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은 새벽 같이 변산 의상봉의 의상암터와 ‘폐사지 답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불사의방으로 오릅니다. 그곳, 절벽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암자를 쇠사슬로 얽어서 쇠못에 묶어둔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패망한 백제의 청년 진표가 20대의 뜨거운 나이에 그곳에 올라 스스로 몸을 망가트리는 참혹한 수행으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만나 법을 구한 현장입니다. 그곳에 서면 글이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느꺼움이 밀려올 것입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나라 안에 하나밖에 없는 일본식 사찰 건축의 모습을 지닌 군산 동국사를 들렀다 옵니다.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아래는 교장 선생님의 폐사지 답사기 중 전라북도편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1200년 8월 21일 이규보가 원효굴에 올랐는데 당시의 기록이 이렇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가 고고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용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만이 있을 뿐, 밥 짓는 도구도 없고 시중드는 이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원효방은 절벽 가운데에 있는 굴이다. 사다리를 통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정계와 창호, 곧 뜰과 섬돌 그리고 창문이 있었다고 하니 굴에 잇대어 전각이 지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다리는 없고 수직으로 곧추 선 절벽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낭떠러지의 옆구리를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디딤돌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아찔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
그날 이규보는 시도 한 수 남겼는데 제목이 <팔월 이십일에 능가산 원효방에 제하다.(八月二十日 題楞迦山元曉房)>라는 것인데 제목 곁에 주를 달기를 “변산을 능가라고도 한다. 옛날 원효가 살던 방장이 지금까지 있는데, 한 늙은 비구승이 혼자 수진하면서 시자도 솥·탕반 등 밥 짓는 도구도 없이 날마다 소래사에서 재만 올릴 뿐이었다”라고 했으며 시는 이렇다.
산을 따라 위태로운 사다리 건너고 循山度危梯
발을 겹치며 좁은 길을 다니네 疊足行線路
위에는 백 길의 산마루 있어 上有百仞巓
원효가 일찍이 집 짓고 살았네 曉聖曾結宇
신령의 자취 어디로 사라졌나 靈蹤杳何處
남긴 진영 비단에 머물러 있구나 遺影留鵝素
다천에 맑고 깨끗한 물 고여있어 茶泉貯寒玉
한 모금 마시니 젓과 같은 맛이네 酌飮味如乳
이곳에 옛날에는 물이 나오지 않아 此地舊無水
스님들이 살아갈 수 없었다는데 釋子難棲住
원효가 한번 와서 산 뒤에는 曉公一來寄
바위 구멍에서 단물이 솟아났네 甘液湧巖竇
우리 선사가 높은 도를 이어받아 吾師繼高蹲
짧은 갈초 입고 이곳에 사네 短葛此來寓
돌아보건대 팔 척쯤 되는 방에 環顧八尺房
한 쌍의 신발이 있을 뿐이구나 惟有一雙屨
시중드는 자도 없으니 亦無侍居者
홀로 앉아 세월을 보내누나 獨坐度朝暮
소성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小性復生世
(원효대사를 세상에서 소성거사라고도 한다 曉師俗號小性居士)
감히 굽혀 절하지 않겠는가 敢不拜僂傴
또 우금바위의 왼쪽에는 옥천암이 있었는데 그곳의 기록은 표암(豹菴) 강세황(1712~1791)이 그림과 함께 기문으로 남겼다. 그림은 <우금암도>이며 LA주립미술관(LA County Museum of Arts)이 소장하고 있으며, <유 우금암기(遊禹金巖記)>는 그림 가운데에 함께 적혀 있으며, 그의 문집에도 남아 있는데 그중 옥천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절에 들어가 우러르니 절 뒤에는 만장(萬丈)의 높은 봉우리가 하늘의 구름을 꿰뚫고 서 있고, 봉우리 위에는 바위 셋이 있는데 높이가 모두 백여 장이나 되어 보였다. 가마를 타고 올라가니 바위 밑에 굴이 있는데 크기가 백 칸 집 같았고, 길이도 수십 장쯤 되는데 벽 무늬가 가로 세로로 되어 있어 마치 무늬가 아로새겨진 비단 같았다. 이 굴을 우진굴(禹陳窟) 혹은 우금굴이라고 하는데 굴 앞에는 자그마한 절이 있어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세 글자로 편액하였다.
강세황이 말하는 절은 지금의 개암사이며, 바위 아래에 다다라 원효방으로 가는 오른쪽 길이 아니라 왼쪽 길로 접어들면 또 하나의 큰 굴이 있다. 강세황은 그 굴을 우진굴 혹은 우금굴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앞 넓은 마당에 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불사의방은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 바로 아래 바위벼랑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 한 암자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하여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만나 수기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로 인하여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결합하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미륵신앙이 싹튼 곳이기도 하다. 암자터는 7~8m의 수직 벽을 따라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며 열 명 정도의 사람이 둘러앉으면 꽉 찰 만큼 좁은 공간이다. 예전에는 그 작은 공간에 건물이 있었으며, 그 건물 안에 진표율사의 진영이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이규보는 원효굴에 올랐던 다음날, 불사의방에도 다녀갔는데 그때 남긴 글이 다음과 같다.
또 이른바 ‘불사의방장’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효공(曉公) 방장’의 만 배였고 높이 1백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을 피우고 율사의 진용에 예배하였다.
이규보가 말하는 방장이란 고승들이 거처하는 처소를 일컫는 말로 곧 절이나 암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효공의 방장’이란 이규보가 불사의방을 방문하기 전 다녀왔던 개암사 뒤 우금바위에 있는 원효굴을 가리키는 것이다. 두 곳 모두 절벽 가운데에 있으므로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규보로서는 호된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불사의방에 다녀 온 후 <남행월일기> 외에 시도 한 편 남겼는데 <또 불사의방장에 제하다(又題不思議方丈)>라는 것이다. 그 앞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불사의방장은 옛날 진표율사가 살면서 수진(修眞)한 곳이고 미륵과 지장보살이 현신(顯身)하여 수계(授戒)한 곳이다. 나무 사다리가 백 척이나 솟아있고, 사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바로 방장에 이르게 되는데 그 아래는 헤일 수 없는 계곡이다. 철사로 그 집을 이끌어 바위에 못질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바다의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
이규보가 글을 쓴 시기는 1201년이지만 그가 실제로 불사의방에 다녀간 것은 1200년 여름의 일이다. 1200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가 글을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많은 양을 불태워버리고 다시 간추려 쓴 시기가 1201년 3월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10여 년 전의 불사의방 모습이지만 위에 말한 시에 그 모습이 조금 더 남아 있다.
무지개 같은 사다리 발밑에 뻗쳤으니 虹矗危梯脚底長
몸을 돌려 만 길 아래로 내려가네 回身直下萬尋强
진인(眞人)은 이미 가고 자취조차 없는데 至人已化今無跡
옛집 누가 돌보는가 지금도 그대로네 古屋誰扶尙不僵
장륙은 어느 곳에 나타나는가 丈六定從何處現
대천은 이 속에 감출 만하네 大千猶可箇中藏
완산의 아전에 숨은 망기객이 完山吏隱忘機客
손을 닦고 한 줌의 향기 불사르러 오네 洗手來焚一瓣香
시로 미루어 보면 그 당시까지 전각이 있었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전각은 쇠로 만든 못을 바위에 박고 철사로 묶어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했으며, 그 안에는 진표율사의 진영이 걸려 있기도 했다. 그 표현들이 지금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비록 전각은 허물어져 간 곳 없고 진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바위 벼랑에 박혀 있었다던 난데없는 굵은 쇠못은 그 뿌리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불사의방으로 드나드는 절벽을 오르내리는 곳에 걸려 있었다던 백 척이나 되는 사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밧줄이 매달려 있으니까 말이다.
2014년 9월 20(토)∼21(일)일 폐사지학교 제11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20일(토)>
서울 출발(아침 7시, 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 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내소사→점심식사(칠산꽃게장)→개암사→원효굴→우금산성→옥천암터→개암사와 우금바위 조망처→개암사(템플스테이)→저녁식사→차담(茶談)→취침
<9월 21일(일)>
개암사 아침식사(아침 6시)→백련리→의상암터→불사의방→백련리→점심식사(변산 명인바지락죽)→군산 동국사→서울 압구정동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11강 참가비는 22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템플스테이 1박과 5회 식사비, 강의비,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울러 폐사지학교 카페(http://cafe.naver.com/pyesajischool)에도 많이 놀러 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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