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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도세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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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짜 사도세자를 찾아서

10월 화성학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를 알고 계시나요?

아마도 대부분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세자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 때문일 것입니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려 자신의 아들을 낳은 후궁을 죽이고, 때때로 갑작스런 발작으로 궁녀들을 죽인 미친 인간으로 기록을 해놓았죠. 남편이 아니라 아예 웬수였던 것이죠!

그런데 몇 년 전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에서 사도사제가 정신병자가 아닌 청룡언월도를 들고 다니는 무인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청룡언월도로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흔들어대는 노론 세력들을 제거하고 백성의 나라,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자주적 나라를 만들고자 했죠.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알던 사도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사도세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노을 속 아름다운 수원 화성 Ⓒ수원시

화성학교 제3강을 준비합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작품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름다운 수원 화성(華城)과, 사도세자·정조가 묻힌 융건릉 등을 돌아보며 그 깊은 뜻을 공부하는 화성학교 제3강이 오는 10월 18일(토) 열립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의 과거와 현재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화성박사’인 김준혁 교수(한신대)입니다. 이번 강의는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답사를 풀어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받는 정조가 세운 ‘수원신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정조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만든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습니다. 훗날 정조를 공부하면서 정조가 대유평이란 이름을 지은 의미를 알고, 미리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할 때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도 하루에 한 꼭지씩 역사 이야기를 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정조를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이후 수원시가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컨텐츠 개발에 참여하였고, 이후 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여 학예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정조교양대학을 설립하면서 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이 바로 정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고, 화성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조시대 개혁과 민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성 화홍문 Ⓒ수원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 얘기를 들어봅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해 조정의 모든 관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자는 태산(泰山)을 끼고 북두(北斗, 북두칠성) 건널 사람이다.”
참으로 대단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대한 태산을 허리에 끼고 은하계의 중심인 북두칠성으로 뛰어 올라 수많은 별들을 건널 사람이라고 한 것이죠. 이는 바로 그의 광대하고도 무한한 도량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인임을 간파한 것이죠.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이런 시를 썼습니다.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
참 대단하죠! 이것이 바로 진짜 사도세자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시입니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드리죠.
사도세자가 정조를 낳고 뒤늦게 홍역으로 인하여 치료를 받을 때 장인 홍봉한이 긔의 무료함을 풀어주고 학업을 위하여 책을 읽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장인이 사위를 엄청 사랑했나 봅니다. 이때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책 한 권을 읽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책이 바로 <삼국지>의 ‘출사표’였습니다. 제갈량의 모든 정치적 역정과 삼국통일의 꿈을 담은 천하 최고의 명문이죠. 전 <한중록>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사도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924년 5월에 간행된 <개벽> 47호에 사도세자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글쓴이는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청오 차상찬 선생님이십니다. 이 글에는 사도세자가 타고난 품성이 강건하고 용감하였으며, 무예가 절륜하고 학문도 겸비한 인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당시 나라의 형세가 학문에 치중하여 무예를 천시하는 풍토였고, 또한 권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이 혼란스러워지자 사도세자는 이를 바로잡고 외척을 멀리하고 당쟁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영조가 받아들이지 않아 끝내 실패하였다고 청호 선생님은 쓰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마저 사도세자가 본래 영웅의 기상으로 타고 났는데 어린 시절 마음에 맞는 무예 놀이를 하게 된 것이 성장하면서도 영향을 주었고 그것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아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사도세자는 백성들에게 무인(武人)세자로 평가되고 있었고, 실제 그의 삶에 있어서 무(武)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도세자에게 무(武)란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할 수 있는 국방 강화의 기반이고, 실제 그는 이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죠.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제가 사도세자 평전을 쓰고 있어 잠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였는지 인문학습원 독자들은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이번 화성학교는 주제를 사도세자로 잡았습니다. 사도세자의 흔적을 찾아가 보기로 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영화 <명량>이 대세였습니다. 아니 이순신 장군이 대세였죠. 죄송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너무도 훌륭한 분이지만 만약 정조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우리 역사에서 기억될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정조가 <이순신전서(李舜臣全書)>를 편찬하고 이순신에 대한 현양 사업을 했기 때문에 그가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 남은 것입니다. 하다못해 그의 위대한 일기 <난중일기> 역시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인 유득공이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난중일기>란 이름 자체를 이순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바로 유득공이 지은 것이지요.

정조가 이순신을 띄운 것은 바로 무(武)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고, 그러한 무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바로 무인세자를 꿈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 재미있죠. 최근 <명량>이 1,500만명이나 관란하여 대세를 이루었는데, 이 <명량>의 뒤를 이어 바로 사도세자가 뜨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SBS에서 9월 중순부터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사도세자를 재조명하고, 내년 2월에는 <사도>라는 영화가 개봉된다고 합니다. <비밀의 문>은 영조 역으로 한석규, 사도세자 역으로 이제훈이라는 최고의 배우가 등장하고, 영화 <사도>에서는 영조로 사천만 배우 송강호, 사도세자로 유아인, 헤경궁 홍씨로 문근영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 영화 역시 천만은 기본일 거라는 예감이 드네요.

이것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진정한 역사적 복권이 이루어질 운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오랜 동안 외세에 눌려 살아왔기에 자주정신을 갖고 있던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이순신과 사도세자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 화성 기행의 주제는 사도세자이고 그의 흔적을 찾아갑니다.

▲화성 방화수류정. 정조는 “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고 말했다. Ⓒ수원시

그래서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중요합니다. 화성은 바로 정조가 자신이 상왕(上王)이 되어 주상(主上)인 자신의 아들 순조(純祖)에게 할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게 하기 위해 만든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계승해서 무예를 수련하고 활을 쏜 곳을 중심으로 찾아갑니다.

그곳이 바로 방화수류정과 연무대입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란 말, 참 아름답습니다.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수원천 제방에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방화수류정의 의미가 아닙니다. 꽃과 버드나무를 언급한 방화수류정은 실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 진실을 알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조는 늘 방화수류정에만 오면 활을 쏘았습니다. 바로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지요. 방화수류정의 진짜 의미를 알고 싶다면, 화성학교에서 만나시죠!

연무대(鍊武臺)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화성의 군사훈련장입니다. 원래 공식적인 명칭은 동장대(東將臺)입니다. 화성에는 서쪽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가 있고, 화성 동쪽 선암산 자락에 동장대가 있죠. 서장대의 편액 이름은 ‘화성장대(華城將臺)’이고 동장대의 편액 이름은 ’연무대‘인 것입니다. 이곳은 군사훈련장이자 사열 받는 장소로 정조가 활을 쏘고 군사훈련을 지휘했던 곳입니다. 바로 사도세자가 꿈꾸던 그 행위를 이곳 연무대에서 한 것이죠.

한국전쟁 기간에 이 일대에 무수한 포탄이 떨어져 모든 시설물이 파괴되었는데 이 연무대만 살아남았으니 아마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혼령이 이 건물을 살아남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웅장함은 통영의 세병관이나 여수의 진남관만은 못하지만 그 날렵함과 세밀함은 두 건물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세병관이나 진남관이 장중한 갑옷을 입은 장수의 모습이라면, 연무대는 갑옷을 벗고 장검 한 자루를 쥐고 검무(劍舞)를 추며 적들을 쓸어버리는 젊은 무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갈 곳이 바로 독산성입니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권율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데끼라는 일본 장수를 물리쳐 승전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행주대첩을 통해 한양도성을 다시 찾아 유명해진 곳입니다.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 매우 유명한 곳이죠. 독산성이 물이 부족한 산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일본군들이 조선 군대가 물이 떨어져 고통받다가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권율 장군이 말을 독산성 정상에 세우고 쌀을 모아서 말 등위로 뿌리게 했죠. 멀리서 바라본 일본군사들은 물이 부족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말을 목욕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공격전술이 우왕좌왕할 때 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 바로 세마대의 전설이죠.

이 전설 때문에 이곳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바로 사도세자가 왔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세자는 1759년, 돌아가기 3년 전 이곳을 방문하셨습니다. 이곳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조선이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군사기지의 하나였죠. 사도세자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활을 쏘고 무예 시범을 보이고, 여기에 더해 군사훈련에 대한 지시를 하기도 합니다. 철저한 무인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죠.

지금 그가 머물러 있던 운주당(運籌堂)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곳에 사도세자의 흔적은 곳곳에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도성을 떠나 머물렀던 곳이 4곳에 지나지 않는데 그중의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니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뜻깊은 곳이 될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묻힌 천하명당 융릉 Ⓒ수원시

다음으로 갈 곳이 바로 사도세자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융릉(隆陵)입니다.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과 합쳐서 이름을 융건릉이라 부르죠. 조선시대 왕릉 중 가장 아름답게 보전된 곳입니다.

사도세자가 처음부터 이곳에 잠든 것은 아닙니다. 사조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은 지 두 달 만에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서울 삼육병원 자리에 묻힙니다. 당시에 사도세자의 묘소 이름을 수은묘라고 했죠. 그런데 이곳이 풍수적으로 그리 좋은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당대 최고의 길지로 옮겨주고 싶어 했죠. 그래서 최종 결정된 자리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어느 정도의 명당 자리냐구요? 와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속리산에서부터 출발한 지기(地氣)가 한남금북정맥(漢南金北正脈)을 타고 올라와 마지막에 머문 자리라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죠. 실제 그런 곳인지 풍수에 문외한이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아도 정말 명당자리인 것은 분명하죠.

정조가 한양 인근이 아닌 100리가 넘는 곳은 굳이 86리라고 속여가면서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수원 지역을 자신의 친위도시로 만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있었겠죠.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깊은 뜻이 있었고, 그래서 반드시 융건릉을 가보아야 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나란히 누워있는 정조의 모습도 보는 것이 필요하죠. 사도세자의 융릉에서 정조의 건릉으로 건너가는 사잇길의 운치는 가을 녘에 그만입니다. 저는 제가 아는 지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데리고 가고 싶은 첫 번째가 어디냐고 물으면 당연히 첫 번째를 이곳 융건릉이라고 말합니다. 고즈넉한 이곳의 산책은 그야말로 역사와의 은밀한 대화입니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바로 용주사(龍珠寺)입니다. 대한불교 2교구 본사입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의 원찰로 지은 절집입니다. 1789년 10월에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만들어지고, 곧이어 용주사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의 모든 원당(願堂)을 혁파하였다는 사실이죠. 이는 유교국가에서 불교의 힘을 빌려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이의 복(福)을 기원하는 것이 합당치 않기 때문에 만든 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정조 자신이 아버지의 원찰을 지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이 용주사는 단순히 사도세자의 명복만을 비는 원찰이 아니었습니다. 용주사는 현륭원을 공사했던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그대로 투여돼 건축된 조선 역사상 최고의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건물 하나하나의 품격이 조선시대 여타의 건물과 매우 다릅니다. 하지만 이것만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대웅보전의 후불탱화가 바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 후불탱화는 <수원하지초록>에 김홍도가 감독해서 그린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지요. 저는 왜 이 그림이 지금까지 국보가 되지 않았나 의아해 합니다. 물론 미술사가들에 의해 이 작품이 당시의 것이냐, 후대에 덧칠하였느냐의 논란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대의 것은 분명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작품, 그것도 전통 진경화법에 서양식 화법이 더해진 명품을 보고 있노라면, 거의 200여 년 전 단원을 만나 술 한 잔 나누며 그림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용주사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채제공과 이덕무, 그리고 조선시대 승군 총사령부의 이야기, 용주사 승려들이 군복을 입고 다니며 정조를 호위했던 이야기 등등!
그 많은 이야기를 여기에 다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화성학교에서 만나 사도세자와 정조, 그리고 용주사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날 끝나고 정조가 신하들에게 했던 ‘불취무귀(不醉無歸)’를 외치면서 술 한 잔을 해도 좋지요!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화성학교 제3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8:00 서울 출발 (정시에 출발합니다.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화성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강 여는 모임
09:00 화성 화홍문 도착
09:00~11:00 화성 화홍문, 방화수류정, 연무대, 동북공심돈, 창룡문 답사
11:00~11:40 독산성 이동
12:00~13:00 독산성 보적사에서 점심공양
13:00~14:00 독산성 답사
14:00~16:00 융건릉 이동, 답사
16:00~17:00 용주사 이동, 답사
17:00 서울 향발, 제3강 마무리모임

▲화성학교 제3강 답사로 Ⓒ화성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식수, 윈드재킷, 우의,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화성학교 제3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강의비, 2회 식사비, 문화재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화성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hwaseong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화성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화성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역사교사 100명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 100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였습니다. 2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고 3위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백성의 나라, 그가 추진하였던 소통의 정책이 오늘 이 사회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가 과대 포장되어 그가 추진했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전근대 그 어떤 국가지도자들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 같은 국왕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개혁기반도시 화성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역사문화도시가 된 것입니다. 화성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성곽의 웅혼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움이 곧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표현대로 화성의 아름다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본주의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참여한 기술자와 날품팔이들 모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막기 위한 척서단(滌暑丹)과 오늘날의 영양제인 제중단(濟衆丹)을 하사하고 겨울에 솜옷과 털모자를 주었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고위직들이나 썼던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축성에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들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 컸을 것이고 국왕의 따스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화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 조선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치를 하고, 여성이 상위에 남성이 하위에 자리하며, 조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근대화로 나가는 시대의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 화성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화성 안에는 국방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최강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주둔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예24기를 익히고 그 무예를 토대로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화약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성공시켰습니다. 중국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약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이 지금 화성에 오롯이 남아 무예24기를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화성을 찾아가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조가 꿈꾼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만들기의 모든 것을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정조시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국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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