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정체성 요인
최근 동아시아연구원과 겐론NPO가 함께 낸 한일국민상호인식조사에 따르면 한국민의 46.3%가 일본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느낀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북한(83.4%)에 이어 두 번째이고 중국(39.6%)보다 높다. 일본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할 만한 무력행사 의지와 능력이 있는 가상 적국이라 본다는 뜻이다.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와 달리 법과 질서,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anarchy)와 같아서 무력과 금력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지켜야 하는 장(場)이다. 여기서 안보위협은 상대국과 힘의 편차가 변화하거나 동맹의 균형이 깨어질 때 발생하고 이에 따라 안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GDP의 1%를 방위비에 써 왔지만 경제규모가 한국의 5.5배에 달해 그 규모는 한국 국방비의 1.4배 정도 상회한다. 일본경제는 지난 20여 년간 침체의 길을 걸었고, 아베 정권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아베노믹스로 경기회복을 꾀하고 있지만 성장률은 한국보다 높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일본과 한국의 군사력 변화는 크지 않아 갑자기 특별한 안보위협을 느낄 이유는 없다. 일본이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일동맹도 건재하다.
문제는 일본 힘의 변화라기보다는 정체성에 있다. 일본국민은 스스로 평화국가라 인식하지만 앞서 소개한 여론조사로는 한국민 53.1%는 아베정권 하 일본의 이념, 정치체제를 '군국주의'와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다. 1930년~1940년대 일본제국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인들은 1945년 패전 이후 평화국가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으나 주변국은 과거 군국주의적 정체성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2010년대 일본과 30년대 일본을 연결하는 고리는 역사문제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침략을 인정하지 않고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식화하는 행위로부터 과거 군국주의 정체성을 연상하고 있다.
국제정치는 폭력의 공간이지만 생활세계에서 작동하는 감정, 기억, 정체성 등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마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예(禮)를 명분으로 하여 천하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나누는 화이(華夷)개념에 근거한 국제질서를 이루어왔으나 19세기 유럽의 근대 국제질서로의 변환을 급속하고 압축적으로 겪어온 탓에 충분한 조정과 여과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역내 구성원들은 한편으로 주권국가 간 부국강병의 세계에 살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의식과 감정의 차원에서 전통질서의 요소들을 일정하게 간직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말 이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겪은 후 기억의 정치는 여전히 역내 양자 간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안보와 정체성이 상호 연계되어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밝히고 그 해법으로서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안팎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2. 중국의 공세
급속한 경제성장과 군사력 신장으로 강대국 반열에 오른 중국은 최근 힘으로 밀어붙이는 강대국 정치와 함께 정체성의 정치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국익 추구에 활용하고 있다. 비근한 예는 일본이 비난하는 이른바 ‘한중 역사동맹’ 시도이다. 지난 7월 3~4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한국 방문에서 한중 ‘밀월(蜜月)’을 띄우며 역사문제를 고리로 일본 때리기를 이끌었다. 일본 정부의 고노담화 검증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에 대한 양국의 우려 표명을 이끌어 내자 한국정부는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중국이 한일관계에 일종의 ‘쐐기(wedge)’를 박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일본과 전략적 경쟁 관계에 있다. 120년 전 청일전쟁의 충격적 패배로 일본에 빼앗긴 지역패권을 되찾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경제규모는 일본을 추월했으며 군사력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우월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과 군사동맹을 통해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규정한 센카쿠/조어도 해역에서 일본과 분쟁관계에 있다.
중국에 대일 역사공세는 한편으로 일본의 정체성을 공격하며 국내적 지지를 확보하는 명분게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을 끌어들여 한일관계 및 한미일 협력체제를 흔드는 노림수를 담은 전략게임이다. 나아가 중국의 일본 때리기는 사실상 동아시아 지역에서 우회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집단적 자위권 문제에서 보듯이 한국의 비판이 일본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되었다면 - 즉,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으로 군사대국화의 길을 열면 군국주의 선택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우려라 한다면 - 중국의 반대는 이를 통해 미일동맹이 강화되어 중국의 군사적 행동반경을 제약할 것이라는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다. 일본의 그릇된 정체성 추구를 명분으로 삼아 미일동맹을 약화하려는 전략적 이익을 담고 있다.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자국의 이익에 맞게 구축하는 데에도 정체성 요인을 활용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은 국력신장에 걸맞게 핵심이익을 정의, 확대하는 과정에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반(反)접근, 지역거부전략을 추구하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며,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 등 경제문제에서 미국에 사안별 대응을 해 왔다. 나아가 중국은 사안별 대응을 넘어 이제 지역 규범과 이를 구현하는 제도를 독자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신 지역질서를 건축하는 외교 지침으로 ‘친(親)·성(誠)·혜(惠)·용(容)’ 즉, ‘친하게, 성심껏, 호혜 원칙에 따라, 넓게 포용한다’는 키워드를 제시하여 “중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주변 환경이 필요하고 주변 나라들이 중국의 발전 혜택을 넓게 받도록 하겠다”는 일종의 '신형주변국관계'를 제시하였다. 이어 지역안보제도로서 미국이 배제된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를 제안하고, 경제면에서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D) 설립을 제시하는 한편, 고수준의 시장자유화를 지향하는 미국주도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에 대항하여 새로운 규범을 담는 지역다자FTA 모델을 제시하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 뒤에는 과거 천하질서라는 중국 중심 위계질서를 재현하려는 '중국몽'이 자리하고 있다.
3. 한국의 대안은?
지역질서를 주도하려는 중국의 시도에 대해 한국은 난처한 입장이다. 기성대국 미국은 패권 쇠퇴, 중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도전에 직면하여 아시아재균형(Asia rebalance)이란 개입전략을 들고 나왔으나 기성 규범과 제도를 넘는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정체성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속에서 미국은 동북아 국가들이 정체성의 대립을 접고 냉정한 이익계산의 외교로 대응하기를 주문해 왔다. 일본 역시 국내적으로 펼치는 역사해석을 둘러싼 정체성의 정치가 초래하는 국제적 반발을 무시하고 미국과 군사동맹을 통해 중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베 정권이 추구하는 역사 수정주의에 근거한 정체성의 정치와 정면충돌해 온 한국정부는 이를 고수할 때 미일의 노선과 부딪치고, 반대로 중국의 페이스에 말리면 결국 양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 줄서기 외교로 몰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넘는 해법으로 한미동맹을 견고히 해야 한다는 보수의 주장 즉, 미국 편에 확실히 서야 중국이 한국을 만만히 보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나, 포용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미중 양강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진보의 주장 모두 한계가 있다. 지역질서 주도를 놓고 벌이는 미중 경쟁의 구조적 제약으로부터 어느 쪽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관건은 동아시아 질서의 변환 과정에서 강대국 간 경쟁이 폭력적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양자 간에 질서건축 경쟁이 대립적으로 전개되어 양자택일적 상황을 초래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면서 조화롭게 진화하는 지역질서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 출발점은 동아시아 안보-경제의 물리적 공간에 작동하는 정체성 요인을 올바르게 다루는 데 있다. 안보/경제이익에 대한 냉철한 계산과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정체성이란 정서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상호노력하자는 미일의 논리는 동아시아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발상이라 실행에 한계가 있다. 반면 정체성 문제를 풀기 전에는 이익 협상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한중의 논리 역시 무리가 따른다.
동아시아의 문제는 지역질서의 안보-경제-정체성 각 영역 간 선순환 관계가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전후 서구 지역질서에서 보듯이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하면서 경제적 번영과 함께 안보경쟁이 완화되고 또한 경제적 상호의존이 더욱 강화되면서 지역의 집합정체성 구성을 추동하는 이른바 경제-안보-정체성의 선순환 구조는 동아시아에서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역내 경제의 초국적 상호의존이 급속히 심화했지만 안보경쟁성은 크게 줄어들지 못했으며, 시민사회 간 교류가 활성화되어도 민족주의 감정의 건재로 국경을 넘어서는 지역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역사문제가 촉발하는 민족주의 대립으로 과잉안보화가 초래되고 경제협력을 저해하는 상황이다. 중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정체성 대립을 부각, 활용하기도 한다. 현 정부가 내어놓은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처럼 비안보 영역에서 협력의 습관을 배양하여 신뢰를 쌓으면 안보영역에서 협력도 가능하다는 기능주의적 발상은 성립되지 않는다. 안보와 역사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으면 비안보 영역에서 협력으로부터 긍정적 전이효과(spillover effect)를 기대하기 어렵고 심지어 그 협력조차도 방해받을 수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질서에서 안보-경제와 정체성 간 협력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번영을 가져다주는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 메커니즘이 안보경쟁의 부정적 영향, 정체성 갈등의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한다. 안보와 역사 문제를 풀어나가는 노력을 통해 상호의존의 지속적 증대를 꾀하고 이를 통해 안보갈등을 억제하고 나아가 공동의 정체성을 배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단기적으로는 역사이슈를 통제하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한일상호인식조사로는 양국 국민들은 역사문제가 관계악화의 최대요인이고 관계개선의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동시에 양국 간 관계개선이 이루어져도 역사문제는 여전히 난제로 남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문제해결을 대일관계 회복의 전제로 삼을 일이 아니라 이는 그 자체로 풀어나가는 노력을 기울이되, 여타 이슈에 대해 분리 대응하는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둘째, 동아시아 집합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정체성의 진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체성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정치적으로 경합한다. 한국은 일본의 정체성을 군국주의로(53.1%), 일본은 한국의 정체성을 민족주의로 정의(44.8%)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안보위협이 되고, 일본은 한국이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격렬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만큼 안으로부터 민족주의로 역사를 왜곡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겪으면서 형성된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한 자기절제를 통해 국내정치적 확대재생산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 정체성 면에서 일본도, 중국도, 한국도 함께 진화(co-evolution)하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은 요원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