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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의 도읍지 공주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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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웅진백제의 도읍지 공주고을

9월 고을학교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2강으로, 충청남도 공주고을을 찾아갑니다.

공주(公州)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不雲國)이었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熊津,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 이후 538년 사비(泗沘,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 동안 웅진백제의 수도가 된 이후 유서깊은 고을을 일궈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제12강은 9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정지산 유적지→고마나루(웅신각)→선화당→포정사→동헌→국립공주박물관→공주향교→공산성→점심식사 겸 뒤풀이(<희가>에서 한정식)→마곡사(남원/북원/백범 김구 유적지)→서울의 순입니다.

▲공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2강 답사지인 공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내려오다가 태백산을 빚어 올린 후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백산을 거쳐 삼남지방(三南地方)을 동서로 가르며 계속 남하하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을 솟구쳐 올립니다.

이어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지리산에 닿기 전에 영취산에서 서쪽으로 산줄기 하나가 갈라져 나오는데 이를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이라 하고, 다시 주화산에서 남북으로 갈려나가 남으로 뻗은 산줄기는 섬진강(蟾津江)의 서쪽에서 호남(湖南)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이고 북으로 뻗은 산줄기는 금강(錦江)의 남쪽에서 충남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금남정맥(錦南正脈)입니다.

금남정맥은 북으로 운장산,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에서 크게 솟구쳤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부여에 있는 금강의 조룡대로 빠져들어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합니다.

공주고을은 중앙에는 금강(錦江)이 그 지류인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등의 하천들을 받아 안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그 부근에는 작은 들판이 흩어져 있고 북서쪽에는 태화산(泰華山, 416m)의 산군이, 남동쪽에는 계룡산(鷄龍山, 845m)의 산군(山群)이 이어져 있으며 금강 남쪽의 공산성을 중심으로 한 관치구역(官治區域)은 200~300m 정도의 구릉성(丘陵性) 산지로 되어있습니다.

계룡산은 금남정맥 끝자락에 솟아오른 산으로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鷄)볏을 쓴 용(龍)의 형상을 닮았다고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풍수적으로 최고의 명당이라는 ‘금계포란(金鷄抱卵)’과 ‘일용농주(日龍弄珠)’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계룡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명산(名山)에 들어 신라시대는 5악(五嶽) 중의 하나였고 백제시대는 이미 계룡, 계람산, 옹산, 중악 등의 이름으로 바다 건너 당나라까지 알려졌습니다. 조선시대는 남쪽 산기슭에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하려 했고 특히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 했으며 이러한 도참사상(圖讖思想) 때문에 한때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성행했으나 1984년 소위 ‘종교정화운동’이란 명분으로 모두 정리하였고 그 자리에는 국군의 수뇌부인 계룡대(鷄龍臺)가 들어서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산신사상(山神思想)에 따라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계룡산에 중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을 세워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중악단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유일한 유적입니다. 대문간 채, 중문간 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으며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으며 현판은 조선후기 문신 이중하(李重夏, 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중하는 조선과 청나라가 1885년과 1887년 2차례에 걸쳐 개최된 국경획정회담에서 회담 대표인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활약했었습니다.

빼어난 산세에는 명찰(名刹)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 또한 맑다. 그리고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가 되어야 큰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곳이 나라 안에는 네 곳이 있다.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한양의 삼각산(三角山), 진잠(鎭岑)의 계룡산,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이다”라 하였다. 특히 계룡산의 특징에 대하여 “웅장함에는 오관산보다 못하고 수려함에는 삼각산보다 못하나 그 내맥(來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빼어난 산세에는 명찰(名刹)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마곡사 북원.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공주시

그래서 계룡산 자락에는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어 갑사(甲寺), 동학사(東鶴寺), 신원사(新元寺) 등 유서 깊은 사찰과 숙모전(肅慕殿), 삼은각(三隱閣) 등 충절(忠節)들을 제사하는 사당과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오누이탑 그리고 조선 초에 도읍을 건설하다가 중단한 신도안(新都案) 등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태화산(泰華山, 416m)은 북쪽으로 활인봉이, 남쪽으로 나발봉이 솟아 있어 마곡사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그린 모양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으며 예산고을로 가는 길목으로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도적들의 산채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산봉우리의 이름에서 활빈당의 근거지였던 자취를 일부나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화산은 산 자체보다 그 자락에 있는 마곡사가 더 유명한데 이곳은 예로부터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로 <택리지>나 <정감록>과 같은 지리도참서(地理圖讖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벽산(蒼碧山, 277m)은 반포면 마암리 금강 변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금강의 절경 중 하나인 창벽(蒼碧)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창벽은 계룡산이 북쪽으로 줄기를 뻗어 반포면 봉곡리에 이르러 국사봉(392m)을 일군 다음, 다시 북쪽으로 내달려 창벽산을 마저 일구고 급히 금강으로 잦아들면서 생긴 절경으로 폭 100m, 높이 25m의 거대한 바위절벽과 그 아래를 도도히 흐르는 금강이 어우러져 예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공주의 명승입니다.

월성산(月城山, 314m)은 옥룡동에 있으며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처음으로 받아 정안면 고등산 봉수로 연결하는 기능을 하였던 봉수대가 있는 곳으로,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통신하던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봉화대를 복원하기 위해 시굴조사를 하던 중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의 흔적이 발견되어 현재 봉화대와 함께 발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정지산(艇止山)은 금강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굽어드는 곳의 남쪽에 있는 낮은 구릉으로, 그곳에는 백제시대 국가적 차원의 제의(祭儀)시설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유적지 내에서 국가의 중요시설에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되었고, 이외에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유적은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賣地券)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이 사후 무령왕릉에 안치되기까지 2~3여 년간 수습되어 보관된 곳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건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이 없는 건물이어서 영구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적지 내의 대벽건물지에서는 얼음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공주의 3대 하천은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으로 모두 금강에 합수되어 서해로 흘러듭니다.

유구천(維鳩川)은 공주, 예산, 아산의 경계인 봉수산(鳳首山, 534m)에서 발원한 후 남서류(南西流)하여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유구, 신풍, 사곡, 우성 일대를 적시고 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사곡에서 마곡천(麻谷川)과 합류하는데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은 남사고(南師古)가 선정한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로 유명한 피난처입니다.

정안천(正安川)은 정안면 산성리(山城里) 쌍령(雙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정안, 의당, 우성 일대를 흐르는 하천으로, 정안에서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며, 옛 이름은 일신북천(日新北川)이었으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일신북천(日新北川)은 북쪽 10리에 있다. 쌍령(雙嶺)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의 상류로 들어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교천(大橋川)은 의당면 덕학리에서 발원하여 의당면의 중부와,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과 장군면을 거쳐 연기면에서 금강에 합류하는데, 상류부인 중흥리에는 중흥저수지가 축조되어 있고, 송학리와 용현리의 하천변에는 송학들이, 한솔동의 하천변에는 평기앞들과 구례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연미산에서 맞이한 금강 일출 ⓒ공주시

금강은 전북 장수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우리나라 6대 강의 하나이며 유로 연장이 401㎞로 남한에서는 낙동강, 한강 다음으로 큰 강입니다. <당서(唐書)>에서는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고 금(錦)은 ‘곰’의 사음(寫音)으로서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熊津]라는 명칭에 남아 있으며 달리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릅니다.

곰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

곰나루의 본래 명칭은 고마나루인데 공주의 옛 지명인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로서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하며,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마나루는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던 곳이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습니다. 또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 터가 남아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수상교통로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입니다.

공주의 사찰들은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역사도 오래 되었고 유적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갑사(甲寺)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어 그 탑의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그곳에 갑사를 창건하였다 합니다.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久爾辛王 元年, 420년)이었으며, 556년(위덕왕 3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天佛殿)과 보광명전(普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천여 칸의 당우(堂宇)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를 창건하여 화엄10대 사찰의 하나로서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신라시대 887년(진흥왕 원년)에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중창하여 고려시대까지 이어졌고,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과 1654년(효종 5년)에 중수하였으며, 이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지금은 경내에 15동의 전각당우(殿閣堂宇)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靈圭大師)를 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원사(新元寺)는 651년(의자왕 11년)에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 보덕(普德)이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것을 중창하였고 1298년(충렬왕 24년)에는 무기(無寄)가 중건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무학(無學)이 중창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고 1866년(고종 3년)에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중수하면서 신원사라 하였으며, 1876년에 보연(普延)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룡산의 주변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하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 향각(香閣), 영원전(靈源殿), 대방(大房) 등이 남아 있으며 향각의 불상은 명성황후가 봉안한 것이라고 하며 마당에는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인 오층석탑과 부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층석탑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상층 일부가 없어지고 4개 층만 남아 있는데 1975년의 보수공사 때 1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구(舍利具)와 함께 고려시대의 화폐인 개원통보(開元通寶), 함원평보(咸元平寶), 황송통보(皇宋通寶)가 발견되었습니다.

동학사(東鶴寺)는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상원조사가 최초 창건하였는데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33대 성덕왕 23년) 그곳에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쌍탑(雙塔)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하였답니다.

고려시대에 와서 920년(태조 3년)에 왕명을 받아 도선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이때 원당을 건립하고 국운융창을 기원했다고 해서 태조의 원당이라 불리었는데 이 원당은 조선 초에 소실되었고, 태조 19년(936년)에 신라가 망하자 신라의 유신(遺臣)으로서 고려 태조 때 대승관 벼슬을 한 유차달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계사를 짓고 절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지금의 동학사로 바뀌었습니다.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고 했으며,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邦理學)의 조종(祖宗)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배향했으므로 동학사라는 설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스님과 함께 단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충신 정몽주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457년(세조 3년)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 이축, 조려 등과 더불어 삼은단(三隱壇)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端宗)의 제단을 증설하였습니다. 다음해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이곳을 들러 보고는 감동하여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 안평대군, 금성대군,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동(銅)으로 만든 세조의 인신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절의 스님과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공주는 63년간 웅진백제의 수도

마곡사(麻谷寺)는 신라 선덕여왕 9년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舞扇)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말에는 도둑 소굴이 된 적도 있고 임진왜란 이후 약 60년간 폐사되기도 했었습니다.

가람은 경내 중심을 흐르는 희지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누어 당우가 배치된 특이한 형태입니다. 남원에는 영산전(靈山殿)과 선방으로 사용되는 요사채가 있고,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극락교를 건너면 다다르는 북원에는 대광보전(大光寶殿)과 그 앞마당에 라마풍의 오층석탑이 있고, 서쪽에는 응진전(應眞殿)이 동쪽에는 심검당(尋劒堂)과 고방(庫房)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으며, 응진전 앞에는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기념식수한 향나무가 서 있고 대광보전 뒤로 높이 쌓은 축대 위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공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不雲國)이었고, 백제가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 원년) 이후 538년(성왕 16년)에 사비(泗沘)로 천도하기까지 63년 동안 웅진백제의 수도였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공주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고, 670년 신라가 차지한 후에는, 686년(신문왕 6년)에는 웅천주(熊川州)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縣)을 통괄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년)에는 웅주(熊州)로 개칭하였다가 고려시대 940년(태조 23년)에 공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년)에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공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성종 12년)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1341년(충혜왕 2년)에는 목(牧)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 때 공주에 진관(鎭管)이 설치되었고 1581년(선조 14년)에 충청감영(忠淸監營)이 충주(忠州)에서 공주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고종 32년)에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충남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는데 1931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공주는 하나의 면이 되어 군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38년에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에 공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공주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에 다시 공주시와 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주는 과거에는 금강의 조운(漕運)이 좋아서 백제의 전성기에는 중국과 교역하고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근세에 들어와서 금강을 이용한 내륙수로(內陸水路)는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의 철도 개통과 함께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1933년에 건설된 금강대교는 공주가 철도교통 대신에 자동차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공주시를 중심으로 국도 23번, 32번, 36번, 39번, 40번 등 5개 노선이 남북으로 아산, 천안, 논산, 부여와, 동서로 대전, 조치원, 청양 등과 연결되어 있어 충남의 교통 요충지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주는 웅진백제의 도읍으로, 고려시대는 12목(牧)의 하나로, 조선시대는 충청도 4목 중의 하나로, 그리고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으로서 왕과 관찰사와 수령이 집무를 보았던 유적들이 관치구역에 남아 있습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선화당 10칸, 관풍루(觀風樓) 6칸, 내아사(內衙司) 27칸, 좌우도(左右道) 호적고(戶籍庫) 각 7칸, 내삼문(內三門) 좌우헐청(左右歇廳) 각 3칸, 포정사(布政司) 문루 7칸 등 50여 채의 건물과 칸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문루만이 남아 있습니다.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의 행정청으로 순조 33년(1833년)에 건축된 건물인데 원래 공주사대부고의 부지 내에 있었던 것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진열관으로 이용하다가 1988년 해체하여 현재의 국립공주박물관 옆 부지에 복원하였습니다.

포정사(布政司)는 조선시대 충청도관찰사의 공청이었던 선화당 앞에 서 있던 정문으로 누마루 형식의 건물로서 문루 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진각지붕 모양을 제외하면 건물 구조가 일반 문루 건축과 달라 이것이 조선시대의 포정사 건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특히 그동안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기에 더욱 의문이 들고 이마저도 교동에 있던 것을 1993년에 선화당 앞으로 뜯어 옮겨왔습니다.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고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동헌에서 행해졌으며 동헌 내에는 각종 집무실과 창고를 두고 주변에는 객사와 향교 등 관치구역으로서 필요한 부속 건물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3품의 공주목사는 세조(世祖) 때 시행된 진관(鎭管) 체계 수립에 따른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게 되었고, 예하에 임천군과 한산군과 10현을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주목 관아는 동헌을 비롯한 정청(政廳)과 중앙기관인 객사 외에 진영(鎭營)이 소속된 여러 건물들과 창고 건물들이 지금의 공주시 중동 도립병원 일대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객사 32칸, 아사(衙舍) 26칸, 향소청(鄕所廳), 향사당(鄕射堂) 13칸, 군관청(軍官廳) 7칸, 작청(作廳) 10칸, 진무청(鎭撫廳) 7칸, 지인방(知印房) 3칸, 우영(右營) 15칸, 토포군관청(討捕軍官廳) 8칸, 기고청(旗鼓廳) 9칸, 작청(作廳) 6칸이 있었으며. 창고 시설로는 대동고(大同庫) 20칸, 보역고(補役庫) 5칸, 관청고(官廳庫) 6칸이 있었고, 사창(司倉) 16칸은 공산성 안에 배치되었습니다.

공주목의 동헌 건물은 도립병원 건립 당시 대책 없이 철거되어 1980년대 중반 금성동 산기슭인 황새바위 밑에 복원되었다가 또다시 소실되어 곰나루 주변 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선화당 앞마당에 새롭게 이전 재축되었습니다. 본래 감영과는 다른 위치에서 각기 여러 동의 부속 전각을 거느렸던 동헌이 본래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감영 경내에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웅진백제의 도성이었던 공산성

공주향교는 원래 웅진동 송산리에 있었으나 인조(仁祖) 원년(1623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경내의 지세에 따라 2단으로 정지하였고 아랫단에 외삼문과 명륜당 앞뜰에는 동재와 존경각이 좌우에 있으며 후면으로 한단 높은 곳에는 내삼문이 있고 그 정면에 대성전이 세워졌으며 좌우에 동무, 서무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공주의 관치구역은 본래 공산(公山)과 월성산(月城山) 주변에 조성되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많은 관립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것을 곰나루 부근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하면서 대부분의 유적들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이곳이 공주의 본래 관치구역인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공주의 대표적인 서원은 충현서원과 명탄서원입니다.

충현서원(忠賢書院)은 조선 선조 14년(1581년)에 서기(徐起)에 의하여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이존오(李存吾), 성제원(成悌元), 이목(李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뒤 인조 2년(1624년)에 조헌(趙憲)이 함께 배향되었고, 인조3년 (1625년)에 ‘충현(忠賢)’이라 사액되었으며 숙종 15년(1689년)에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을, 숙종 39년(1713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년)에 복원하였고 고종 8년(1871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원 터에 단을 만들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6년에 복원하였습니다.

건물의 배치는 뒷면에 사당이 있고 전면에 강당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이고 사당에는 주자를 중앙에 두고 그 좌우에 7현(七賢)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원 안에는 사당, 재실, 충현서원사적비, 충현서원사실, 우암송선생추향기비석 하마비(下馬碑)등이 남아 있습니다.

명탄서원(鳴灘書院)은 성종 21년(1490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공산 이씨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고려 유신인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분입니다. 처음에는 충남 연기군 명탄에 충절사(忠節祠)라는 사당을 세워 달리 명탄서원이라 부르다가 선조 18년(158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철종 2년(1851년)에 공주의 유생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고종 5년(1868년)에는 잠시 철폐되었으나 1955년 후손들이 충절사를 다시 지어 이곳에 두 분의 위패를 모셨으며 1985년에 묘정비와 강당, 고직사 건물을 지었고 서원 뒤편에는 이명덕의 묘와 묘비가 있습니다.

공주의 산성은 웅진백제의 도성(都城)이었던 공산성(公山城)과 공산성의 보조산성인 옥녀봉성 그리고 무성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공산성은 금강변에 있는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축조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원래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石城)으로 고쳤습니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렀으며 475년(문주왕 원년) 한강변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3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아차산(峨嵯山) 전투에서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자 한성백제(漢城百濟)를 마감하고 남하하여 금강 남쪽의 웅진(熊津)에 안착하여 새롭게 웅진백제(熊津百濟)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그러나 웅진으로 천도 후 잠시 동안 귀족세력의 발호로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고 63년이라는 기간 동안 세 명의 왕이 유력귀족에게 피살되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만 24대 동성왕(東城王), 25대 무령왕(武寧王)을 거치면서 내부적인 안정과 더불어 재도약의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동성왕은 488년부터 490년까지 북중국의 북위(北魏)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으며 동성왕을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남중국의 양(梁)으로부터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를 이기기 위해선 백제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였기에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중국의 양, 한반도에서 동쪽으로 이웃한 신라, 일본열도의 왜(倭)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반(反)고구려 전선을 구축하여 그 중심국 역할을 자처하면서 고구려에 지혜롭게 대응하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와 문화교류의 폭을 더욱 넓힘으로써 무령왕 시기 백제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도약시켰던 무령왕에 이어 등극한 26대 성왕은 매우 영리하고 백성의 사랑을 받는 왕으로서 고구려에 잃어버린 한강 일대를 되찾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니 이를 위해 백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성왕은 백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천도를 결심하고, 웅진으로부터 금강을 따라 하류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인 사비(泗沘, 현재의 부여)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사비백제((泗沘百濟)시대를 새롭게 펼쳐 나갔습니다.

웅진백제의 왕도인 웅진(공주)은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으로, 공주를 끼고 흐르는 금강(錦江)은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왕성인 웅진성으로 추정되는 공산성은 산성이라서 평지성보다 견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했던 것은 금강이 수상 교통로였다는 점입니다.

백제가 비록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남하하였지만 한성백제 시기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해상 활동은 웅진백제 시기 금강을 중심으로 재개되어 금강을 따라 번화한 포구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중국 대륙과 일본을 잇는 국제항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산성 찾은 최치원의 시

공산성은 백제 멸망 직후에도 의자왕(義子王)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金憲昌)의 난(헌강왕14년 822년)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李适)의 난(1623년)으로 인조(仁祖)가 피난했던 곳입니다. 특히 김헌창의 난은 진골(眞骨) 출신인 부친 김주원(金周元)이 국왕에 선임되지 못하고 자신은 중앙의 대신에서 웅천군 도독으로 전보된 것에 불만을 품고 공산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年號)를 경운(慶雲)이라 하며 신라왕실의 정통성에 반기를 들은 난입니다. 그 세력이 충청, 전라, 경기 그리고 경상도의 일부 지역까지 미쳤으나 경주 귀족 연합세력의 반격으로 패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웅진으로 퇴각하여 공산성에서 10여 일간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결과 패배하여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김헌창이 공산성에서 10여 일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공산성이 견고하였다는 반증으로 이곳을 찾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금대는 강과 산이 마치 그려서 만든 것 같고 (襟帶江山似畵成)
가련하다 오늘에야 고요히 병진(兵塵)이 사라졌네. (可憐今日靜消兵)
스산한 바람이 홀연 파도를 놀라게 하니 (陰風忽捲驚濤起)
그때의 북 두드리는 소리인양 생각되네. (猶想當時戰鼓聲)

공산성에는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는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고 암문(暗門), 치성(雉城), 고대(高臺), 장대(將臺), 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과, 쌍수정(雙樹亭), 영은사(靈隱寺), 연지(蓮池), 임류각(臨流閣), 만하루(挽河樓)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성안에서는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등의 유물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공산성이 백제 멸망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는 시내에서 공산성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이었습니다.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진남루도 그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입니다.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는 옛 망북루(望北樓)의 터에 선조 때 신축한 것으로 공산성이 금강에 임하고 있는 도하(渡河) 지점에 세워져 있고 남쪽에 위치한 진남루에 대하여 북문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큰 문루 건축이어서 상층에는 누(樓)마루를 깔았고 하층은 통행로로 삼고 있으며 고창읍성(高敞邑城)의 공북루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공산성의 동문인 동문루(東門樓)는 공산성 중심부에서 남동방향에 있었는데 훼손되어 단지 유지만 남아 전하던 곳에 지금은 문루가 복원되었으며 문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 형식에 따른 것으로 규모는 기록에 남아있는 세 칸 이라는 내용에 맞추어 건립한 것입니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는 유지만 남아 있었던 것을 최근 새로운 형태로 문루를 복원하였는데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여 성의 입구를 개구식(開口式)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형태로서 본래의 문지(門址)는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광복루(光復樓)는 공산성의 동쪽 최고봉에 있는 누각으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였으며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현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불렀다가 1946년 4월에 백범 김구(金九)와 성재 이시영(李始榮)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광복루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광복루 밑에는 정유재란 때 공주에 주둔하면서 주민을 편안하게 보호하였던 명나라 세 장수인 제독(提督) 이공(李公), 위관(委官) 임제(林濟), 유격장(遊擊將) 남방위(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사은송덕비(謝恩頌德碑)인 명구삼장비(明國三將碑)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들 비석은 일본인들에 의해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매몰되었다가 해방 후 1945년에 현 위치에 이전되었고 유격장 남방위의 비에는 일인들에 의해 자행된 심한 탄흔과 ‘왜구(倭寇)’ 등의 글자가 깎인 채 남아 있습니다.

임류각(臨流閣)은 공산성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정도 떨어진 산의 중턱 서쪽 사면에 위치하며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후, 약 25년 지난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493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이 남아있는 건물로서 1980년 발굴 조사를 실시, 유지는 정비되어 있으며 건물의 문화적, 학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래의 유지에서 약간 위쪽에 새로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쌍수정(雙樹亭)은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정각(亭閣)으로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1624년)으로 공산성으로 파천하여 머물렀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인조가 환도하며 쌍수에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작위를 하사하였으나 그후 나무는 죽고 옛 자취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조가 머물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李壽沆)이 영조 10년에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 복원된 건물은 단층이나 본래의 모습은 이층의 누각이고 누각 주변에 담장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0년에 처음 창건했을 때의 명칭은 삼가정(三架亭)이었습니다.

인조, 이괄의 난 피해 공주로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는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사실을 기록하여 숙종 34년(1708년)에 세웠던 석비입니다.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남천(南遷)에 대한 내력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7일 동안의 행적, 그리고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으며, 비문은 우의정 신흠(申欽)이 찬(撰)하고 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이 서(書)하였으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전(篆)하였는데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음기(陰記)하였습니다.

쌍수정 아래에는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광장이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곳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게 됐습니다. 조사 결과 건물지를 비롯하여 용수(用水)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이들 유구와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시대로 편년되어 왕궁지의 가능성을 높여주었습니다.

수습된 유물은 대체로 기와 종류[瓦類]인데 백제시대의 8엽, 10엽 연화문(蓮花紋)을 비롯하여 파상문(波狀文) 수막새 기와이고, 10엽 연화문 수막새 기와는 연꽃의 끝부분 반전이 심하게 이루어진 백제 초기의 것으로 공산성에서 주로 출토되는 전형적 형식입니다. 평기와 중에는 웅천(熊川) 혹은 관(官)자의 명문이 찍힌 것을 비롯한 각종의 도장문(印花文)이 출토되었고 토기는 백제토기로 등잔과 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며 특수 유물로 봉황형 금동향로가 수습되었는데 이는 부식이 심하고 출토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조사된 건물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왕궁지로 추정되는 광장의 남쪽에 연못이 있는데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을 원형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전체적인 형상은 대접형으로 정연한 축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외형상으로는 조경(造景)을 위한 시설인 것으로 추정되나 또다른 기능, 즉 용수저장을 위한 시설로도 보이는데 이는 연못 내의 용수가 외부에서 길어다 채운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연지(蓮池)는 영은사(靈隱寺) 앞에 있는, 동서가 긴 평면 장방형의 연못 터로 호안석축(護岸石築)은 단을 두어 쌓았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위를 넓게 하고 아래를 좁혀 쌓아 9층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 통로를 만들어 연지의 바닥까지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특히 암문을 통해 연지에 닿을 수 있는 완전한 유적을 발굴한 것은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지 앞에는 만하루가 복원되어 있는데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을 관람하는 정자의 성격도 함께 띤 누각으로서 영조 때 건립되었으나 홍수로 붕괴, 매몰되었던 것을 1984년에 중건하였습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에 따르면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쌍수정(雙樹亭) 남쪽의 것과 연지의 2곳만 확인되었고, 사창(司倉), 승창(僧倉), 남고(南庫), 북고(北庫), 별창고(別倉庫), 화약고(火藥庫), 빙고(氷庫) 등 창고가 있었으며,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부근에는 장대(將臺)가 있었다고 합니다.

옥녀봉성(玉女峰城)은 공산성 동북쪽에 있는 옥녀봉 정상을 흙으로 둘러쌓은 테뫼식 토성으로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실제 축성 높이보다 훨씬 높아보이게 하였습니다. 흙으로 쌓은 산성이라서 대부분 붕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적고, 부분적으로는 성벽의 통과선을 추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현재 북쪽 벽은 남아있고 남쪽 벽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서쪽 벽은 공산성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의 위치, 성 안에서 발견된 유물, 성벽의 축조 방법들로 보아 공산성에 딸린 보조산성인 듯합니다.

무성산성(武城山城)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된 석성으로 산성의 대부분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지만 능선 정상부를 지나는 서벽의 경우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곳곳에 남아있는 치성(雉城)도 대부분 붕괴되어 치성인지조차 불분명하며 성문은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건물 터 또한 평탄하게 터만 남아 있어 관련 유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공주 지역에 있는 다른 산성과 달리 꽤 높은 614m에 자리잡고 있고 축성법도 성의 안과 밖을 같은 높이로 쌓아 올린 협축식으로, 성의 바깥쪽만 쌓아 올린 편축식(片築式)을 한 다른 산성과 비교가 됩니다. 다행히 치성이 방형(方形)으로 뚜렷하게 다섯 개나 남아 있어 축성 시기에 대한 해명의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며 홍길동이 축성하였다는 전설도 무성산성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근거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에는 월성산, 고등산, 쌍령산의 세 곳에 봉수대가 남아 있습니다.

월성산(月城山) 봉수대는 논산 노성산 봉수대에서 보내는 봉수를 받아 고등산 봉수대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데, 봉수대의 석축은 남북 33m, 동서 13m로, 남북이 긴 타원형의 형태이고 둘레는 80m에 이르며 석축의 남쪽에는 봉수대로 출입하기 위한 문지(門址)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건너편 봉우리와 연결되는 작은 길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석축을 축조하는 방법은 자연 할석을 이용하여 면을 맞추면서 쌓아올렸고 석축 내의 봉수 유지(遺址)는 거의 평탄하게 되어 있으나 그중 북쪽이 낮고 더 평탄한 편인데, 이곳이 봉수대와 관련된 건물 터가 아닌가 생각 됩니다. 월성산 봉수대는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세 개의 봉수대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으며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서울로 통신하던 중요한 봉수대였습니다.

고등산(高燈山) 봉수대는 월성산 봉수대에서 받은 봉화를 북쪽에 있는 쌍봉산 봉수대로 연결하는 봉수대로서 둘레 78m의 둥근 석축의 형태이며 석축 북쪽에 원형의 고대(高臺)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록 퇴락하였지만 봉수지 자리로 추정되며 평평한 대지에 봉수와 관련된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민가 1채가 남아 있어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고 석축의 남쪽에는 폭 2m의 출입구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고등산 봉수대는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세 개의 봉수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있는데 조선시대 통신체계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으며 또한 타 지역과 공주 간의 연결 체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쌍령산(雙嶺山) 봉수대는 조선 전기에 설치되었고 공주시 정안면과 천안시 광덕면에 걸쳐 있는 쌍령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공주의 고등산 봉수대에서 연락을 받아 천안의 대학산 봉수대로 전달하던 봉수대입니다. 둘레 93m의 반월형 석축을 쌓았고, 석축의 북쪽에 고대를 만들었고 고대의 남쪽에 약간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이곳에 봉수대에 딸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석축의 남쪽에 출입 시설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나 이 또한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뚜렷하지 않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2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문화유적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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