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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민주주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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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금 여기 민주주의는 없다

국가 기본의 재구축을 위하여 <19>

과연 지금 여기에 민주주의가 존재하고 있는가? 

국가 운영에 있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우리 시민에게 지금 무슨 권리가 주어져 있기는 있는 것인가?
 
프랑스에서 범죄 피해자는 가해자를 형사법원에 직접 소환의 방식으로 범죄피해의 배상을 요구하는 사소(私訴)를 제기할 수 있고, 검사의 불기소처분이 있더라도 범죄피해자가 예심판사에게 사소 당사자가 되는 신청을 하여 공소권을 발동시킬 수 있다. 범죄 피해자만이 아니라 사회단체들도 사소를 제기하거나 공소에 참가할 수 있다. 프랑스 형사소송법 제2-1조 이하에서는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또는 단독으로 일정한 범죄에 대하여 사소를 제기하거나 공소에 참가할 수 있는 법인격 있는 단체들을 열거하고 있다(다만 이들 단체는 범죄의 행위 시를 기준으로 5년 전에 법률에 의한 등록이 되어 있어야 하고 공익성을 추구해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권리 보호는 단순히 국가형벌권의 발동이라는 명목 하에서 형사소송의 제3자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직접적 피해 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형사소송절차에 참여하도록 하여 가해자에 대한 유죄를 이끌어내고 각종 수사행위 등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공론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전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가 그나마 안전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시민이 참여하고 관리하는 제도가 주요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프랑스에는 현재 ‘환경리스크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제도가 있으며, 이 제도의 핵심은 정부, 관료, 기업, 과학자, 언론, 일반시민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하고, 상호 이해를 깊게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시스템은 이익집단이나 전문가만의 참여로는 좁은 시야에 갇히기 때문에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 정치제도, 시민 참여에 대한 철저한 배제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시민의 권리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주어진 것이 없다. 속수무책(束手無策), 그야말로 손발이 묶인 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 이외에 시민의 권리는 거의 보장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그 투표는 선거제도부터 소수 야당의 장내 진입이 아예 봉쇄되고 정치 신인의 진입 역시 거의 막힌 채 여야 두 정당 후보 중 한 명을 뽑는, 그리하여 선택권을 사실상 봉쇄한 과정에 불과하다. 

미국의 카운티(county)에서 그 지역의 시장을 비롯하여 보안관, 판사, 검사장, 감사원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과 비교해 봐도 턱없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의 참여에 대한 요구는 대부분의 경우에 어김없이 위헌이나 현 사법체계에 대한 도전과 훼손으로 낙인찍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경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체제이다. 이 나라의 국가 운영은 정부, 국회 그리고 관료 및 검찰 등 소수 엘리트에 철저하게 독점되고 있다. 정치권은 진입의 장벽을 허물기는커녕 정치신인과 소수 야당의 진입을 봉쇄하는 장벽이 갈수록 더욱 철벽화된 채 ‘그들만의 리그’만이 확대재생산되어 왔으며, 관료들의 철밥통과 진입 장벽 역시 철옹성과도 같이 시민들을 둘러싼 채 우뚝 버티고 있다. 무소불위의 검찰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민은 정작 국가운영 시스템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단지 지배 및 통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니 4대강사업이나 원전에 대하여 시민이 이를 막을 아무런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상을 밝혀달라는 세월호 유가족의 한 서린 호소 역시 광화문의 소음 속에 파묻힐 뿐이다.  
 
이것이 결코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의 장점을 비교 논의하는 차원까지 갈 필요도 없다.  
 
국제적 기준의 민주주의와 이 나라의 정치체제의 가장 큰 차별점은 시민을 완전하게 배제시키고 있다는 지점에 존재한다. 시민의 권리 실현을 위하여 각 분야에 있어 국가 운영의 권력을 시민에게 부여하지 않고 권력층이 독점하면서 시민의 참여를 철저하게 봉쇄, 배제하고 있는 체제이다.
 
민주주의의 존재가 주장되려면 무엇보다도 각 분야에서 주인으로서의 시민의 권리 보장이 제도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언필칭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국회, 특히 야당이 나서서 시민의 권리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최우선적으로 나서야 한다. 

국회 내 청원실 설치

지금 국회가 진정으로 민의를 대변하여 민회(民會)가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청원제를 제도화해야 한다.

거창하게 ‘열린 국회 선포식’ 행사를 하고 국회의 잔디밭을 개방하는 것이 ‘열린 국회’로 나아가는 본질은 아닐 터이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표현되고 있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온라인, 오프라인상의 민의(民意)를 의회에 반영하는 것은 직접민주주의 성격을 대의제도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고 투사시킴으로써 대의 민주주의의 약점을 결정적으로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회 내에 청원실을 설치하여 대중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의회의 입법 활동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원권은 시민적 법치국가에 있어 가장 고전적인 권리로서 인식된다. 청원권의 인정과 더불어 의회제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청원권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의회제의 선구인 영국이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으로 청원권을 보장한 역사적 사실은 의회제라는 발상이 청원의 통로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청원권(Right to Petition)의 연원은 입헌주의 이전부터 찾을 수 있다. 즉, 청원의 근원은 영국에서 1215년 국왕이 귀족들의 강압에 의하여 승인한 대헌장 제61조에서 비롯된다. 그 뒤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에서 처음으로 보장되었다. 이어 청원권은 미국연방헌법 수정 제1조를 비롯하여 스위스 헌법(제57조), 바이마르 헌법(제126조) 그리고 1791년 프랑스 헌법 등 세계의 많은 국가 헌법에서 규정되었다.

주권재민과 권리구제의 실현

청원제도가 여전히 각국에서 계속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이 제도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기관에 국민의 의사와 요구사항을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기관은 이를 수리, 심사한 뒤 그 결과를 청원인에게 통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시민 주권주의의 실현과 기본권 보장의 확립이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법부의 재판청구권이 사후구제 수단인 것과 달리 청원은 권리침해의 우려가 있을 때 사전 구제수단으로 행사될 수 있고, 사법수단보다 그 절차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권리구제의 수단으로서의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원의 폭주로 인하여 의회가 ‘민원처리장화’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청원을 억제하거나 경시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의회의 활성화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의회가 참으로 행정통제와 국민의 권익침해에 대한 구제 및 여론의 수렴에 관심을 경주한다면 청원의 폭주는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청원실 설치, 국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며 의무

시민참여의 효과성은 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수용자 측의 반응성(反應性, responsiveness)과 책임성(accountability)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시민참여란 참여자의 정치적 효능감(效能感)이 뒤따를 때 비로소 그 효과성이 실현될 수 있다.
 
국회에 설치되는 청원실은 직접민주주의의 국회 수용의 차원에서 제도 개선 및 정책 제안과 관련된 집단 온라인청원의 활성화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진정(陳情), 특히 공권력 피해에 대한 진정은 소극적으로만 접수하는 원칙을 취하여 배제하지 않으며, 특히 ‘공직부패’ 관련사항은 진정이라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청원을 온라인 및 오프라인 양 측면에서 모두 접수할 수 있도록 하고, 청원제도를 실제로 유명무실하게 만든 ‘국회의원의 소개’ 의무 조항은 향후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청원이 반드시 국회의원의 소개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현재의 ‘국회의원의 청원 소개’ 규정은 사실상 대중들의 청원권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이다. 
 
청원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는 온라인상에서 제공하고 국민들의 서명을 접수하며, 나아가 내용에 대한 지지나 비판 의견을 제시하는 ‘숙의 혹은 평의’(deliberation)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또한 접수된 청원은 그 처리과정을 접수인이 항상 확인할 수 있도록 온라인상으로 투명하게 공개되고 (전자)우편으로 중간에 처리과정을 고지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테면 100만 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은 청원특별위원회에의 회부를 의무화하고 청원특별위원회는 이를 심의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의 신설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이 경우 서명인원에 따른 의무 경중(輕重)의 구분을 고려한다.

국회 내에 청원실을 설치하는 것은 본연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고 않고 직무유기하고 있는 국회가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이며, 왜곡된 이 사회 정치제도를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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