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고 지위가 높아지면, 보수 기득권 성향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반대 경우도 제법 있다. 지위가 높아진 만큼 세상을 더 넓은 눈으로 보게 되면, 전에는 미처 살피지 못했던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이다.
1980년 엘살바도르 우익 군사 정권에 의해 암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이런 경우다. 1989년 개봉된 영화 <로메로>의 실제 주인공인 그는 전형적인 보수 엘리트였다. 아니, 수구 성향에 가까웠다. 라틴어가 아닌 현지 언어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끔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결정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심경을 종종 토로했다니까 말이다. 이런 그가 대주교가 되면서 달라졌다. 높은 지위에 올라서 더 넓게 보게 되자 농민과 빈민, 원주민들의 사연이 눈에 들어왔다. 극심한 양극화와 차별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만, 부를 독점한 소수 기득권층이 정치와 언론을 장악한 구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로메로 대주교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었던 그들의 편에 서서 말과 글의 길을 터주는 게 교육받은 자의 의무라고 봤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기 시작하자, 로메로 대주교의 친구들은 일제히 적이 됐다. 군사 독재를 규탄하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로메로 대주교는 한순간에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됐고, 결국 1980년 3월 24일 미사 도중 암살당한다. 신자들 속에 섞여 있다 총을 쏜 괴한 4명의 정체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탓이다.
로메로 대주교가 가톨릭 성인으로 추대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최근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에게 로메로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면서 “그를 복자로 선포하는 것(시복)을 막던 교리 상의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말했다. 복자는 성인 전 단계다. 교황의 발언대로 바티칸은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지난해 5월 엘살바도르 대통령과 면담 때도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다음은 로메로 대주교가 생전에 남긴 말.
"저는 자주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죽일 때 저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을 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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