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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간 간호사들은 왜 '박정희 신화'에 도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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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간 간호사들은 왜 '박정희 신화'에 도전했나

[프레시안 books] 재독한국여성모임 <독일 이주 여성의 삶, 그 현대사의 기록>

독일은 현재 유럽 최대의 이민국이다. 8000만 인구 중 1600만 명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로 이주했거나 이주자인 부모 또는 조부모를 두고 있으니, 5명 중 1명꼴로 이른바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는 이야기다. 제국주의 시절 해외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며 인종 간 교류를 일찍 시작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단일 인종 국가에 속했다. 그런 독일이 겨우 반세기 만에 이민국으로 변신한 계기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외국인 노동자 고용이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에 건너온 외국인 노동자는 약 700만 명으로, 대부분 유럽인(옛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거나 유럽에서 가까운 나라(터키, 모로코, 튀니지)에서 왔다. 간호사와 광부를 합쳐 2만 명 정도인 한인은 독일연방공화국 이민사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소수다. 그런 이유로 재독 한인들의 이주, 노동, 삶의 역사는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관심 갖는 이가 오래도록 없었다.

간호사와 광부들의 독일행이 시작될 때부터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산업 역군'이라는 애국적 이미지를 씌웠다. 누구도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이들을 둘러싼 뜬소문들이 생겨나 퍼져나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차관 담보설'이다. 가난한 대한민국이 서독 정부로부터 상업 차관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급 보증 능력이 없어 쩔쩔매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하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내는 천신만고 끝에 성사시켰다는 눈물겨운 영웅담이다. 이 그럴듯한 이야기는 간호사와 광부들이 이국땅에서 겪어 낸 산전수전 고생담과 만나 상승효과를 일으켰으니, 한편으로는 이들을 '한국 근대화의 숨은 공로자 겸 희생자' 반열에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독일에 보내 '조국 근대화의 기반을 닦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 독재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조사해 달라는 청원을 재독 한인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넣었고, 해당 위원회는 "광부·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로부터 상업 차관을 성사시켰다는 신청인 및 세간의 주장과 인식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독일에서 들어온 상업 차관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일종으로, 독일의 헤르메스(Hermes) 수출보험공사가 보증을 섰고 독일부흥금융공사(KfW)가 자금을 공여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것이 2008년의 일이지만 차관 담보설이 여전히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개발 독재 정당화하는 오래된 허구, 차관 담보설

ⓒ당대
간호사와 광부들이 독일로 간 것은 1960년대 당시 독일과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 편에서는 농업 국가로서 남아도는 유휴 인력을 흡수할 산업 시설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다면 국내 실업률 감소, 외화 획득, 인력 해외 진출을 통한 관련 산업 수요 창출과 새로운 고용 파생까지 일석삼조를 노릴 좋은 기회였다. 독일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전후 신속한 경제 재건 결과 전반적인 노동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사양 산업인 탄광업은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지 않고 중장기적 구조조정을 버티기 위해 단기간만 쓸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보건 의료 부문은 성장 산업에 속했다. 1960년대는 독일 사회복지 국가의 확대기로서, 의료·요양·간병·휴양 서비스가 팽창하면서 보건 의료 산업도 급성장했다.

인력 수요도 따라서 급증하는데, 정작 공급은 사회보장과 노동 복지 확대로 법정 노동시간이 줄면서 오히려 감소하는 형편이었다. 독일 병원의 간호사란 수도원 수녀들의 빈민 구제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미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주사·투약 등 전문 간호 업무뿐 아니라 간병 및 환자 관리에 필요한 온갖 허드렛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하층계급 여성들의 육체노동 직업이었다.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이 장기간 이어져 조건 좋은 일자리가 널려 있는 상황에서 간호사는 기피 직업이었다. 그런데 독일과 노동자 송출 협약을 맺은 나라들은 자체적으로도 간호 인력이 부족하여 간호사를 보내려 하지 않았으므로 독일 정부는 한국, 인도, 필리핀, 중국 등지로 눈을 돌렸다. 하필 이 지역이었던 이유는 당시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소련의 제3세계 지원에 맞서 아시아 지역에 반공 연대를 만든다는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였고, 특히 한국과 관련하여 서독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동독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인 간호사들이 독일로 가게 된 역사적·국제정치적 맥락이다. 그런데 정작 간호사 본인들은 왜 독일로 떠나기로 결심했는가?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사 구술 사료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파독 한인 여성 간호 노동자들의 증언 자료'를 보면 이들은 스스로 원해서 독일에 갔고 자신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행은 개인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지, 국가적 필요에 부응하고자 하는 '공적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 개인적 동기에 대해서조차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지녀 온 오해는 '돈 벌러 갔다'는 것이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일로 간 한인 간호 여성>(산과글, 2012년 펴냄)의 저자인 나혜심(성균관대학교 인문학술원 연구교수)에 의하면 이들의 동기는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제적 동기만을 확대 해석해 경제 개발 시기 한국의 '불쌍한 큰누이 신드롬'에 간호 여성들을 짜 맞추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선 '국가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당시 독일행을 택한 젊은 여성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바라본 방식이 아니었다. 물론 '살림 밑천'이라는 관습적 의무에 부응하고 가족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간 여성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털어놓는 여러 동기 중 일부였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책 <독일 이주 여성의 삶, 그 현대사의 기록>(당대, 2014년 6월 펴냄)에서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독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살아온 삶, 독일행을 결심한 동기, 그 선택의 결과 독일에서 만난 삶의 과정에 대해 당사자들이 직접 한 꼭지씩 써 내려간 이 책에는 연줄과 뒷돈으로 움직이는 한국 사회에 실망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떠난 여성, 딸들을 모자라게 대우하는 불평등으로부터 탈출, 돈을 벌어 대학 공부를 하겠다는 학구열, 선진국에 대한 선망과 동경 등 다양한 비경제적이고도 개인적인 욕망으로 움직인 젊은 여성들이 나온다. 지금처럼 정보 교환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지금으로 치면 태양계 안의 다른 행성 정도로 낯선 곳이었을, 당시 비행기를 타고도 꼬박 이틀이 걸리던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개척하려는 적극적 의지에서 독일행을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독일로 떠난 여성들

ⓒ재독한국여성모임
이 책을 기획하고 글을 쓴 이들은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들이다. 이 모임은 1977∼1978년 '간호사 송환 반대 서명' 운동을 계기로 꾸려져 40돌을 앞두고 있다. 1973년 석유 파동을 시작으로 서구 경제 전체가 장기 불황에 빠져들자 독일 정부는 외국인 간호사를 내보내려 했고 1977년 17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체류 연장을 거부당해 강제 송환되었다. 한인 간호사들은 분노했고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1만 명의 서명을 얻으면 연방의회 안건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들의 요구는 5년 이상 근무한 간호사는 3년짜리 계약에 얽매이지 않는 장기 체류 허가를 주고 7∼8년 일한 후에는 국적 취득 자격을 달라는 것이었다. 간호사들의 태도는 당당했다. "우리는 필요할 때 데려왔다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올 때는 당신들이 불러서 왔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것이고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겠다." 결국 법안이 통과되어 장기 체류 허가와 영주권 취득이 가능해졌다. (관련 기사 : 독일로 간 '아몬드 눈빛의 천사들', 지금 그들은…)

한데 뭉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경험은 성취감과 자부심을 주었고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했다. 1978년 재독한국여성모임을 결성하고 함께 공부하며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되고 독일로 오기 전부터 막연하게 느껴 온 여성 의식을 키웠으며 자신들이 독일로 오게 된 배경인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1970∼1980년대 남한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고, 독일 내 이주민 단체로서 독일 사회의 현안에도 발언하며 1990년대에는 통독 후 극심해진 신나치 인종주의 반대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사안에 따라 독일 내 시민단체(NGO)와 다른 이주민 단체와도 연대 활동을 벌였는데, 1990년대 말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희생자 보상 및 명예 회복을 위해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연대하고 있다.

활동 과정의 우여곡절이나 개인적 각성 과정, 재독한국여성모임이 해온 일들에 대해서도 저자들은 각자의 느낌, 생각, 평가를 가감 없이 털어놓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의 출발과 핵심은 '여성 이주민으로서 정체성 찾기'였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곳에 가서야 비로소 정체성을 돌아보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이국땅에서 그토록 부여잡고 지키려 애썼던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은 실체가 없었다. 왜냐하면 고국의 사회, 문화, 정서는 계속 변화하지만 이주민들의 고국과 관련된 정서는 그들이 떠난 시점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보니 그동안 한국 사회는 급격히 변해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한국은 '골동품상'에나 가야 볼 수 있었다. 내가 자란 땅에서 내가 고립된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은 타국에 살면서 이방인임을 실감하는 것보다 더 나를 혼란시켰다." (58쪽) 이 여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 아니면 독일로 나누는 사고에서 벗어나 어디에 머물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삶 자체가 정체성임을 깨달으며 사슬에서 풀려난 듯 홀가분한 자유로움과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사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은 울리히 벡의 <장거리 사랑>(새물결, 2013년 펴냄)이다. 지구화 시대에 국경을 넘는 개인들의 내면적 정체성과 정치적 충성심은 하나의 국가, 땅, 고향만이 아니라 둘 또는 셋 이상을 향할 수 있다. 이주민들에게 출신국과 수용국의 축구팀이 맞붙을 경우 어느 쪽을 응원할 것인지 묻는 것은 한편으로는 곤혹스럽고 한편으로는 우습다. 이들의 정체성은 단수가 아닌데다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출신국이건 수용국이건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 가족과 친족에 대한 의무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벡은 지구화 시대의 승자는 국가와 가족 중 가족이라고 결론지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2010년 "다문화주의는 완전한 실패작이다"라는 연설을 한 바 있지만, 이것은 수용국 사회와 문화에 일방적으로 편입되라고 요구하는 국민국가 중심의 일국주의적 다문화주의의 실패일 뿐 다문화주의 자체의 종말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인들은 여러 이주민들 중에서도 독일 사회로 통합하는 데 꽤 성공했다는 것이 그곳의 평가다. 그러나 이주민 2세 출신으로 독일과 유럽 다문화 정책의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는 마틴 현(Martin Hyun)에 의하면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독일어 구사력이나 학력, 직업에서 한인 2세들의 성과가 평균 이상으로 성공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진정 성공적인 통합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주민 출신들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진입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도 맨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정당 대표나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의 사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틴 현은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독일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 아이스하키 청소년 대표팀 선수와 프로 선수로도 활약한 바 있으며 대학에서 정치학, 국제 무역, 국제 관계학을 공부했다. <조용히-예, 말없이-아니오. 국경을 넘나드는 한 독일 사람(Lautlos-Ja Sprachlos-Nein: Grenzgänger zwischen Deutschland und Korea)>(2008)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 나는 어떻게 훌륭한 독일인이 되었는가(Ohne Fleiss kein Reis: Wie ich ein guter Deutscher wurde)>(2012) 등의 책을 냈고 '인종차별 없는 학교'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독일에서는 전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다문화 가정 출신자들에 대해 '이주 배경을 가진 독일인'이라는 중립적 단어를 쓰고 있다. 이에 맞서 떠오르는 신조어가 '유기농 독일인'(Biodeutsche)이다. 알다시피 유기 농산물은 화학 비료와 제초제 없이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품이 많이 들고 생산량이 적으며 따라서 값비싼 고급품이다. 독일 국적을 가졌다고 다 같은 독일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주 배경을 가진 독일인은 적어도 '유기농'(고급)은 아니다. 최신 한국어로는 '명품 독일인'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명품 독일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이민 2세, 3세가 아무리 독일화되어 뼛속까지 독일인임을 자부한다 해도 소용없다. 그에게는 '순수한 혈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뭘 보고 '순수한 혈통'을 알아본단 말인가? 노란 머리? 파란 눈? 핑크색 피부? 이쯤 되면 독자 여러분도 이 단어가 온갖 종류의 차별주의를 듬뿍 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 보자. 여러분은 '명품 한국인'인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만약 증명할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명품 한국인 인증'이 마음에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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