근 북한의 대남전략, 즉 남북대화 재개를 위한 북한의 전략을 정확히 살펴봐야 한다.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이후 북은 크게 두 가지를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간주하는 모습이다. 첫째는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의 진정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를 지나면서 북은 보수 정권의 대북정책에 깊은 회의와 실망을 체험했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섣불리 신뢰를 보내기 어렵고 따라서 자신이 납득할 만한 박근혜 정부의 진정성을 확인해보고 싶어 한다.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을 때 북은 화답했고 결국은 키리졸브 훈련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고위급 접촉까지 동원해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시켰다. 그들 표현대로 '통 큰 양보'까지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후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과 드레스덴 선언은 북에게 북한 붕괴를 전제한 흡수통일 정책으로 읽혔고 북은 적극 반발했다. 지난 7월 11일 공화국 정부 성명에서 신뢰 프로세스와 드레스덴 선언을 '제도 통일', '흡수 통일' 기도로 규정한 것이 단적인 표현이다.
북이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줄기차게 5.24조치 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북 간 협력과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 5.24조치를 유지하는 한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믿을 수 없다는 논리다. 드레스덴 선언에 대한 의구심과 5.24조치 유지에 대한 반감 말고도 최근 북이 박근혜 정부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시안게임 응원단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었다.
북은 나름대로 관계 개선의 시그널이자 모멘텀으로 응원단 파견을 과감하게 결정했다. 그런데 남측은 응원단을 화해협력의 계기가 아니라 북의 통일전선 전술로 받아들였고 관계 개선의 물꼬가 아니라 치졸한 비용문제로 접근했다. 결국 북은 응원단 파견 무산을 지켜보면서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여전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위급 회담 제의에 화답하지 않고 있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남북대화 재개를 위한 북한의 두 번째 조건은 이른바 '정치군사적 의제'가 논의될 수 있느냐이다. 북은 지난해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이른바 '핵무력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한 이후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대외환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 이후 미·중 대결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이 첨예화될 경우 한반도가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게 북한의 정세인식이다.
김정은 시대 들어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발전에 매진하려는 북한에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긴장 상태는 가장 평화롭지 못한 대외환경이다. 따라서 북은 올해 내내 한반도의 평화로운 대외환경을 위해 남북 간 정치적 대결 해소와 군사적 대치 완화를 위한 대화를 제의했다. 지난 1월 16일 국방위 중대제안과 6월 30일 국방위 특별제안이 그것이다. 정치적 비방·중상 중단과 군사적 적대행위 중단을 의제로 하는 남북 간 대화를 북은 지속적으로 제안해 놓은 상태다.
이명박 정부 기간 남북관계 중단을 거치면서 북은 남쪽으로부터의 경제협력과 지원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자생력과 노하우를 축적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북의 경제상황이 나아지고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있다는 현실은 북한에 남북 간 경제협력이 그리 큰 매력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비해 남북경협과 대북지원이 북에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지금 북한에 남북관계는 오히려 경제협력과 지원 등이 아니라 자신의 경제발전을 위한 평화로운 대외환경으로서 정치군사적 대결의 완화가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올해 내내 북이 중대제안과 특별제안을 통해 정치적 대결과 군사적 대치의 해소를 주요 의제로 거듭 제시하고 있음은 바로 그 맥락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기존의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만을 제안하면서 정작 북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군사적 의제에는 일절 거부로 대응하고 있다. 드레스덴 선언과 경축사 등에 대해 북이 심드렁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북이 무관심한 민생 인프라나 문화협력 등만 반복하면서 정작 북이 관심 있는 정치군사적 의제는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급 회담 제안에도 박근혜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핵심의제로 제안해 놓고 정치군사적 의제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이 고위급 회담 제의에 아직도 화답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이다.
북이 화답을 주저하고 있는 이유가 결국 박근혜 정부의 진정성 여부와 정치군사 의제의 논의 여부 때문이라면 지금 우리가 북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진다. 박근혜 정부의 관계개선 의지의 진정성을 북에 확인시켜 줘야 한다. 응원단 파견이 무산되었다면 적어도 드레스덴 선언이나 신뢰프로세스가 흡수통일이 아님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비공개 라인을 통해 대통령의 진심을 북에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면 이산가족 상봉뿐 아니라 북이 제안한 정치군사 의제도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음을 밝히는 것도 필요하다. 묵묵부답인 북에 고위급 회담 수용을 재차 촉구하면서 통일부 장관이 고위급 회담의 의제가 열려 있음을 밝히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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