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진로에 대해 당 내외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새정치연합은 자기혁신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적 결론"이라는 것이다. 당의 가치노선을 놓고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으로부터 "진보정당의 기치를 들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정동영 "진보정당 기치 들자" vs 김영춘 "합리적 보수 배척 안돼"
비례대표제포럼 주최로 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야당, 어디로 가야 하는가' 주제의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정 전 장관은 "우리의 목표는 '2017년 진보정권의 창출'이며, 이를 위한 길은 곧 '진보정당'의 기치를 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취임 일성은 '보수정권의 재창출'인데 우리는 '정권 심판'만을 외친다"고 비판하면서 "민주-반민주 구도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는 껍질을 벗어 버리고, 보수정권 창출을 원하는 저쪽 세력과 진보·민주정부를 원하는 국민들 간 선명한 진보-보수 구도를 정립하는 데 당당히 나서야 한다"고 했다.
정 전 정관은 "진보정당의 모델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민주당'"이라며 "남부 농장 지주들을 대변하던 보수정당 민주당이 대공황을 겪으면서 사회보장과 노동자 권리 보장 2가지를 핵심 축으로 입법을 주도하고 뒷받침하며 '진보 민주당'으로 전환했고 이를 통해 20년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우리도 20년 진보집권 시대를 여는 것이 확고하게 한국에 복지국가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했다.
정 전 장관은 특히 "한미FTA 무효화 투쟁은 야당 역사에 기록될 획기적 전환점"이라며 "2011년 12월 11일 전당대회를 통해 '한미FTA 비준안 무효화 결의문'을 전 당원 만장일치로 노선으로 채택했으나 그 이후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19대) 총선에서 지고 '너무 왼쪽으로 가서 졌다'는 비과학적이고 아무 근거없는 논리가 횡행하며 정체성 자체가 실종됐다"고 했다.
발제자로 나선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도 "옛 민주당 시절부터 민주당을 배회하는 하나의 유령이 '중도 노선'"이라며 진보적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고원 서울과기대 교수도 "소통·공유·협력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위한 더 큰 진보'"를 신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했다.
고 교수는 "지금의 정치적 시대상황은 '보수 우위 구도가 소멸해 가는 단계'"라고 진단하며 "대중이 보수의 가치, 의제, 인적 자원을 통한 지배·통치를 점점 더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진보는 집권을 위해 보수 분파와의 연합 없이도 거의 대등한 1대1 대결구도를 형성할 수 있게 됐다"며 1997년, 2002년 대선 당시에는 민주당이 보수 내의 일파(김종필, 정몽준)와 연합해야만 한나라당과 일전을 겨룰 수 있었으나, 2012년 대선에서는 "적어도 5대5 구도로 바뀌었다"고 근거를 들었다.
"선거 공간에서 진보적 가치와 의제가 지배적 이슈가 되는 현상은 정치지형이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으로만 파악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하지만 소멸해 가는 보수 우위구도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패권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야당의 무능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같은 '진보강화론'에 대한 반론도 나왔다. 토론자로 나선 김영춘 전 의원은 "정치의 요체는 우리를 지지하는 야당 지지층을 확고하게 아군화시키고 중간층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라며 "진보정당으로 간다는 것의 의미에는 동의하는데, 표방을 '진보정당'으로 해야 하는지 회의적"이라고 했다.
김 전 의원은 "오히려 합리적인 보수세력도 '그건 맞다. (개혁)하자'는 사람이 많은데, 굳이 분리하거나 배척하는 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며 "혁신적 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도면 온건한 진보를 두루 포괄하면서 구체적 의제에서 복지국가·경제민주화를 실용적 관점에서 치열하고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언주 전 원내대변인도 '진보정당'이라는 지향에는 회의감을 표했고, 당 전략기획위원장을 지낸 최원식 의원도 "강경투쟁이 오래 되면 국민 피로감이 누적된다"며 "보수적 의제에 찬성하는 국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수권정당의 모습이 필요하다"고 정 전 장관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야당성 뿐만 아니라 수권정당의 모습, 중도개혁을 갖추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
최 의원은 정 전 장관이 언급한 'FTA 반대 투쟁'을 언급하며 "반대는 단순화할 수 있는데, 의회에서 정당으로서 협상능력을 높이는 투쟁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점에서 그 문제가 묻히지 않고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계층들의 이해를 다 조정해서 어떻게 수용하는 대안을 가질 것인가 하는 노력이 수권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아래로부터의 당 혁신' 요구 분출되기도…천정배 "당원 보통선거권 도입"
당의 정치적 지향 못지 않게 정당구조 혁신에 대한 논의도 터져나왔다. 참석자들은 대체적으로 현재 당의 주류인 국회의원과 지역위원장들의 혁신 역량에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고원 교수는 "새정치연합은 자기혁신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적 결론"이라고까지 했다.
고 교수는 정당혁신의 핵심 의제로 "△지난 총선에서 정실에 의한 공천파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의 반성을 요구한다. △중앙당 지도부와 공심위의 공천관련 역할과 권한을 제한하고 그 기능을 공천배심원제에 넘긴다.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연간(혹은 격년간) 활동을 당원·시민배심원제를 통해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해 차기 공천에 반영한다. △의원·지역위원장의 대의원 임명권, 지방의원 공천권을 타파하기 위해 지역선출제도를 개선한다"는 방안을 들었다.
천정배 전 법무장관과 정동영 전 장관, 김영춘 전 의원은 한목소리로 '당원투표제 도입'을 들고 나왔다. 천 전 장관은 "쇄신방안은 '국민에게는 비전을, 당원에게는 보통선거권을'"이라며 "앞으로 모든 중요 결정은 풀뿌리 당원들의 직접 투표로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대표나 지역위원장 등 당직자 선출은 물론 당의 비전과 정책도 당원투표로 정하자는 것이다. 천 전 장관은 지난해 기초공천제 폐지 전당원투표를 예로 들며 "결론과는 별개로 그 절차는 신기원을 이룬 민주적 절차였다"고 평했다.
천 전 장관은 박영선 비대위원장 체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비대위 자체가 기득권 세력(의원들)의 논의와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기대한다. 박 위원장이 어떻게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보통선거제 도입을 해낸다면 다음 대권주자로 박 위원장을 밀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이 이 발언에 웃자, 정색하고 "심각하게 하는 얘기"라고까지 했다. 그는 "다음 전당대회 때 저라도 우리 당의 노선, 강령, 비전에 대해 제안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정 전 장관도 "토대로 가야 한다"며 "지역위원장을 당원에게 뽑게 해서 당원 주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김 전 의원도 "새정치연합이 어떤 당이 돼야할 것인가는 정책과 경쟁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선택은 전 당원 투표, 당원이 결정하는 구조와 문화를 통해 우리 당 운명이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정당혁신 논의와 관련, 그간 당 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여러 세력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김한길·안철수 전 대표, 정세균 전 대표 등으로 대표되는 '중도강화론'에 대해서는 "진영 논리의 극복을 핵심 목표로 천명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치와 노선에 대한 포지티브한 규정 없이 단순히 중간만을 지향하다 보니 정체성 혼란과 기회주의의 진원이 된다", "진영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영논리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데도 '싸우지 않는 것이 중도'라는 함정에 빠져 선명한 실천적 행동을 못하게 된다"(고원 교수)라는 비판이 나왔다.한홍구 교수는 김·안 두 대표를 직접 겨냥하며 "과연 안철수나 김한길이 박근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운 존재였을까?"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안철수나 김한길이 '중도'가 아니라 차라리 제대로 된 '보수' 노선을 폈다면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울러 지지세를 넓혔을 것"이라며 "안철수는 중도노선의 의미와 필요성을 잘못 이해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치적 기회와 자산을 다 날려버렸다"고 했다. 그는 "안철수는 결정적 순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 있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중도가 아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비겁함과 무책임"이라며 "새정치연합은 한국 야당 사상 가장 빼어난 우당(友黨)이 되었던 것"이라고 했다.열린우리당 일부나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의 한명숙 지도부 등으로 대표되는 진보강화론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고 교수는 "진보파는 크게 민주-반민주 프레임에 입각한 전투적 운동주의와 계급·계층적 연대주의를 기본적 패러다임으로 삼는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면서, 전자에 대해 "사회경제적 의제를 다루는 능력은 빈약하거나 심지어 삼성 문제, 한미 FTA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보듯 보수적일 때조차 있다. '노무현 대 박정희' 프레임의 효과에서 경험했듯 '정치 대 경제'의 구도가 되어 필패하기 쉽고, 전투적 운동주의의 특성상 변질·왜곡되면 폐쇄적·배타적 패권주의로 전락하게 된다"고 비판했다.고 교수는 후자인 '계층 연대주의'에 대해서도 "전투적 운동주의보다 건강하고 진일보한 면이 있다"면서도 "대체로 사회적 강자 대 약자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다 보니 핍박에 대한 저항과 같은 이슈에 주로 집중하여 이슈의 폭이 협소해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쌍용자동차·강정·밀양 같은 선도투쟁, 상징투쟁에 함몰돼 의료·철도 민영화 같은 폭넓은 시민적 공감·연대가 형성될 수 있는 이슈와 괴리되기도 한다. 주로 고통스런 사회이슈를 기반으로 정치프로그램을 짜기 때문에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폭넓게 확장해 나가는 데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며,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집권 다수파 전략으로는 5% 부족하다"고 평했다.이른바 '486 정치인'들도 매서운 비난을 받았다. 고 교수는 "과거와 미래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는커녕 계파 '보스'들을 뒤치다꺼리하는 아전정치, 하청정치에 몰두해 왔다"며 "운동권 선후배로 묶인 인연을 매개로 '패거리 권력'화됐고, 19대 총선에서 친소관계에 의한 정실공천으로 상당수가 국회에 진출해 더 큰 기득권 집단을 형성했다"고 비난했다. 고 교수는 "중도파도 아니고 진보파도 아닌 중간에서 힘의 중심이동에 따라 왔다갔다했다"며 "당연히 독자적 가치와 비전을 정립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한 교수 역시 "그들의 전성시대는 20대, 학생회장 할 때였다. 거의 30년째 학생회장만 계속하고 계신 것 같다"며 "새정치연합 내의 진정한 '올드보이'는 이들보다 (연배가) 10년 쯤 위인 정동영, 천정배가 아니라 바로 이들"이라고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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