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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도 파업 노동자 편으로 만든 평양냉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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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도 파업 노동자 편으로 만든 평양냉면의 힘

[프레시안 books] 백헌석·최혜림 <냉면열전>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꼭 있다. 이야기는, 수십 가지 재료에 칼을 대고 불을 넣어 조리한 이 음식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 거기에서 시작된다. 음식의 원형을 떠올리고,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손을 어루만지며, 음식에 얽힌 내밀한 이력까지 술술 풀어놓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식사 시간도 괜스레 길어진다. 그런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풍류에 일가견이 있는 전직 고위 관료 A씨가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특히 평양냉면을 앞에 두고 ‘썰’ 풀기를 좋아한다. 갓 뽑아낸 거무튀튀한 면발을 통째로 집어 들고 식초를 두르면서 "냉면 먹을 때는 식초를 면에 직접 뿌려야 해"라고 한다. 평양에서 만난 이가 가르쳐준 냉면 맛있게 먹는 비법은 간장이었다. 냉면 국물 위에 간장 통을 거꾸로 들고 두 바퀴 돌린다. 찬 성질의 메밀과 궁합이 잘 맞는 따뜻한 성질의 노란 겨자를 국물에 훌훌 풀면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얼음 성한 국물을 뒤적여 젓가락으로 면을 한껏 뜬다. 냉면은 이빨로 끊어 먹는 게 아니라, 목젖으로 끊어 먹는다고 하지 않나. A씨는 평양냉면에 얽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그릇 안의 면발이 퉁퉁 불어가는 것도 모른다. 냉면은 '호로록' 소리 내며 빨리빨리 먹는 게 생명인데도.

<냉면열전>(인물과사상사, 2014년 7월 펴냄)의 작가 백헌석·최혜림은 그런 이야기꾼이다. MBC 다큐 스페셜 '냉면' 편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책 <냉면열전>은 냉면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냉면을 앞에 두고 "이 냉면이란 게 말이야"라며 입을 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 땡볕을 피해 자리 잡은 허름한 냉면집에 앉아 결국 두 시간 동안 술잔을 기울이게 되는 기분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된 재현 사진과 컴퓨터 그래픽은 먹음직스러운 냉면 고명과 같다. 냉면의 '일반명사'와도 같은 평양냉면 이야기, 그리고 함흥에는 정작 함흥냉면이 없더라는 은밀한 내력, 우리가 잘 몰랐던 황해도 냉면인 해주냉면 이야기 등, 다양한 냉면들의 유래와 함께 냉면을 중심으로 펼쳐내는 근대 한국의 미시사까지, 이 책은 한 그릇에 통째로 담아낸다.


냉면의 미시사, 그 쏠쏠한 재미

냉면과 관련된 사료들을 뒤적이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기록들도 많이 발견되는데, 1926년 김량운이 발표한 소설 <동광>의 한 장면은 특히 눈에 띈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신문사 기자인 순호는 여름이 극성을 부리는 8월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으로 향하다가 전차가 종로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냉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 돼지 편육과 채를 친 배, 노란 겨자를 위에 얹은 냉면 한 그릇을 갑자기 생각하고는 얼마나 급했는지 차장에게 '정차'라는 말 대신 '냉면'이라고 외쳤다." (162쪽)

1920년대에 냉면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최고의 외식 메뉴였고, 자정이 넘어도 배달이 가능한 음식이었다. 요즘에는 중화요리집이 배달의 '기수'이지만, 1960년대까지 배달 음식의 대명사는 냉면이었다고 한다. 스무 그릇의 냉면과 차랑차랑 육수 주전자를 들고 위태위태하게 곡예를 하듯 운전하는 자전거 배달부의 모습이나, 상전 입맛 맞추느라 새벽 짚신 발로 뛰어가 "관철동 마님 댁에 냉면 두 그릇이요"를 외치고 돌아오는 머슴의 모습은, '씨티100'도 없고 전화도 귀하던 시절 우리 냉면사(史)의 한 장면이다.

딱딱한 메밀 반죽에 장정 셋이 매달려 면을 뽑아내던 것을 무쇠 제면기가 대신하고, 한강 얼음 각 떠 보관하던 것을 냉장 시설이 대체하면서, 대표적인 겨울 음식이던 냉면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1년 내내 '모던 보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됐다고 한다. 또한 따뜻한 남쪽 지방까지 냉면이 내려오면서 대장균 번식을 막기 위해 식초를 집어넣었던 것이, 요즘 냉면의 새콤한 맛으로 굳어졌다. 물론 동치미를 담그기 어려웠던 남쪽에서 식초만큼 동치미 맛을 재연할 수 있는 재료도 없었을 것이다.

ⓒ인물과사상사
냉면 배달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당시 민중의 삶을 잘 드러내준다. 1926년 1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냉면 배달부 파업' 소식을 자세히 다룬다. 평양냉면집 자전거 배달부 16명이 동맹 파업을 벌였는데, 그들의 요구는 일급 6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파업은 결국 배달부들의 승리로 끝났다. 1920년대에 냉면 배달부의 파업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고 한다. 1929년 평양 시내 냉면 배달부 파업에는 무려 160명이 참여했었다. 당시 냉면집 주인들은 160명 전원을 해고하는 강수를 두는데, 이 이야기의 결말은 놀랍다. 평양 시민들이 냉면을 배달시켜 먹을 수 없어 불편을 겪게 되자, 결국 평양경찰서장이 냉면집 주인들을 불러놓고 '냉면 배달부를 다시 채용하지 않으면 영업 정지를 시키겠다'는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노조 파괴 전문가'들이 나서면 160명 정도는 간단히 해치우는 세상이다. 초법적 해고를 합법으로 포장할 수 있는 방법은, 마치 금융권에서 파생 상품이 개발되듯 만들어지고 있다. 노조가 사회 시스템 안에 자리를 잡았음에도 반노조 폭력이 여전히 용인되는 지금의 현실보다, 1920년대의 온정 어린 '파업 중재'의 낭만이 부럽다면 그것처럼 씁쓸한 일도 없을 것이리라. 여하튼 당시 잘나가는 냉면 배달부는 거액에 스카우트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냉면의 인기와 냉면 배달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슴슴한' 냉면처럼 '슴슴한' 우리 음식 이야기

이 책은 친절하게도 전국의 전통 있는 냉면집을 소개하며 끝을 맺는다. 해주 출신 실향민들이 사는 백령도의 해주냉면, 부산 피란민들이 즐겨 먹었다는 부산의 대표 음식 밀면, 맵싸한 양념과 가자미식해를 곁들이고 '장수'를 기원하며 긴 냉면 가닥을 목구멍으로 훌훌 넘기는 함흥냉면, 두툼한 육전이 올라가는 화려한 모양의 진주냉면 등, 백화점 같은 다양한 냉면과 냉면집이 이 책 속에 전시돼 있다. 아쉬운 점은 냉면과 관련된 정보를 촘촘하게 나열하느라 저자의 '냉면 철학'을 정작 빠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수십 년간 음식과 맛을 추적해온 피디 출신다운 꼼꼼한 취재력은 돋보이지만, 음식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즐거움이 있다. 발로 쓴 이야기여서 그렇다. 저자가 냉면에 대해 내리는 정의를 거칠게 요약하면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만들어내는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라는 것인데, 그에 걸맞게 전국의 평범한 '냉면쟁이들'을 찾아가 구술을 기록하고 그것을 엮어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식품학이나 미생물학의 저명한 권위자가 아니라, 수십 년간 매일 냉면을 먹고 만들고 나르던 평범한 사람들이 쏟아낸 역사를 모아낸 것이어서 더 입맛을 돋우는 것인지 모른다. 화려한 궁중 음식 같지 않은, '슴슴한' 냉면 맛 같은 이 땅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풀뿌리 역사여서 더 그렇다. ('슴슴한'은 '심심한'의 북한식 표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냉면 맛을 '슴슴하다'로 표현하고 있다. '심심하다'는 우리식 표현에 '담백하다'는 식의 의미 몇 가지를 덧씌운 것으로 읽힌다.)

냉면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지천에서 쑥쑥 나는 메밀을 이용해 면을 만든다. 여기에서는 '농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 선조의 소박한 게으름도 느껴진다. 쌀을 먹기 위해 우리는 온 힘을 쏟지만, 갈색빛 거친 메밀은 그런 우리를 위로해 준다. 농한기, 12월의 어느 날 밤, 차가운 얼음을 깨고 동치미 국물 한 바가지 부어 말아 먹는 냉면을 앞에 두고, 평양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늘어지게 게으름도 피워봤을 것이다. 거친 메밀껍질이 점점이 박힌 면발을 넘기며 함께 씹는 동치미 무 한 조각은 다음 날 아침 개운한 트림으로 화답했을 것이다. 음식에는 항상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평양 사람들처럼 오늘 저녁에는 선주후면(先酒後麵, 고기와 술을 먼저 먹고 면은 나중에 먹는다는 평양 속담을 한자로 옮긴 것. 평양 사람들은 선주후면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하며 각종 음식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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